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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

        

        

        프리첸카야 중앙 정원 한 가운데엔 이반 대왕이 직접 건설을 명한 기념비와 동상들이 있다.

        

        [출정하는 용사상]과 [승리의 여신상]과 [이름 없는 영웅상]이 그것이다.

        

        마왕이 죽고 전쟁이 마무리 되고 난 뒤 어느 날, 프리첸카야 중앙 정원에서 동상 하나가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이름 없는 영웅상]. 그 동상이 있던 자리엔 작은 팻말 하나가 박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을 위한 추모는 나의 권리다.

       -엔리케.

        

        

        알렉산드르 왕세자는 왕실 모독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엘리자베타 공주는 엔리케의 권리를 인정해 동상의 회수를 포기했다고 한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하룻밤 사이에 수도 한 복판, 왕궁 지근거리에 있는 정원에서 동상 하나를 뜯어내 도둑질한 전설적인 대도이자, 마왕을 죽인 용사 파티의 일원에게 굳이 적대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엘리자베타는 최선의 처신을 한 셈이다. 엔리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왕실의 위엄을 해치지도 않았으니까.

        

        

        “이런 문구가 있었던가.”

        

        

        이반은 지하수로의 한 귀퉁이에서 [이름 없는 영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엔리케의 ‘던전’이 남부 프리첸카야 지하수로에 있다는 정보만 가지고 수색한 지 세 시간 만의 일이다.

        

        

       -귀하들의 이름이 잊힐 때에도.

       -귀하들의 영광은 불멸하리라.

       -이 자리에 없는 모든 이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없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엘리자베타 키릴로브나 크라실로프.

       -엔리케 세레게예비카.

        

        

        이반은 모자를 벗어 가슴 위에 얹으며 짧게 묵례했다.

        

        이 동상이 세워진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때, 그는 괜히 민망해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가 우연히 중앙 정원을 찾았던 날엔 이미 엔리케가 이 동상을 철거해간 이후였으니까.

        

        그의 묵례가 끝날 때쯤, 웃음 섞인 목소리가 지하수로에 울렸다.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지 말라.”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 있으니.”

        “아직 기억 하는군. 좋아, 환영한다, ‘작은’ 이반.”

        

        

        끼긱, 동상의 밑이 뒤틀리며 금속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석벽이 갈라지며 통로가 나타났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었던 냄새 나고 퀴퀴한 지하수로와는 전혀 다른,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 복도다.

       

        

        비단으로 벽을 칠한 사치스러운 복도를 걸어가며, 이반은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대부분의 용사파티 일원들처럼, 대스승 엔리케는 미치광이니까.

       

        

        물론 그 시점에 엔리케 또한 이반을 떠올리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절멸부대 요원들처럼, ‘작은’ 이반은 미치광이니까.

        

        

       *

        

        

        “직접 마주보는 건 칠 년 만이지? 그래, 그간 잘 지냈니, 제자야?”

        “그럭저럭.”

        

        

        이반은 응접실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처음 한 모금은 아주 조금, 입 안에서 천천히 굴리며.

        

        그건 일종의 예법이었다. 대부분의 예법이 그렇듯이, 암살 방지 대책의 일환이었단 뜻이다.

        

        독이 들어있진 않군. 이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음미하다가—

        

        

        “아, 요즘 나오는 화학독은 미각으론 구분할 수 없단다.”

        “음.”

        

        

        다시 잔 안에 뱉어내고는 테이블 위에 올렸다.

        

        

        “농담이야, 농담! 새 걸로 가져다 줄까?”

        “됐다. 차를 얻어 먹자고 온 것은 아니니까.”

        “하여간 딱딱하기는. 어린 녀석이.”

        

        

        엔리케는 눈웃음 지으며 화려한 소파 위에 늘어졌다.

        

        실크 드레스의 옆트임 사이로 새하얀 다리가 슬쩍 드러났다. 물론 그 정도로는 이반의 시선을 잡을 순 없었다. 눈 앞의 괴물은 지금 나이가 백은 넘긴 노괴니까.

        

        대체 얼마나 많은 비약과 정혈을 빨아먹은 걸까.

        

        이반은 살모사가 자신을 노려보며 혀를 날름거린다는 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은 흡혈귀의 둥지였으니까.

       

        

        엘더 뱀파이어, 그림자칼, 어둠의 송곳니. 그리고 ‘배신자’ 엔리케.

        

        한 세기 전, 자신을 물었던 엘더 뱀파이어를 배신해 피를 빨아먹고 프리첸카야 전역에 흩어져 있던 ‘흡혈귀 난동’을 마무리 지은 영웅.

        

        그 이후 한 세기간 이 여자는 ‘암살 의뢰’를 명분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취했다. 마왕이 발호하지 않았다면 용사가 이 여자를 처치하지 않았을까?

        

        이반은 테이블 아래에 내린 손으로 조심스럽게 도끼자루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래,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오긴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현역답고 좋단 말이지? 그… 현역 답다는 게 우리 사이에선 칭찬이 아니지만 말야. 그치?”

        “프리실라는 어디에 있지?”

        “아하, 본론부터! 넌 언제나 그랬지!”

        

        

        엔리케는 실실 웃으며 깍지를 꼈다.

        

        드레스가 부드럽게 출렁이며 고혹적인 몸태가 드러났다. (물론 이반은 그보다 70살 연상에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커버 범위는 위아래 최대 10세 안쪽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물었을까. 안 물었을까?”

        “안 물었겠지.”

        “어머? 어떻게 확신해?”

        “그랬다면 날 초대하는 게 아니라 습격했어야지.”

        

        

        이반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가르쳐준 원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복수가 아니던가.”

        “으음? 그 꼬질꼬질한 기집애가 네 ‘복수’ 범위에 포함이라도 된단 말이지?”

        “내가 거뒀으니.”

        

        

        프리실라를 거두던 날을 기억한다. 그 아이는 군영 앞에 몰려든 난민들 사이에서도 멸시 당하던 고아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이 본인 뿐이니까. 그걸 깨달은 아이는 오히려 언제나 당차게 행동했다.

        

        슬퍼하고 우울해하는 아이를 돕기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미 충분히 울적한 세상이었으니까.

        

        누군가를 동정하기 위해선 그 자신에게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 시절 연합 왕국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반은 프리실라와 몇몇 아이들을 기억한다. 그 아이들을 거두기로 마음 먹고 퇴역해 고아원을 설립했으므로, 그 아이들은 그의 자식들이나 다름 없다.

        

        당연히, 자식이 다친다면 복수를 해야 한다.

        

        

        “너무 독기 품지 마. 어설퍼 보이니까.”

        

        

        엔리케는 싱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여전히 가득 차 있는 홍차가 테이블 위에서 작게 찰랑였다.

        

        

        “내가 가르쳐주지 않았니? 독기는 피식자들의 전유물이라고. 복수와 자기방어를 강조해가며 알록달록하게 몸을 칠하는 건, 약자들의 발악이라고.”

        “대답은?”

        “아직 살아있어. 물지도 않았고. 멀쩡해. 잘 씻겨서 예쁜 옷도 입히고 맛있는 것도 먹였지. 자, 이제 네가 대답해봐.”

        

        

        엔리케는 새하얀 손가락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얹으며 말했다.

        

        

        “뭘 꾸미고 있지?”

        “…음?”

        “지금 네 ‘고아원’에서 뭘 꾸미고 있냐고.”

        

        

        엔리케는 진심이었다. 고아를 거둔다기에 고아 출신이라 그런가 정이 많다며 웃어 넘겼었다. 가련하긴 했다. 자신에게 왔다면 가족으로 거둬줄 생각이 충분히 있었던, 귀여운 제자가 아닌가.

        

        그렇게 2년이 지났다. 그리고 나타난 ‘고아원 출신 고아’ 녀석 하나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매복술을 사용할 줄 아는 게 아닌가.

        

        솔직히 뒤통수 맞은 기분이다. 기술 유출을 운운하기엔 뭐, 이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일인전승 유파 같은 것도 아니므로, 그냥 가르쳐줄 수야 있지.

        

        하지만, 스승이랑 같은 지역구에서 사업장 싸움이라도 하자는 듯이 요원을 파견할 건 뭐란 말인가?

        

        그녀는 억울했다. 이 녀석이 퇴역 후에 신분까지 말소해가며 죽은 척 살길래 찾아가지도 않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음에도 술 한잔 하자고 가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뭐?

        

        우리 앞마당에서 영업을 하겠다고, 요원을 보내가면서 시위를 해?

        

        이건 선전포고 맞지?

        

        솔직히 그 맹랑한 꼬맹이 잡아다가 죽이지도 않고 곱게 초청해서 ‘우리 그러지 말자, 서로 추억도 많이 있잖아? 싸울 필요 있니?’ 라는 의사까지 보여주고 있는데도.

        

        이 돌덩이 같은 남자는 ‘건드리면 죽인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상처받네.

        

        저 수염은 또 뭐야. 진짜 미쳐버리겠네. 한 세기 전에나 유행하던 걸 왜 지금 하고 있는 거야. 저거 변장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내가 그렇게 가르치진 않았는데.

        

        

        라는 무수히 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갈 때에도,

        

        엔리케는 여전히 한 세기를 살아온 전설적인 흡혈귀이자 위대한 용사 파티의 일원 답게 ‘능청스러운 미소’를 띄며 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꾸미냐니, 어디까지 이야기 해야하지?’

        

        

        이반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타가 그를 쓰는 이유는 그가 언더커버기 때문이다. 과거는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고, 이름도 평범하니 언제 써도 오해 받을 일이 없고, 외모도(그의 기준에선 대단히) 많이 바뀌었고.

        

        거기에 더해 이미 과거의 ‘이반 페트로비치 중령’은 사망자 처리가 되어 국립 묘지에 안장까지 된 상태다.

        

        그러니까, 엘리자베타의 뜻에 따르면 그의 신분과 임무는 기밀이란 의미.

        

        이걸 엔리케에게 말해도 되나?

        

        아니 근데, 엔리케와 엘리자베타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 아니었나?

        

        애초에 엔리케가 절멸부대를 창설했고, 엘리자베타는 그 부대 지휘관이었는데?

        

        

        두 사람은 정보 부족으로 인한 두통을 앓으며, 그러나 동시에 철저히 훈련 받은 요원으로서의 느긋함과 신중함을 잃지 않으며 미소 지었다.

        

        

        ‘미친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미친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거 배신이야,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거 배신인가? 이 여자가 설마 엘리자베타에서 알렉산드르로 선을 갈아탔나?’

        

        

        사제지간은 오늘도 한마음 한뜻으로 우애를 돈독히 다져가고 있었다.

        1월 중순 겨울날의 어느날 밤이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 습 연 재

    오늘분은 오늘밤에 올라올겁니다.

    연휴 끝나고 회사에 별 일 없으면요!

    공장좆소…칙쇼…!! (운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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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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