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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조명이 없어도 빛이 날 것 같은 금발, 겨울 호수처럼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는 눈썹과 좁혀진 미간은 신경질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몸에 두르고 있는 자연스러운 기품이 신경질적인 느낌을 위엄으로 바꾸었다. 

       저 청년이 바로 황제의 세 자식들 중 하나, 2황자 이리드였다.

       

       한 줄로 요약하면 성깔 있게 잘생겼다는 뜻이다.

       

       그는 수행원으로 소년 기사를 대동하고 있었다. 저번에 마탑 성과 발표회에서도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천마에 관심이 많다는 느낌이었지.

       

       나는 고장난 마탑주를 엎드린 자세로 대충 고정시키고 전면에 나섰다.

       

       “제국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마탑주님께서 조금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제국의 작은 태양께 마땅한 예의를 갖추지 못 한 것은 죄이나, 이는 충심으로 비롯된 일이니 부디 가엾게 여겨주시옵소서.”

       

       “말이 길군. 할 말은 그게 끝인가?”

       

       “마탑엔 왜 오셨습니까?”

       

       “⋯⋯⋯⋯?”

       

       말이 짧은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2황자의 표정이 맹해졌다. 참치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짜장면이 온 사람 같은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너⋯⋯ 방금 전까지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이 죄이니 어쩌니 말하지 않았나?”

       

       합당한 지적이어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사극 시청으로 단련된 깔끔하게 각 잡힌 큰절이다.

       예의도 갖췄으니까 한 번 더 물어봤다.

       

       “마탑엔 왜 오셨습니까?”

       

       “마법사 아니랄까봐 너도 괴짜로군. 제대로 된 예의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잡담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지.”

       

       “예.”

       

       “차원 마법을 시연했다고 들었다.”

       

       “예? 여긴 자색 마탑입니다만⋯⋯.”

       

       “직접 보여주고도 발뺌을 한다는 말이냐? 성과 보고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경에게 들었다. 차원 마법으로 다른 세계의 모습을 엿보았다지.”

       

       그 순간,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며 퍼즐이 맞춰졌다.

       

       수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온 황실지원금의 비밀.

       그건, 우리가 연구하는 게 실전된 차원 마법이라고 황실 측에서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람, 범인은 명확했다.

       천마 상영회를 흥미 깊게 보던, 지금 2황자를 수행하고 있는 저 소년. 

       

       다른 달인들은 내가 구현한 천마의 동작의 어설픔을 단번에 파악하고 조악한 환상이라며 혹평했었다. 그런데 저 소년은⋯⋯ 환상을 진짜라고 믿어버린 것 같다. 

       

       검술 수련을 얼마나 게을리 했으면 비전문가의 환상을 진짜라고 믿는다는 말인가!

       

       2황자의 옆에서 따라다닐 정도면 실력이 있거나 빽이 있거나 해야 할 텐데, 아마 공작가 자제 쯤 되는 녀석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말을 끝내주게 잘하거나⋯⋯.

       

       나는 이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차원 마법이 아닙니다. 저희가 연구하고 있는 건 환상 마법입니다.”

       

       “흠?”

       

       “구체적으로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그 안에서 오감을 느낄 수 있으며, 내부에 구현된 인물들과 대화할 수 있는 환상 마법입니다. 마치 다른 세계 속에 떨어진 것처럼요.”

       

       “⋯⋯혹시 지금 나한테 장난 치고 있는 건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말로 와닿지 않는다면, 체험해 보시겠습니까?”

       

       “체험이라, 차원 이동을?”

       

       “환상 마법입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차원 이동은 안전한가? 입장과 퇴장이 자유롭고?”

       

       “환상 마법이고, 안전합니다. 의식만을 옮겨오는 형식이라, 황자님의 옥체는 잠든 채로 누워 계시게 됩니다.”

       

       “차원 마법으로 영혼만을 옮긴다는 거군.”

       

       “영혼까지는 아닙니다. 의식이죠. 그리고 환상 마법입니다.”

       

       “좋아, 한 번 체험해보지.”

       

       “그렇다면 이쪽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확인서를 한 장 꺼냈다. 

       

       -가상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픽션이고 실존 인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안내받았으며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서명 : –

       

       “⋯⋯⋯⋯.”

       

       2황자는 팔짱을 끼고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나?”

       

       “예.”

       

       나는 응접실에서 나갔──

       

       “⋯⋯저기 굳어 있는 마탑주도 가지고 나가고.”

       

       “예.”

       

       나는 마탑주를 들쳐 업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

       

       2황자는 마탑주와 그 제자가 방에서 나가자, 다리를 꼬고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가늘게 뜬 눈꺼풀 아래에서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여러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2황자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자색 마탑주는⋯⋯ 소문대로 유약하군. 차원 마법의 복원자라는 제자 쪽은 꽤 담대해 보였지만, 결코 위협적이지는 않았어. 이 자리에 경이 따라와야 할 이유가 있었나?”

       

       “선량한 사람의 손에 들렸더라도 날붙이는 날붙이입니다, 전하.”

       

       “그리고 지금 나를 호위하고 있는 건 제국에서 가장 날카로운 보검이지. 시골 아낙네의 닭 잡는 칼을 경계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값진.”

       

       “제 동행에 대해서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대답해보게, 경.”

       

       소년 기사는 의심의 눈초리에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의심이었다.

       

       소년 기사는 검의 극의에 이르러 육신마저 한 꺼풀 벗어던진 강자였다. 그리고 현 황제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결코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 딸을 지키는 일에도 예외는 없었다. 2황자가 엘프 대수림 조사단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 2황자는 자신의 호위로 소년 기사를 요청했다. 황제는 이를 거절했다.

       

       ‘엘프 대수림의 위험도는 소드마스터를 파견할 정도로 높지 않다.’ 는 이유였다.

       

       결국 엘프 대수림에서 2황자는 눈 한쪽과 팔 한쪽을 잃었다. 3개월간의 집중 치료 끝에 다시 수복했지만, 그때의 경험은 뇌리에 깊숙이 남았다.

       

       그래서였다.

       

       마계 한가운데로 돌격하는 일도 아니고, 약세로 유명한 자색 마탑에 방문하는 일이다. 심지어 원한관계도 없으며 충분히 우호적인 상대다. 어째서 소년 기사가 ‘호위’로 따라붙었다는 말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가령, 1황녀나 3황자의 편을 들기로 마음을 먹어서. 자신을 정탐하기 위해 동행했다던가⋯⋯.

       

       

       겉모습은 젊어도 속은 충분히 늙은 소년 기사는 2황자의 의심을 쉽게 헤아릴 수 있었다. 그 의심을 해소할 시간적 여유도 충분했다. 낭랑하고 앳된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저는 세 분 중 누구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만⋯⋯ 믿지 않으시겠지요.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황제 폐하로부터 세 가지 임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황실 후원금 책정. 제국 방위. 위협으로부터의 황족 핏줄 보호.”

       

       2황자는 ‘위협’에 강세를 실어서 대답했다.

       

       “예. 정확히는 대처할 수 없는 위협으로부터의 보호입니다. 엘프 대수림에서 황자님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해낼 수 있었습니다.”

       

       “팔이 잘리고, 눈을 잃었지만 말이지. 그렇다면 이 자색 마탑이 대처할 수 없는 위협이라는 뜻인가?”

       

       “자색 마탑주입니다.”

       

       소년 기사의 대답에 2황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쉽게 믿기 힘든 말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마탑 중에서 최약체로 여겨지는 자색 마탑이다. 

       그리고 당장 만나 본 자색 마탑주는,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았다.

       

       

       “차원 마법을 발표한 그의 등장 이전까지, 자색 마탑에 지원되는 모든 지원금은⋯⋯ 자색 마탑주 개인에게 지급되는 금액이었습니다.”

       

       “개인에게라. 그게 무슨 의미지?”

       

       “황실에서 마탑에게 지원금을 투자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해당 학파의 마법 발전’. 둘째, ‘유사시 마법사 인력 수급’. 자색 마탑에게는 첫째 항목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환상 마법은 실용성이 부족하니까요.”

       

       영민한 2황자는 핵심을 캐치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자색 마탑주 한 명이, 다른 마탑 전체의 인력과 비견된다? 그래서, 자색 마탑주 한 명을 고용하는 셈 치고 지원금을 넘겼다?”

       

       “마탑주 중에서 가장 전투에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청색 마탑주도 받지 못 한 평가입니다.”

       

       “경의 입으로 말한 것 같은데, 환상 마법은 실용성이 부족하다고.”

       

       “그녀가 환상 마법이 아니라 화염 마법을 배웠다면, 제국의 구조가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괴물에 가까운 천재입니다.”

       

       “쉽게 믿기지는 않지만⋯⋯ 하, 그러면 세기에 한 번 나올 천재들이 연달아 자색 마탑을 골랐다는 뜻이군?”

       

       “그런 셈이군요.”

       

       

       2황자는 화를 가라앉히며 몸에서 힘을 뺐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진실. 

       진실이라면 믿을 수 없어도 믿어야 한다. 낡은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것은 지배자에게 위험한 독이었으니까.

       

       2황자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재조정했다. 

       

       자색 마탑주 : 유약한 얼뜨기 => 토끼의 탈을 쓴 드래곤.

       

       자색 마탑주의 제자 : 아무리 천재여도 환상 마법 전공이면 무력이 낮을 것이다 => 괜히 실전된 차원 마법을 복원한 게 아니구나, 이 녀석도 드래곤 예비 후보.

       

       소년 기사 : 중립이라고 말해놓고는 치사하게 누님이나 동생에게 붙은 놈 => 진정한 충신.

       

       

       “다음으로 넘어가지. 마탑주의 제자는 자신의 마법이 환상 마법이라고 말하던데.”

       

       “눈 가리고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경험해 보겠다고 하면, 말리겠는가?”

       

       “안전하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습니다. 황족에게 선보여도 괜찮을 정도로 안전 장치를 갖춘 것이겠지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오지. 이 마법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말이야.”

       

       2황자는 다혈질에 충동적인 성향이 있었으나, 과감하게 나서는 용기와 담대함은 높이 평가받을 만 했다. 소년 기사는 2황자를 말리지 않았다.

       

       ===============================================================

       

       “사인했다. 시연해봐라. 그 환상 마법이라고 주장하는 것 말이다.”

       

       “정말 환상 마법이 맞습니다.”

       

       “그래,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고통도 느끼며, 이전에 없었던 지식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그들과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지만 환상 마법이라고 주장하는 것 말이지.”

       

       “기억해주세요. 모든 것은 픽션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상의 산물입니다.”

       

       “알았으니까 해 봐라.”

       

       “현실 시간으로 3시간 후, 황자님을 다시 부르겠습니다. 손목에 표식을 남겨 드릴 테니 귀환 시간을 알아볼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픽션이 맞습니다.”

       

       “과하게 집요하군, 알──”

       

       

       ‘알아들었으니까 세 번째로 픽션이니 뭐니 입을 놀렸다가는 맹세컨대 지원금을 반으로 깎겠다!’라는 2황자의 사자후가 울려퍼지는 일은 없었다.

       

       마법은 발동했고, TRPG는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간에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짧은 묵념을 부탁드립니다.

    비축분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듀, 마이 파트너.

    내일은 75%의 확률로 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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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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