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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그럼 시작하지요.”

     

    황비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집회용으로도 사용되는 기도실 재단이다. 저택 부지 내의 작은 교회다.

     

    우리 가문의 시종이 투명한 병 두 개를 가져왔다.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는 성수다.

     

    아버지와 황비는 진지한 분위기다.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

    황비는 어떻게든 내가 성자의 재능을 개방하길 바라며 거금을 투자한 도박을 하느라 등골이 서늘할 테고.

     

    아버지는 내가 잘못될까 걱정하고 있다.

     

    다들 너무 진지하네.

    그렇게 긴장하면 될 일도 안 돼.

     

    “거 가져왔으면 뜸들이지 말고 빨리 줘.”

     

    내가 시종에게서 성수를 낚아챘다. 그는 행여나 병이 깨질까 노심초사하며 내 손에 집중했다.

     

    걱정 말라고. 낭비할 생각은 나도 없으니.

     

    성수의 코르크 마개를 열어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상한 거 아냐? 뭔가 시큼한데.”

     

    “예에? 가문 치유사들이 만든 최고급 성수입니다. 애초에 성수가 상할 리가….”

     

    “하하, 농담이야.”

     

    망설임 없이 병의 내용물을 눈앞에 놓인 성배에 쭉 부어 넣는다.

    성배의 능력을 가동하기 위한 과정이다.

     

    안에 넣는 액체는 평범한 물이어도 상관없지만 괜히 모양 내시겠다고 최고급으로 가져오셨단다.

     

    기왕이면 오렌지 주스로 할 것이지. 이 시대 사람들은 비타민이 부족해요.

     

    “공자님이 성배에 담긴 성수를 마시면 재능이 개화해요. 그게 무엇인지는 잔에 남은 표면에 문양으로 표시되지요.”

     

    황비가 설명했다.

    여기선 문양으로 나오는구나.

    나는 상태창으로 알 수 있겠지.

     

    “그럼 기도문을 읊어주세요.”

     

    황비가 아버지에게 요청한다. 아버지는 성서를 꺼내 페이지를 펼쳤다.

     

    그런 걸 한다고 타고난 재능이 변하지도 않고. 뽑기 할 때 고사 지내면 5성이 나오는 뭐 그런 토속신앙인가.

     

    결과는 정해져 있어.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성배의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아니, 잠깐!”

     

    “어으, 맛도 없네.”

     

    내가 입가를 소매로 훔치며 쩝쩝대니 황비가 얼이 빠져 입을 떡 벌렸다.

     

    탁, 성배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자, 지금부터 확인 들어가겄습니다잉.”

     

    한 모금 남은 성수의 표면이 일렁이며 문양이 그려진다.

     

    황비가 즉시 엎드려 코를 처박는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꼬라지다.

     

    사쿠라여? 사쿠라네!

     

    당연히 쳐야 할 것 같은 대사가 목 끝까지 차오른다. 간신히 본능을 참아내고 상태창에 집중했다.

     

    ‘으음.’

     

    순간 파직, 하고 머릿속에 인 두통에 눈가를 찡그렸다.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올뻔한 걸 간신히 참아낸다.

     

    방금 건 성수 맛이 역겨워서 그랬겠지.

    몇 달은 발효시킨 식초 맛이 났거든.

     

    ‘아, 좀 어지러운데.’

     

    상태창의 글자가 일그러진다.

    양쪽 눈의 초점이 안 맞는지 시야가 두 겹으로 흐릿해진다.

     

    뭐 얼마나 좋은 걸 주려고 그러는지 원.

     

     

    [계시의 성배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재능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그래, 나도 알아. 방금 원샷 때렸어.

    빨리 뭔지 알려줘 봐. 궁금해 죽겠거든. 뭔지는 알고 기절해야겠어.

     

     

    [재능이 개방되었습니다.]

    [의학(S) 스킬트리가 해방됩니다.]

     

     

    “오.”

     

    분명 내게 있는 재능은 두 개였다.

     

    그 중 하나의 정체는 바로 [의학]이었다.

     

    ‘의학은 분명 원작에 있을 리가 없는 스킬트리인데?’

     

    이 세상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내가 빙의 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과 재능이 그대로 이어져서 스킬화한 건가?

     

    이제야 내가 왜 두 개의 재능이 있었는지 이해됐다.

     

    ‘마음에 들어.’

     

    현재 가지고 있는 기본 스킬을 확인해본다.

     

     

    ―――――――――――

     

    ○ 의학 D

    현대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대상을 치료하는 스킬입니다.

     

    · 진단 D

    환자의 상태를 일부 파악합니다.

     

    · 처방 D

    진료한 환자의 상태가 약간 더 좋아집니다.

     

    · 응급처치 마스터리 E

    응급처치를 조금 더 빠르게 합니다.

     

    ―――――――――――

     

     

    ‘D부터 시작이네. 경험치를 쌓아 상위 스킬로 올리거나 다음 스킬이 개방되면 랭크가 올라가는 시스템이지. S까지 올릴 수 있다는 의미고.’

     

    내가 가진 지식을 이 세상에서 활용할 최고의 스킬들이다.

     

    지금은 진단이나 처방밖에 안 보이지만 나중엔 피부 시술 같은 것도 나오지 않을까?

     

    원래 의사 중에서도 피부과가 노동강도도 낮고 돈 잘 벌기로 아주 유명했지.

     

    이건 대박이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나왔어! 이 문양은…!”

     

    황비가 잔을 보며 외쳤다.

     

    그러고 보면 하나 더 있었지.

    내 정신이 아닌 몸, 라스 고트베르크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재능 쪽이다.

     

    ‘여긴 뭐가 나올까.’

     

    황비는 멍청하게도 원래 성녀나 성자의 재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

     

    네리아가 가진 것도 신성의 재능이라 치유력이 강해질 뿐이었다. 성녀로 선택받는 건 한참 나중이다.

     

    기왕 받는 거 잘 써먹어 줘야지.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상태창을 스크롤해 다음 문장을 확인한다.

     

    “이건, 뭐야. …뭐라고?”

     

    시종의 설명을 들은 황비의 얼굴에 분노가 퍼진다.

    당연히 성자가 아니라서 나오는 반응이다.

     

    실소를 참으며 내가 확인한 두 번째 재능.

     

     

    [재능이 개방되었습니다.]

    [연금술(S) 스킬트리가 해방됩니다.]

     

     

    ‘연금술?’

     

    이건 또 의외의 물건이다.

     

    “연금술이라니! 성자와 아무 상관 없잖아!”

     

    황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길길이 뛰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이구, 제가 연금술사가 될 몸이었나 봅니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저기 어디 광산에 구리 캐러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손바닥만 비벼도 순식간에 부자가 되겠군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척 농담을 던지자 황비가 뒷목을 당겼다.

     

    “맙소사. 이 망나니를 믿은 내가… 아이고.”

     

    “예? 황비님, 지금 이상한 단어가 들린 것 같습니다만?”

     

    황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잘못 들으셨어요. 재능 개방 축하드려요, 공자님.”

     

    “아이, 주치의 시험 볼 건데 연금술을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뭐 대단한 아티팩트라더니 별거 없네요. 황비님도 써보실래요?”

     

    내가 성배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성배는 집어든 손잡이부터 흐물흐물해지며 녹아내려 소멸했다.

     

    당연하지만 1회용 아티팩트다.

     

    “어이쿠, 비싼 거라더니 뭐 이렇게 부실하답니까. 크크크.”

     

    “…내가 미쳐 정말.”

     

    황비가 몸을 홱 돌리고는 쿵쿵 걸으며 기도실을 나섰다.

     

    마저 상태창을 확인해본다.

     

     

    ―――――――――――

     

    ○ 연금술 D

    대상 물질의 특성이나 성질을 강화하거나 변화시키는 스킬입니다.

     

    · 강화 D

    물질의 특성 한 가지가 조금 좋아집니다.

     

    · 압축 E

    물질의 성질을 유지한 채 부피를 줄입니다.

     

    · 합성 E

    두 물질의 특성을 가진 물질로 합성합니다.

     

    ―――――――――――

     

     

    ‘어라? 이거….’

     

    설명을 본 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본래 이 세상에서 연금술은 보조직업으로 가지는 계열의 스킬이다.

     

    즉, 검술이나 마법 같은 재능에 비하면 꽝이라고 할 수 있다.

     

    금속에만 사용하는 게 보통이라 철을 좀 더 양질로 강화해 방어구 제작 시 원가를 절감하는 둥.

     

    주로 대장장이들의 보조직업인데….

     

    ‘금속 한정이 아니잖아?’

     

    모든 물질에 쓸 수 있다.

     

    이걸 의학과 합치면.

     

    ‘제약 스킬이나 마찬가지야.’

     

    치유술로만 상처를 고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약을 만들 수 있다?

     

    돈을 아주 갈퀴로 쓸어 담겠는데.

     

    ‘이거도 대박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스, 몸은 괜찮니?”

     

    아버지가 내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까진 조금 어지러운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우선 치유를 받으러 가자. 준비해 뒀다.”

     

    아버지는 성배의 부작용이 계속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신뢰는 고맙지만 답답한 치유술을 받느니 내가 직접 보고 말지.

     

    “일단 돌아가 쉬면 괜찮아질 듯합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쿨럭, 쿨럭, 크흠. 걱정 마시죠.”

     

    “으음… 네가 그리 말한다면 알겠다만.”

     

    “예. 쿨럭, 쿨럭.”

     

    이상하게 기침이 계속 나오네.

     

    어쩐지 호흡이 잘 안 되는 기분이다.

     

    상태창을 이어 확인한다.

     

     

    [디버프를 획득했습니다.]

    [체력 지속 감소 E (성장형, 해제불가)]

     

     

    뭐야 이건.

     

    “아버지.”

     

    “그래, 라스.”

     

    “별 건 아닙니다만, 쿨럭, 역시 조금 부축은 필요할… 지도….”

     

    “라스? 라스!”

     

    나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

     

     

     

    [체력이 감소했습니다.]

    [체력이 감소했습니다.]

    [체력이 감소했습니다.]

     

     

    “자, 그러니까.”

     

    가만히 숨만 쉬어도 체력이 0.1씩 깎여나가는 디버프다 이거지.

     

    체력은 0이 되면 죽고.

     

    “가지가지 하네. 쿨럭, 쿨럭!”

     

    다음 날, 방에서 깨어난 나는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내며 기침을 했다.

     

    지금 내 최대 체력은 4.

    남은 건 2.8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는 동안은 깎이는 수치보다 자연 회복되는 수치가 더 크다는 점이었다.

     

    “네리아는 키 좀 덜 크고 끝났잖아.”

     

    왜 난 또 며칠 안에 죽을 위기인데?

     

    안 그래도 날 죽이려는 악녀랑 약혼한 기구한 신세인데.

     

    “그래도 재능을 두 개나 개방했어.”

     

    연금술과 의학.

     

    하나는 어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었다.

    빙의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 스킬화했다.

     

    항상 다람쥐 쳇바퀴 구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결과를 인정받은 느낌이라 기분은 좋다.

     

    “배드엔딩 삭제도 수월해질 것 같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쓰러져버리면 아무 소용 없다.

    이게 재능의 대가일까.

     

    “정당한 대가는 무슨.”

     

    아무리 봐도 억까였다.

    상태창에 운 스탯이 표시됐다면 마이너스로 지하까지 내려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럼 재능으로 극복해야지.”

     

    내 몸은 내가 고쳐야 하지 않겠어?

     

    까짓거, 떨어진 체력은 올리면 그만이다.

     

    “의학, 연금술.”

     

    처방전을 발행해서 약을 만들어 보자.

    환자는 나 자신.

    돌팔이 의사의 첫 진료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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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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