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

       학과실을 나선 나는 곧바로 아카데미 의무소로 향했다. 교수들의 말이 사실인지 현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의무소는 본청을 나와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제법 큰 이 층 짜리 건물. 아카데미의 크기를 생각하면 적절한 규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접수대 쪽에 사람 한 명이 앉아 있다. 그 사람은 턱을 괴고 책을 읽다 나를 한번 힐끔 쳐다 보더니 그리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까는 게 아닌가?

       

       “저기요. 여기 직원이세요?”    “네.”

       “혼자?”    “네.”

       “의사세요?”    “네.”

       

       뭐야, 저 태도는. 여튼 의사라고 하니 실력이나 좀 볼까.

       

       “머리가 아파서 약 좀 얻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저쪽을 턱으로 가리킨다. 거기로 시선을 돌리자 약병이 진열된 선반. 약병에는 대충 갈겨 쓴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두통약이라 써진 거 안에서 하나 꺼내 먹어요.”    “예?”

       

       그러나 의사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다시 독서 삼매경에 빠진다.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두통약 한 알을 꺼내며 의무소 내부를 둘러봤다.

       

       일 층은 진료실로 구조는 현생의 응급실과 유사했다. 입구에는 의사가 앉은 접수대. 그 뒤에는 서류보관 용도의 책장이 서있다. 서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거기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몇 개의 침상이 있고 간단한 구급약과 붕대 같은 것들이 담긴 선반이 보인다.

       

       안쪽에 방이 있기에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곳은 외과수술실이었다. 타일바닥에 철제 침대가 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한번도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그득하다.

       

       다른 방을 열어보니 사무실. 의사가 저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는 교단의 신성사제가 쓰는 곳일 테다.

       

       이 층은 입원실. 여기는 뭐 특별히 볼 건 없고.

       

       시설 자체는 좋은 것이 애초에 아카데미를 지을 때에 이런저런 사고와 부상이 있을 것을 예견한 듯한데, 교장의 보신주의로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구급법 교육은 사냥꾼 출신 교수가 하고 있고 멀끔한 의무소는 텅텅 비어 있고 이거 아주 개판이네, 개판. 

       

       교수들 말마따나 의무소 역량이 바닥이라 내가 교장에게 올린 보고서대로 교육훈련을 바로 바꿨다간 난리가 나겠군. 여기부터 빵빵하게 채우고 시작하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일 층으로 내려오니 의사는 여전히 책을 보느라 내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저놈은 잘라야겠어.

       

       이제 보니 2황녀님 완전 부처님이었잖아? 어떻게 이런 식으로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교장을 안 자르고 놔두냐. 아니, 정확히는 황제의 낙하산이라 못 자르는 것이지만.

       

       만약 웹소설에 이 따위 전개가 나온다면 분명 교장이 사실은 스파이라 제국의 주요 아카데미 하나를 무력화시키려는 밑작업이다, 교장 캐릭터의 지능을 너무 낮춘 것이 아니냐는 댓글이 달릴 게 뻔하다.

       

       하지만 다크엘프는 절대 멍청한 종족이 아니다. 비록 전투학과 쪽은 개차반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며칠간 파악해 보니 의외로 이론학과 쪽은 엄청나게 탄탄한 커리큘럼.

       

       저 유명한 황립 칼바사르 아카데미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아직 첫 기수도 배출하지 못한 짧은 역사를 감안하면 상당한 일이다.

       

       내가 봤을 때 교장은 절대 머리가 나쁜 게 아니야.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설마 진짜 간첩? 간첩학교의 교장이 간첩이다!?

       

       그럴 리가. 그랬다면 그 날고 기는 제국 첩보부가 진작 알아챘겠지. 멀고 먼 브룬스웰에서 백수한량 패싸움한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곳인데.

       

       여튼 그건 됐고, 얼른 가보자.

       

       

       * * * * *

       

       

       외출을 위해 교수실로 가니 때마침 올리시아가 와서 청소중이었다.

       

       여기 아카데미에 온 후 올리시아와 나는 아카데미 한켠의 직원구역에 살고 있다. 그래도 교수라고 내가 배정받은 숙소는 정원 딸린 작은 단독주택.

       

       올리사아는 거기서 살림을 하고 지내는데 종종 이렇게 교수실에 와서 청소를 한다. 교수실이 지저분해 높으신 분에게 내가 미운털 박히기라도 할까 봐 그런 것이다.

       

       주변정리 못하는 칠칠치 못한 놈이라 찍혀서 자칫 쫓겨나게 되면 다시 브룬스웰로 돌아가야 하니 올리시아 입장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지.

       

       “나 나갔다 온다.”

       “밖에요? 지금 근무시간이 아닌가요? 어디를 가시려고요?”

       “출장이야, 출장. 교단본부에 다녀 오려고.”

       “교단본부요? 그럼 시내를 가시는 건가요?”

       “거기를 지나가긴 해. 그런데 왜? 아, 그래.”

       

       올리시아의 눈빛을 본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가자. 시내에 잠깐 내려다 줄게.”

       “히잇!?”

       

       올리시아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서둘러 빗자루와 걸레를 정리하고 앞치마를 벗었다.

       

       기껏 브룬스웰을 떠나 제국수도에 왔지만 올리시아는 한동안 제대로 밖에 나가지를 못했다. 숙소 대청소부터 해서 눈코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

       

       브룬스웰에서도 종종 ‘제국수도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디안 님’ 어쩌고저쩌고하던 올리시아였으니 얼마나 시내에 나가보고 싶었겠나.

       

       거기다 생각해 보니 나도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년 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애들 수준을 끌어올릴 고민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올리시아와 나는 수석교수 앞으로 배정된 전용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를 나섰다. 

       

       아카데미는 도심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정문을 나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높은 건물의 숲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히야아아아….”

       

       거리에 줄지어 서있는 상점들을 보는 올리시아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침이 흘러 내릴 것만 같다.

       

       모두 기본적으로 삼 층, 높게는 육 층 이상의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심심하면 경비병들이 보이는 것이 치안도 굉장히 훌륭하고. 역시 대륙 최대 도시 칼바사르다.

       

       “여기서 내려 줄게. 이따 보자.”

       

       마차에서 내리는 올리시아에게 금화를 튕겨주자 올리시아가 양손으로 치마를 살짝 벌려 그것을 받아냈다.

       

       “감사합니다, 디안 님!”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 무슨 일 있으면 경비병한테 바로 달려가고. 알았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올리시아를 내려준 후에 조금 더 달려 교단본부로 향했다.

       

       교단본부는 황성을 비롯한 제국의 핵심기관들이 모인 ‘라이너스가’에 위치해 있다. 그 라이너스가 그 라이너스 맞다.

       

       원래 다른 이름이었는데 10년 전 라이너스가 마왕을 죽이고 돌아와 그것을 기리기 위해 그놈 이름으로 바꾼 것.

       

       천만다행으로 ‘디안가’는 없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라이너스고 나는 놈을 보조하는 조연캐. 주인공보다 앞에 나서는 건 지양이다.

       

       칼을 들고 무언가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라이너스의 청동상을 지나치니 저앞에 교단본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돌이 깔린 원형의 넓은 광장과 분수를 앞에 두고 번쩍이는 대리석 신전이 웅장하게 위용을 뽐내고 있다.

       

       신을 추앙하는 양각 문양이 아로새겨진 열주는 하나하나가 성인 남성 열 명이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는 엄청난 두께.

       

       어지간한 드래곤도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문을 수많은 사제와 사람들이 드나들고 그앞에는 예복을 차려 입은 신성기사들이 도끼창을 들고 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다.

       

       장엄함과 성스러움이 조화를 이룬, 바야흐로 대륙인 대부분이 신봉하는 최대 종교집단 여신교의 총본산답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선생님?”

       

       막 마차에서 내리자 신성기사 한 명이 내게 예의바르게 물었다.

       

       “여기 총사무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총사무장님 말씀이십니까? 혹시 따로 선약이 있으신지요?”

       “갑작스럽게 오느라 약속은 못 잡았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신성기사는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그리고 내가 타고 온 마차를 차례로 훑었다.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 인간인지, 이렇게 다짜고짜 총사무장이라는 엄청난 직책에 있는 사제를 만나게 해달라 요구할 수 있는 자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저는 제국 특수임무 아카데미의 전투수석교수 디안입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으니 총사무장님께 말씀이라도 전해주십시오.”

       

       주머니에서 아카데미 인장이 새겨진 신분증명서를 꺼내 보며주니 신성기사는 일단은 알겠다면서 교단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신성기사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바로 안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신성기사의 안내를 받아 교단본부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데 위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안 님!”

       

       올려다 보니 로르마네가 사제복을 펄럭이며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디안 님! 보고 싶었어요!”

       

       로르마네가 계단을 몇 개 남겨놓고 펄쩍 뛰어 내 품에 안겼다.

       

       “오랜만이다, 르네.”

       “하아, 디안 님…. 디안 님….”

       

       로르마네가 가슴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키며 얼굴을 마구 부벼댔다. 나를 안내하던 신성기사가 얼이 빠져서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르네. 보는 시선이 많다.”    “앗?!”

       

       그제서야 로르마네는 나를 밀쳐내면서 황급히 떨어지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죄송합니다, 디안 님. 너무 오랜만인지라 제가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나눠요.”

       

       본부 대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지나가는 사제들이 모두 로르마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총사무장은 교단 최고서열 중 하나. 그 위세가 대단할 것이다.

       

       집무실로 들어가자 다소 앳된 외양의 여사제가 뽈뽈 따라 들어왔다. 겉으로 봐서는 올리시아보다도 어린 것 같은데. 뭐하는 애지?

       

       내게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꼬맹이 사제는 찻잔과 주전자를 달그락거렸다. 로르마네의 전속사제 같은 그런 건가 보다.

       

       꼬맹이 사제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로르마네는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왜 갑자기 홀연히 떠나버렸는지, 그 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째서 갑자기 특수임무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는지 등등등등.

       

       “라이너스가 말 안 해줬어?”

       “그러기는 했지만 디안 님께 직접 듣고 싶은 걸요. 저는 디안 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늘 좋아했으니까요.”

       “그러냐.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로르마네와 마주보고 앉아 황성을 떠난 10년 전부터 아카데미 교수가 된 최근의 이야기를 간추려 들려 주었다.

       

       이야기 내내 로르마네는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빛내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거 꼭 옛날 특임대 시절이 생각나네.

       

       야영을 할 때 종존 나는 별자리에 관한 신화 같은 이야기들을 해줬는데 그럴 때면 로르마네는 항상 저랬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역시 디안 님은 대단하세요.”

       

       이야기를 마치자 로르마네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행여나 디안 님의 힘이 평화시대의 변수가 될지 모른다는 판단으로 무려 10년이라는 긴 세월 은둔하셨으면서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편하게 살려고….”

       “옛 전우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떨쳐 일어나 아카데미의 전투수석이라는 중책을 도맡아 주시다뇨….”

       

       교단의 총사무장님께서 묘사하는 디안이라는 놈은 참으로 고결하고 희생정신이 강한 자로군.

       

       “저는 정말로 디안 님이 존경스러워요.”

       “뭐… 고맙다. 그래서, 너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번에는 로르마네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성에서의 성대한 환영식 이후 로르마네는 그대로 교단으로 복귀, 남들은 평생 걸리는 것을 초고속 승품으로 불과 10년만에 총사무장의 자리에 올랐다고.

       

       비단 마왕을 죽인 용사파티의 일원의 후광 때문은 아니고, 애초에 용사파티에 차출될 정도의 재목이었는데 거기에 마왕사살의 업적이 추가된 것일뿐.

       

       갑자기 로르마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덥썩 움켜 잡았다.

       

       “만약 디안 님께서 그날 말도 없이 떠나지 않으셨다면 저는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하하….”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로르마네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 내 반응에 상당히 아쉬운 표정을 짓던 로르마네가 물었다.

       

       “그런데 디안 님. 여기는 왜 오신 거세요? 저를 보고 싶어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게 말이지. 예전에 특수임무 아카데미에 신성사제가 배치되어 있었지 않나?”

       “그랬어요. 막 창설했을 때 황성에서 소요를 제기해서 파견했었죠.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요.”

       “그 문제 때문에. 다시 신성사제가 필요하게 됐거든. 이랬다 저랬다 해서 미안하지만….”

       “마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르마네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내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던 꼬맹이 사제가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하세요, 총사무장님.”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교단 사무처에 그대로 전달하렴.”

       “알겠습니다, 총사무장님.”

       “이번 달 순회발령 예정인 주교급 사제들의 부임지를 변경한다.”

       

       뭣? 주교급? 주교는 교구 하나를 책임지는 고위사제. 그런 정도는 우리 아카데미에 필요 없는데….

       

       “아니, 잠깐만 로르마네. 주교급까지는 필요없고….”

       “아마 서른 명 정도일 거야. 그 사람들을 전부 특수임무 아카데미로 보낸다.”

       “서른 명이나?!”

       “이따 내가 갈 테니까 먼저 그 사람들한테 통보부터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총사무장님.”

       “어어! 기다려!”

       

       로르마네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으로 쪼르륵 달려가는 꼬맹이 사제의 손목을 황급히 붙잡았다.

       

       그런 인간들이 한 개 소대씩이나 올 필요는 없다고!

       

       

       

       

       

       

    다음화 보기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