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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추적추적 검은 비가 쏟아 내리는 숲속.

   크라슈와 릴리쉬가 마주보고 있었다.

     

   크라슈는 조금 전 릴리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떠올린 채 굳어 있었다.

     

   「너 어떻게 이그니스를…….」

     

   릴리쉬가 이그니스를 알아보았다.

   세계 침식의 힘과 섞인 탓에 도무지 신의 축복인 스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흑염 속 이그니스를 말이다.

     

   ‘어떻게?’

     

   크라슈야말로 의문이었다.

     

   크라슈가 지금까지 만난 샬롯과 총집사장 또한 벨로킨의 이그니스를 알고 있었다.

   하물며 총집사장의 경우에는 시험을 해야 하는 만큼 더더욱 자세히 벨로킨의 스킬을 볼 기회가 있다.

     

   그런 그녀조차 크라슈의 흑염을 보고, 이그니스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야, 당연한 이야기다.

     

   이그니스는 정화의 불길이다.

   그런 이그니스를 아는 이들이 흑염을 보고, 이그니스라 생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릴리쉬는 어떻게 알아본 걸까.

     

   크라슈의 머릿속 릴리쉬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그 기억은 당연히 그리 많지 않았다.

     

   릴리쉬는 크라슈와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물며 거의 매일 세계 침식에 인생을 바쳤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녀는 바깥에만 다녔다.

     

   크라슈도 나름 릴리쉬를 존중하고 있다.

   그녀가 단신으로 막아낸 세계 침식만 해도 세 자릿수가 넘어갈 테니까.

     

   그러니 크라슈가 아는 건 그녀의 업적과 명성.

   그리고 뛰어난 검술 실력.

   거기에.

     

   ‘스킬.’

     

   크라슈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릴리쉬의 스킬을 당연히 아는 그지만 그 스킬로는 이그니스를 알아보는 데 그다지 도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공격계 스킬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 또한 무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크라슈는 자기가 너무 오랫동안 침묵했음을 깨달았다.

   이래서는 의심이 깊어질 뿐이다.

     

   “누님, 니스로크는 어쩌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그러니 그냥 싸우느라 못 들은 척 말을 돌려 보았다.

   천연덕스럽게 놀란 표정을 짓는 크라슈를 보고, 릴리쉬는 침묵하다 입을 뗐다.

     

   “처리했다.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으니까.”

     

   크라슈야 세계 침식종을 상대로 상성이 좋으니 그렇다 쳐도.

   그 단시간에 니스로크를 처리했단 말에 새삼 그녀의 실력을 느꼈다.

     

   하긴, 릴리쉬에게 니스로크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적은 아니긴 했다.

   기사단이 없었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

     

   “그래서 질문을 계속하고 싶은데.”

     

   그러나 돌아온 대답을 보아하니 말 돌리기를 실패한 듯하였다.

   크라슈는 릴리쉬를 바라보았다.

     

   본래도 무뚝뚝한 편이었던 그녀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라슈는 속으로 혀를 찼다.

     

   크라슈는 릴리쉬에 관해 자세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와 벨로킨이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이라는 것은 안다.

   크라슈와 같이 반만 피가 섞인 이복동생이 아니라 진짜 친동생 말이다.

     

   만약, 그녀가 크라슈가 벨로킨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크라슈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크라슈는 대답 대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말하기 힘든 걸 꺼내 든다는 것처럼 말이다.

     

   “벨로킨 형님께 죽기 직전에 받았습니다.”

   “받았다는 건.”

   “제 스킬의 능력입니다. 저도 스킬을 하나 배웠으니까요.”

     

   벨로킨의 일은 릴리쉬도 들어서 알고 있다.

   세계 침식에서 맞서다 끝내 폭주한 천안귀를 쓰러트리고 사망했다.

     

   그리고 거기에 크라슈 또한 같이 있었다.

   분명 당시에 크라슈는 천안귀를 상대하기는커녕 세계 침식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고작 1년이 지난 시점.

   크라슈는 6성급 하르파스를 사냥할 만큼 강해져 있었다.

     

   도무지 1년 안에 할 수 있는 성장이라고는 납득 할 수가 없었다.

   천재인 발하임이라도 선이 있는 법이니 말이다.

     

   ‘몸에 흐르고 있는 저 힘.’

     

   릴리쉬는 자연스럽게 크라슈의 몸에 흐르는 세계 침식의 힘에 집중했다.

   릴리쉬의 눈에도 크라슈의 몸에 깃든 세계 침식의 힘은 저주로 비추어졌다.

     

   ‘설마.’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앞에 크라슈는 벨로킨의 이그니스를 스킬로 받아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주도 스킬로 훔칠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동안 크라슈가 전 세계를 다녔다는 건 릴리쉬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전 세계를 다닌 건 저주의 힘을 받기 위해서였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크라슈의 성장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발하임의 직계는 오직 강자만이 대우받을 수 있다.

   저주에 손을 대지 않는 이상 크라슈는 자신의 재능으로서는 대우받을 방법이 없었다.

     

   그걸 깨달은 릴리쉬의 눈이 흔들렸다.

     

   수많은 세계 침식을 다닌 릴리쉬이기에 안다.

   저주란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말이다.

     

   “크라슈, 안 돼.”

     

   자신 또한 가족을 등한시하긴 했으나.

   벨로킨의 죽음 이후 그녀는 가족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 크라슈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저주에 손을 댄다면 언젠가 그 여파가 크라슈를 집어삼킬 것이었다.

     

   벨로킨에 이어 막내까지 그렇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

     

   그리고 크라슈는 정작 릴리쉬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갑자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혹시 거짓말이 들통난 걸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릴리쉬의 표정은 거짓말을 간파한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처음과 같이 감정의 동요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저주에 계속 손대다간 네가 위험해.”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자 크라슈도 점차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금 릴리쉬 누님이 날 걱정하고 있는 건가?’

     

   과거에도 릴리쉬와 연결된 건 반쪽짜리 핏줄밖에 없던 크라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걱정을 보이자 크라슈는 도리어 당황했다.

     

   그야, 살면서 가족에게 걱정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었다.

   갑자기 이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 몸에 흐르는 세계 침식을 보고,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이건 뭐라고 오해를 풀기에도 애매했다.

   극혈침독에 관해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크라슈가 침묵하자 릴리쉬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크라슈를 평생 동생으로서 마주도 안 한 자신이다.

   그런데 지금 동생을 조언하려 드는 게 맞을까.

     

   크라슈는 평생 반푼이로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누구보다 강함을 갈망할 텐데.

     

   지금 자기 말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 걱정하지 마십쇼. 누님.”

     

   릴리쉬가 이야기를 어찌 꺼낼지 고민하는 사이 크라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릴리쉬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게 떨떠름하긴 했지만.

   눈앞에 그녀는 정말로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 마냥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딱히 위험한 건 없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오래 고민한 것들이니까요.”

     

   그러자 릴리쉬는 다른 말에 주목했다.

     

   “오래 고민…….”

     

   크라슈는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했다.

   그 말은 고민이 최소한 1년보다 더 길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렇다는 건.

     

   “……천안귀를 무찌른 건 벨로킨이 아니었구나.”

     

   오해로 시작된 생각이었으나 릴리쉬는 정답에 근접했다.

     

   “그 힘으로 천안귀를 무찌른 거니.”

   “……예.”

     

   사실인 걸 부정할 수 없으니 크라슈가 답했다.

   그러자 릴리쉬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벨로킨 장례식에 나오지 못한 건 벨로킨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었고.”

     

   또다시 오해가 겹쳤다.

   크라슈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대화하면 할수록 자꾸만 터무니없는 오해가 쌓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슈와 벨로킨의 사이를 모르는 릴리쉬이기에 할 수 있는 오해였다.

     

   그와 동시에 크라슈의 마음속 깊은 곳, 꺼림칙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크라슈는 그 감정이 금방 무엇인지 눈치챘다.

     

   [ 죄책감이군. ]

     

   검은 숲속 사이, 나무에 올라 있던 크림슨가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책감.’

     

   당연하지만 벨로킨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아니다.

   크라슈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벨로킨을 죽일 것이다.

     

   벨로킨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했으니까.

     

   그러니 크라슈는 벨로킨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이 일로 인해 오해는 물론 동정도 받고 싶지 않았다.

     

   [ 나한테는 이것저것 다 달라하던 건 언제고, 자기 누나에게는 죄책감을 느끼더냐? 고얀 놈 같으니. ]

     

   괜히 자기가 뿔난 크림슨가든이었다.

     

   [ 그래서 말할 것이냐. 죄책감 때문에. ]

     

   크라슈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알량한 죄책감으로 움직일 생각 따위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거짓을 입에 올렸는지 크라슈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저, 가족에게 오해와 동정을 받아 본 게 처음이라.

   잠시 죄책감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이었다.

     

   자신이 벨로킨을 죽였다는 말을 크라슈는 릴리쉬에게 할 생각 없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벨로킨이 누님에게는 더 가까울 테니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이야기도 거의 안 해본 배다른 동생보다야.

   피가 똑같은 형제인 벨로킨이 그녀에게도 더 소중할 터.

     

   그러니 크라슈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꿈틀-

     

   갑자기 크라슈의 제 육감이 반응했다.

   동시에 그가 고개를 세차게 돌렸을 때 릴리쉬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팔에 돋아난 오싹한 감각이 느껴졌다.

   오한이 들 만큼 진한 그 감각은 명백한 경계심이었다.

     

   위협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그 꺼림칙한 감각 속.

   크라슈는 이 감각을 준 놈의 정체를 눈치챘다.

     

   동시에 크라슈의 머릿속에 의문이 그려졌다.

     

   ‘이 녀석이 이 시점에서 왜 여기까지?’

     

   마경에서 가장 바깥 지역이자 그나마 안전한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동쪽이다.

   이건 이곳에서 느껴질 리가 없는 기척이었다.

     

   “……릴리쉬 누님.”

     

   크라슈가 서둘러 릴리쉬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 또한 이미 느꼈는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 순간 크림슨가든이 날아오르며 크라슈의 어깨 위에 앉았다.

     

   [ 안 좋은 놈이 움직였군. ]

     

   크림슨가든도 썩 달갑지 않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사이 크라슈와 릴리쉬가 즉시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똑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크라슈, 성벽으로 돌아가라!”

     

   자신의 옆을 똑바로 따라오는 크라슈를 보고, 당황한 릴리쉬가 외쳤다.

     

   크라슈가 하르파스를 쓰러트린 것을 보긴 했으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무리 발하임의 직계라 한들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고 자시고, 애초에 이 방향이 기사단이 있는 방향 아닙니까.”

     

   지금 느껴진 기척은 분명 기사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놈이 기사단 쪽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기사단을 덮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릴리쉬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경에서 혼자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도착하면 청해와 같이 바로 돌아가라.”

   “예, 일단 가죠.”

     

   크라슈의 대답은 전혀 안심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속도를 올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릴리쉬를 따라가며 크라슈 또한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크라슈는 이 기척의 정체를 예전에 느껴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레스.’

     

   8성급 악마계 침식종.

     

   그리고 과거.

   마경의 성벽을 무너트리고, 제국까지 침입해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

     

   마경의 중심지에 있어야 할 네임드 침식종이 갑작스럽게 동쪽에 나타났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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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Became a Munchkin skill thief meonchikin seukil dodug-i doeeossda 먼치킨 스킬 도둑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used to think that my stealing skill only worked on what was worthless to a person.

But just before I died, I realized that I could also steal the skills.

So I stole the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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