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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빗줄기가 점차 굵어졌다.

         

       더는 스콜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가 끊임없이 내렸다. 흔히 장마라고 부르는 기상 현상이다.

         

       이쪽 지역에서 장마는 태풍의 전조였다. 재앙의 낌새를 먼저 눈치챈 몇몇 요호들은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건 생필품이다. 보존식과 침구류로만 가방을 가득 채워야 한다. 가구나 가축, 목걸이나 반지와 같은 잡동사니들은 사치품에 불과하다. 그런 걸 가져가느니 생수 한 다발 더 싸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재난 스크롤.

         

       호우 방지 스크롤을 몸에 두르면 빗물이 몸에 젖어 저체온증에 걸리는 걸 어느 정도 막아준다. 마찬가지로 풍랑 방지 스크롤은 지면과 신체의 결속력을 강화하여 웬만한 바람에도 휘청거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재난용 스크롤을 사용한 주민들이 하나둘씩 폭우가 쏟아지는 곳으로 나왔다. 나는 우비를 쓴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열, 스물, 서른…. 저 멀리서 아녀자와 노인의 수를 세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첫 번째 피난 행렬이 꾸려졌다. 건장한 청년 몇 명은 약자들을 통솔하며 동쪽 땅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 대열에는 프레이의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녀자들이 떠나기 전 프레이는 어머니와 진한 포옹을 나눴다. 꼬맹이는 나에게 돌아오며 어느 때보다도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자.”

         

       우리는 이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범람 직전의 하천으로.

         

       -쏴아아아

         

       걸음을 옮길수록 소리도 점차 걸쭉해진다. 이것이 빗물 소리인지, 급류가 토해내는 트림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꿉꿉해서 듣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부터네.”

         

       지정 장소에 도착했다. 나와 프레이는 양팔을 걷어붙이고 탁류가 흐르는 하천을 내려다보았다.

         

       급류는 온갖 나무와 토사를 집어삼키며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중 뭍으로 올라오려는 일부를 막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이 하천의 폭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얼만데.”

       “1.3킬로미터.”

         

       한강보다도 넓은 강을 따라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

         

       그것도 이런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가능하면 하루 이내로.

         

       [미친 짓을 잘도 하려고 하시네요.]

         

       지구에서라면 불가능하다고 외쳤겠지.

         

       여기선 아니다.

         

       이곳, 아렌스 대륙에는 마법과 연성술이라는 준공법이 존재한다.

         

       “준비물부터 점검하자.”

       “시멘트, 석회, 모래, 물, 배합 설계도, 마력초와 라이터…. 빠짐없이 있는 것 같아.”

         

       토목공사는 지계마도의 영역이다.

         

       숙련된 지계마도사들은 5천세대 아파트 단지를 하루 만에 구축해내기도 한다. 마치 재료만 주어지면 무엇이든 찍어내는 이세계판 3D 프린터인 것이다.

         

       프레이는 그런 지계마도사들보다도 몇 수는 앞서 있는 천재였다. 마력과 재료, 그리고 설계도만 있다면 토카막이나 대전차미사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괴물.

         

       -쿠구구궁

         

       자연을 재료로 삼아 연성식을 전개했다. 프레이가 손을 움직임에 따라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았던 하천 옆으로 거대한 토벽이 세워졌다.

         

       “여기선 흙을 얼마나 가져다 써야 할까?”

         

       이 주변은 온통 흙이었다.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사용하면 오히려 지반이 불안정해지는 역효과를 낳는다. 이른바 과유불급이라는 소리다.

         

       따라서 적당한 수준과 두께로 제방을 쌓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수리통계학에서 흔히 ‘최적화’라고 부르는 과정을 수행해야 했다.

         

       이 최적화 과정을 내가 맡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 지점에서 유량 방정식을 적용한 다음 예상 강수량을 역산해낸다. 그렇게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천이 범람했을 때 물살의 세기를 예측했고.

         

       “지금 배합으로 2미터 73센치 이상.”

       “오케이.”

         

       딱 2주에서 3주일을 버틸 만한 강도의 두께를 얻어냈다.

         

       예측하고, 쌓아 올리고, 마력초를 빤 뒤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나와 프레이는 몇 시간에 걸쳐 요호족 마을을 중심으로 방벽을 건설했다.

         

       [이게 대체 무슨…. 아니, 기술고문 정도 되려면 이 정도 실력은 있어야 하는 거겠죠.]

         

       “뭐?”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슬슬 다 해간다.

         

       “에테르, 나 힘들어….”

       “이쪽만 완성하면 끝나.”

       “정말?”

         

       프레이의 입에 마력초를 물려준 뒤 불을 붙여주었다. 같은 연성술을 수백 번 사용하던 프레이는 거의 말라죽기 직전이었다. 마력 고갈이 머지않았다.

         

       그래도 해야 한다. 초췌한 눈빛으로 그녀가 손을 움직였다. 11미터 높이에 달하는 방벽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올라왔다.

         

       “으아.”

         

       결국 프레이는 모든 일을 끝내자마자 빨랫줄에 걸린 옷처럼 축 늘어졌다. 나는 꼬맹이를 재빨리 둘러멘 뒤 강가를 빠져나왔다.

         

       숲을 얼마나 내달렸을까. 등 너머에선 어느샌가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벌써 온 거야?”

       “네. 얘가 잘 해준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끝나서요.”

         

       미친 듯이 질주하다 보니 마지막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중엔 첫날 프레이에게 시비를 걸었던 두 남녀도 끼어있었다.

         

       그들은 곤히 잠들어있는 프레이를 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대열도 속도를 냈다. 먼저 간 요호 무리를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장 불안했던 프레이 어머니의 상태도 괜찮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숲속에서 행군한 걸까.

         

       저 멀찍이서 퉁, 하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그 반동으로 발걸음을 더욱 빨리 옮겼다.

         

         

       **

         

         

       “도착했다…!”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치던 숲에서 겨우 벗어나니 야트막한 동산이 펼쳐졌다.

         

       사실 야트막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규모가 꽤 큰 고원지대였다.

         

       이곳에서도 비 내리는 정도는 비슷했다. 그래도 파스트렌드 부족이 살던 마을에서보단 바람이 훨씬 적게 불고 있다.

         

       “잡초라도 몇 포기 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예 황무지네요.”

       “공유지의 비극이지. 다른 유목 민족들이 돌려가며 쓰니까 풀떼기 씨가 마를 수밖에.”

       “그래도 탁 트여있으니까 침수될 걱정은 없겠어요.”

         

       요호들은 짐을 풀고 막사를 설치했다. 의식주 중 일단 주(住)가 마련된 것이다.

         

       그 다음은 식(食)이었다. 먹을 게 있어야 한다.

         

       에너지를 하도 쓴지라 프레이와 나는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통조림을 까고 병나발을 불었다.

         

       “오자마자 술부터 마시냐?”

       “야, 내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 수해가 터졌을 때 물이 죄다 오염돼서 술만으로 며칠을 버텼었어!”

         

       이거 알콜중독자나 할 법한 소리인데.

         

       프레이는 금세 술병을 하나 비웠다. 막사 내부에선 알코올 향과 함께 들짐승 특유의 체취가 나기 시작했다.

         

       “그땐 이런 거 더럽게 맛없었는데….”

       “인생이 쓰면 술이 달아지긴 하더라.”

         

       나 또한 술잔을 비우며 날숨을 내쉬었다. 며칠 사이에 무리를 해서 그런지 속이 더부룩하다.

         

       그래도 머리만큼은 맑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만 흐느적거리는 느낌.

         

       프레이와 프레이의 어머니가 죽는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했다는 생각에 전신이 나른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레이는 술을 몇 잔 더 기울이다가 그대로 뻗어버렸다. 꼬맹이는 어머니가 있는 구석으로 가 몸을 눕히고 새우잠을 청했다. 그동안 나는 취기를 빼기 위해 뺨을 착착 두드렸다.

         

       아직 방심하면 안 돼.

         

       이 태풍이 지나간다고 끝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수준의 비바람을 앞으로 여섯 차례나 더 버텨야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때까지는 긴장의 끈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유량 방정식을 재점검했다. 이젠 강수량보다는 태풍 경로를 예측하는데 머리를 굴려보기로 했다.

         

       기상 예측이라니, 슈퍼컴퓨터나 할 수 있는 짓거리였다. 웃기는 건, 이 몸으로 그게 된다는 거.

         

       “큰일인데.”

         

       계산해보니 앞으로 보름 정도는 고원에서 지내야 한다.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끝이었다. 나머지는 요호족을 믿고 버텨야겠지.

         

       요호들에게 이런 수해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웬만한 대책은 세워두고 있었다.

         

       가장 큰 막사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차후 대책논의가 시작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3주 정도 버틸 만한 식량은 남아있다. 하지만….”

       “네. 이번 태풍은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일곱 개에 달하는 태풍. 그중에서 겨우 하나가 지나갔을 뿐이다.

         

       모든 태풍이 지나가기 전까지 어떠한 외부 활동도 할 수 없다. 수렵도, 채집도 못 한다. 고기로 삼을 만한 동물도, 열매를 딸 만한 나무도 모두 급류에 쓸려나갔을 테니까.

         

       빗물을 받아놓았다가 끓여서 식수로 쓰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겠지.

         

       “이대로라면 마을로 돌아가더라도 먹을 게 없습니다.”

       “아예 정착지를 옮길까요?”

       “다른 곳도 다 똑같을 텐데 어디로 간다고?”

         

       이곳 동쪽 지대는 지정학적으로 회랑(回廊)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가면 상급 마수가 드글거리는 마대륙.

         

       오른쪽으로 도로 돌아가면 필리우트 제국.

         

       이 위도에서 수인족의 영토는 두 지역 사이에서 좁다랗게 끼어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북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곳은 다른 부족의 영토였다.

         

       “어딜 가든 싸우는 건 마찬가지겠군.”

       “끄응.”

         

       단순하면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도 이건 버멜이 말해준 대로 수완을 발휘한다면 그럭저럭 잘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마땅히 좋은 방법이 있으련지요?”

         

       그 물음에 누군가가 손을 들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살리에르 영지를 약탈합시다.”

         

       어떤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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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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