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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

        차가운 공기와 버적거리는 풀떼기 위에 나뒹굴던 기나긴 시간 끝에, 마침내 되찾은 달콤한 시간은 실비아가 상상하고 바라왔던 것 이상으로 황홀했다.

        ​

        실비아는 잠든 애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오랜만에 재회였지만 하루종일 지붕을 고치느라 힘이 빠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안긴 실비아의 품이 너무나 아늑했기 때문인지, 애쉬는 어떻게든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를 썼지만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

        그렇다고 실비아는 그런 애쉬를 야속하다고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

        잠든 애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역시, 그녀가 애타게 바라던 그와의 일상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

        그녀는 옅은 숨을 내쉬는 애쉬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되찾았다.

        ​

        간신히.

        ​

        ​

        애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악몽에 시달리고, 결코 목표를 이루지 못할 자살 충동에 지독하게 시달리면서도 간신히 버텨온 고독은, 그가 실비아의 곁에 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몸집을 불려 다가왔다.

        ​

        이 고통, 이 외로움, 이 고독.

        ​

        애쉬와 함께하는 동안 점차 느끼지 않아서,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이 끔찍한 내면의 악마들은 알고 보니 그저 마음 깊숙이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

        도리어 그동안 힘을 기르고 있기라도 했는지, 그들은 전보다 더욱 거대해진 몸집으로 실비아를 덮쳤다.

        ​

        ​

        실비아는 애쉬 없이 보낸 지난날 동안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

        시간 개념이 부족한 실비아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대로 시간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실비아에게 지금의 상황은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영원한 지옥 속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애정의 욕구, 관계의 욕구. 

        ​

        한번 맛을 본 이후로 눈치도 없이 때때로 달아올라, 이내 곧 아랫배와 다리 사이를 미친 듯이 간질이는 개 같은 육신의 욕구.

        ​

        그 어떤 욕구도, 그 어떤 욕망도.

        ​

        아니, 아주 자그마한 소망 하나마저도 실비아는 이룰 수 없었다.

        ​

        넓은 숲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음에도, 마치 온몸이 꽁꽁 묶여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

        그나마 조금이라도 해소가 가능했던 건 결국 자기 파멸의 욕구뿐이었다.

        ​

        죽음도, 심각한 부상도 허락하지 않는 이 저주받은 몸 때문에 그것마저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쉴 새 없이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베어내는 것만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분출구였다.

        ​

        피로할수록, 얼굴에 피가 튈수록,

        ​

        마물들의 내장을 헤집다 그 심장에 손을 뻗어 뜯어낼 때마다,

        ​

        실비아 내면의 악마들은 잠잠해졌다.

        ​

        물론, 그들이 만족하고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

        그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방치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탈이었던 실비아가 찐득거리는 피로 뒤덮인 얼굴을 무표정하게 쓸어내릴 때마다, 마치 귀족들이 팔짱을 낀 채 검투사들을 내려다보듯, 그 끔찍한 감정들은 실비아를 비웃으며 잠시 입을 다물어준 것에 불과했다.

        ​

        비참했다.

        ​

        왜 마물을 잡는 것만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걸까.

        ​

        마왕이 저주를 내려서 이런 꼴이 된 것인데, 차라리 더 이상 싸우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게 해 주면 더 좋았을 텐데,

        ​

        차라리, 자신을 연약한 소녀로 만들어 마물들에 뜯기고 수없이 무력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면, 

        ​

        그럼, 이 비참한 투쟁을 그만둘 수 있었을 텐데.

        ​

        그런 온갖 기괴한 생각이 실비아를 가득 채웠다.

        ​

        자신이 용사이기 때문인 걸까.

        ​

        용사라는 그 숙명적 이름이 자신을 끊임없이 투쟁하게 만드는 것일까.

        ​

        그만하고 싶었다.

        ​

        죽고 싶었다.

        ​

        지고 싶었다.

        ​

        용사가 아니라, 애쉬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

        ​

        실비아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상대를 죽이고, 살아남으면 다음 주에 다시, 또 살아남으면 그 다음 주에 또다시.

        ​

        그렇게 목숨을 건 자신의 사투를 저 높은 곳에서 바라보던 훈련 교관들의 비틀린 비웃음이 머릿속에 번져 나갔다.

        ​

        귀족에서 내면으로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

        병사에서 용사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

        동료에서 마족으로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

        실비아는 경쟁과 투쟁의 삶에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

        애쉬와의 사랑이 그저 스쳐 지나간 한때의 꿈처럼 느껴졌다.

        ​

        그런 행복은 그녀의 인생에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

        그녀를 해방해줄 유일한 구원은 오직 애쉬 뿐이었다.

        ​

        애쉬의 사랑뿐이었다.

        ​

        ​

        며칠 전,

        ​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끔찍한 시간 속을 느리게 유영하던 실비아는 목구멍에 가득 찬 가래를 툭 뱉어냈다.

        ​

        뱉고 보니, 가래가 아니라 언제 입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있던 찐득거리는 마물의 피였다.

        ​

        정작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주제에, 정작 그 핏덩이를 눈으로 보고 나니 몹시 찝찝헀다.

        ​

        입 안이 텁텁하게 더럽혀졌다는 불쾌감은 물론이고, 목구멍이 지독한 냄새로 헐어버려 따끔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게 언제였더라.

        ​

        일주일 전인가 한 달 전인가, 아니면 반년 전이었나.

        ​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물통도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

        아, 오두막이 불탈 때 같이 없어졌던가.

        ​

        실비아는 잠시 마른기침을 뱉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러고 보니 근처에 호수가 있었지.”

        ​

        ​

        ​

        그녀는 중얼거리며 언젠가 애쉬와 함께 갔었던 호수를 향해 걸었다.

        ​

        그리고 발견했다.

        ​

        ​

        ​

        “애쉬.”

        ​

        ​

        ​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본능, 아니, 그건 새로운 종류의 저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실비아는 애쉬를 알아볼 수 있었다.

        ​

        ​

        ​

        “애…”

        ​

        ​

        ​

        하지만, 실비아는 그에게 다가가지도, 더 이상 입을 열지도 못했다.

        ​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애쉬의 뒤로 따라 들어가는 낯선 여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

        ​

        ​

        ​

        ​

        ​

        ​

        ​

        ​

        *

        처절한 경험과 끔찍한 악몽으로 도배된 그녀의 인생에서도 손꼽힐 만큼 괴로운 밤이었다.

        ​

        여전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은 더 이상 갈증이 아닌 거센 질투와 분노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

        그 어떤 말로도, 그 어떤 글로도, 이 세상 존재하는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그녀의 머리를 갉아 먹었다.

        ​

        창문이 정면에 달렸지 않아 안을 볼 수 없지만, 엉성하게 지어진 건물의 나무 틈 사이에서 옅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화롯불인지, 아니면 누군가 저 안에서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건지, 나무 틈 사이의 불빛은 계속 깜빡거렸다.

        ​

        실비아는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꽉 깨물었다.

        ​

        가면을 쓴 건 저 여자에게 저주를 옮기지 않기 위해서였나.

        ​

        마치 처음 애쉬를 만났을 때의 나처럼.

        ​

        안에서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걸까.

        ​

        당장이라도 저 오두막에 들이닥쳐 자신의 빈자리를 꿰찬 저 빌어먹을 여자를 도살하고, 그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애쉬에게 먹여주고 싶었다.

        ​

        하지만, 실비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

        만약, 오두막에 들이닥쳤다가, 정말 두 사람이 엉겨 붙어 있는 꼴이라도 보게 된다면,

        ​

        애쉬가 자신이 아닌 그 여자를 보호하려 들기라도 한다면, 

        ​

        그 순간 실비아는 결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

        무언가, 지금까지도 단 한 번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 다가올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

        이미 저주에 고통받는 데다, 죽지도 못하는 주제에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는가 싶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언제까지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영원히 고통받게 할 가혹한 일이 생기고 말 것이란 확신이 어째선지 자꾸만 샘솟았다.

        ​

        어쩌면,

        ​

        정말 어쩌면,

        ​

        ​

        ​

        “애쉬를 죽일지도 몰라.”

        ​

        ​

        ​

        실비아는 뜬 눈으로 오두막을 노려보며 밤을 지새우다, 모두가 잠든 것이 확실한 새벽에 조심히 호숫가로 내려가 목을 축였다.

        ​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

        이 터질 듯이 부푼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혹한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

        그때,

        ​

        여자는 오두막을 나섰다.

        ​

        ​

        실비아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안심했다.

        ​

        여자의 차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

        호흡도 걸음걸이도, 어제와 같다.

        ​

        기쁨이나 부끄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

        ​

        ​

        “나, 바본가.”

        ​

        ​

        ​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

        맨얼굴도 보일 수 없는 상대에게 섣불리 몸을 허락할 애쉬가 아니었다.

        ​

        게다가, 여자는 종교적인 장식이 잔뜩 새겨진 성스러운 하얀 갑옷을 입고 있었다.

        ​

        분명 여신교의 전사일 것이다.

        ​

        종교인이 육욕에 쉽게 빠질 리도 없겠지.

        ​

        ​

       

       “… 괜한 걱정을 했어.”

        ​

        ​

        ​

        분명히, 우연히 낯선 사람이 이 숲에서 길을 잃어 애쉬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이리라.

        ​

        안 그래도 지옥이나 다름없는 이 숲에 마기까지 가득 찼으니, 아무리 강인한 전사라도 하룻밤 쉴 곳은 필요했을 것이다.

        ​

        그렇게 우연히 이곳을 찾아내 잠을 잔 것뿐이다.

        ​

        분명, 그럴 것이다.

        ​

        ​

        실비아는 애타는 마음으로 보낸 지난 밤 동안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

        애쉬를 믿지 못한 것, 그리고 불온한 상상력에 괴로워하면서도 당당히 들어가 그를 앗아오지 못한 것 역시 그랬다.

        ​

        애쉬와 만난 이후로 그녀의 용기는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했다.

        ​

        실비아는 애쉬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

        안은 책상 하나만 덜렁 놓여 있을 뿐, 어떤 가구도 보이지 않았다.

        ​

        안쪽 방에는 애쉬가 잠들어있었다.

        ​

        오랜만에 보는 애쉬의 모습은 추위 때문에 온몸을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며 자는 모습이었다.

        ​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깝고, 또 애틋한지.

        ​

        실비아는 조용히 다시 오두막을 나섰다.

        ​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니만큼 애쉬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가죽, 구할 수 있어.”

        ​

        ​

        ​

        마기가 들이찬 후, 숲속엔 동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동물들도 있었다.

        ​

        조금 많이 돌아다녀야 할지 모르겠지만, 애쉬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

        실비아는 호수에서 걸어 나와 다시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

        매일 같이 헤매던 숲이 오늘따라 어쩐지 아름답게 보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

        ​

        ​

        ​

        ​

        ​

        ​

        ​

        ​

        *

        온종일 사냥감을 찾아다녔지만 잡은 건 겨우 노루 두 마리 뿐이었다.

        ​

        고기가 아닌 가죽을 원했기에, 최대한 많이 사냥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두 마리.

        ​

        게다가 시간은 이미 깊은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

        고기에는 짙은 마기가 배어 도저히 먹을 게 못 되었다.

        ​

        실비아는 하는 수 없이 가죽만을 챙겨 호숫가로 돌아갔다.

        ​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애쉬에게 어떻게 첫인사를 건네야 할까.

        ​

        호숫가를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

        왜 사라졌는지, 왜 도망쳤는지, 죽은 게 아니었다면 왜 내게 돌아오지 않았는지.

        ​

        마음속에 원망이 슬며시 피어나려다가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

        무슨 상관이야.

        ​

        이제 다시 만났는데.

        ​

        사랑하기 바쁜데 원망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

        오히려 그때는 자신이 잘못했었다.

        ​

        그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되었다.

        ​

        병들고 약해진 애쉬에게 눈을 뗀 내가 잘못이었다.

        ​

        그리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

        그녀는 그렇게 다짐하며 호숫가에 도착했다.

        ​

        ​

        ​

        “…”

        ​

        ​

        ​

        어제 본 그 여자가, 또다시 애쉬의 오두막에 들어가고 있었다.

        ​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실비아가 앨리스를 죽일 수 밖에 없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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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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