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공기와 버적거리는 풀떼기 위에 나뒹굴던 기나긴 시간 끝에, 마침내 되찾은 달콤한 시간은 실비아가 상상하고 바라왔던 것 이상으로 황홀했다.
실비아는 잠든 애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재회였지만 하루종일 지붕을 고치느라 힘이 빠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안긴 실비아의 품이 너무나 아늑했기 때문인지, 애쉬는 어떻게든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를 썼지만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다고 실비아는 그런 애쉬를 야속하다고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잠든 애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역시, 그녀가 애타게 바라던 그와의 일상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녀는 옅은 숨을 내쉬는 애쉬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되찾았다.
간신히.
애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악몽에 시달리고, 결코 목표를 이루지 못할 자살 충동에 지독하게 시달리면서도 간신히 버텨온 고독은, 그가 실비아의 곁에 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몸집을 불려 다가왔다.
이 고통, 이 외로움, 이 고독.
애쉬와 함께하는 동안 점차 느끼지 않아서,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이 끔찍한 내면의 악마들은 알고 보니 그저 마음 깊숙이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도리어 그동안 힘을 기르고 있기라도 했는지, 그들은 전보다 더욱 거대해진 몸집으로 실비아를 덮쳤다.
실비아는 애쉬 없이 보낸 지난날 동안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시간 개념이 부족한 실비아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대로 시간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실비아에게 지금의 상황은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영원한 지옥 속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정의 욕구, 관계의 욕구.
한번 맛을 본 이후로 눈치도 없이 때때로 달아올라, 이내 곧 아랫배와 다리 사이를 미친 듯이 간질이는 개 같은 육신의 욕구.
그 어떤 욕구도, 그 어떤 욕망도.
아니, 아주 자그마한 소망 하나마저도 실비아는 이룰 수 없었다.
넓은 숲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음에도, 마치 온몸이 꽁꽁 묶여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해소가 가능했던 건 결국 자기 파멸의 욕구뿐이었다.
죽음도, 심각한 부상도 허락하지 않는 이 저주받은 몸 때문에 그것마저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쉴 새 없이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베어내는 것만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분출구였다.
피로할수록, 얼굴에 피가 튈수록,
마물들의 내장을 헤집다 그 심장에 손을 뻗어 뜯어낼 때마다,
실비아 내면의 악마들은 잠잠해졌다.
물론, 그들이 만족하고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방치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탈이었던 실비아가 찐득거리는 피로 뒤덮인 얼굴을 무표정하게 쓸어내릴 때마다, 마치 귀족들이 팔짱을 낀 채 검투사들을 내려다보듯, 그 끔찍한 감정들은 실비아를 비웃으며 잠시 입을 다물어준 것에 불과했다.
비참했다.
왜 마물을 잡는 것만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걸까.
마왕이 저주를 내려서 이런 꼴이 된 것인데, 차라리 더 이상 싸우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게 해 주면 더 좋았을 텐데,
차라리, 자신을 연약한 소녀로 만들어 마물들에 뜯기고 수없이 무력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면,
그럼, 이 비참한 투쟁을 그만둘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온갖 기괴한 생각이 실비아를 가득 채웠다.
자신이 용사이기 때문인 걸까.
용사라는 그 숙명적 이름이 자신을 끊임없이 투쟁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만하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지고 싶었다.
용사가 아니라, 애쉬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실비아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상대를 죽이고, 살아남으면 다음 주에 다시, 또 살아남으면 그 다음 주에 또다시.
그렇게 목숨을 건 자신의 사투를 저 높은 곳에서 바라보던 훈련 교관들의 비틀린 비웃음이 머릿속에 번져 나갔다.
귀족에서 내면으로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병사에서 용사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동료에서 마족으로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실비아는 경쟁과 투쟁의 삶에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애쉬와의 사랑이 그저 스쳐 지나간 한때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 행복은 그녀의 인생에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그녀를 해방해줄 유일한 구원은 오직 애쉬 뿐이었다.
애쉬의 사랑뿐이었다.
며칠 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끔찍한 시간 속을 느리게 유영하던 실비아는 목구멍에 가득 찬 가래를 툭 뱉어냈다.
뱉고 보니, 가래가 아니라 언제 입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있던 찐득거리는 마물의 피였다.
정작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주제에, 정작 그 핏덩이를 눈으로 보고 나니 몹시 찝찝헀다.
입 안이 텁텁하게 더럽혀졌다는 불쾌감은 물론이고, 목구멍이 지독한 냄새로 헐어버려 따끔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게 언제였더라.
일주일 전인가 한 달 전인가, 아니면 반년 전이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통도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 오두막이 불탈 때 같이 없어졌던가.
실비아는 잠시 마른기침을 뱉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호수가 있었지.”
그녀는 중얼거리며 언젠가 애쉬와 함께 갔었던 호수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애쉬.”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본능, 아니, 그건 새로운 종류의 저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실비아는 애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애…”
하지만, 실비아는 그에게 다가가지도, 더 이상 입을 열지도 못했다.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애쉬의 뒤로 따라 들어가는 낯선 여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처절한 경험과 끔찍한 악몽으로 도배된 그녀의 인생에서도 손꼽힐 만큼 괴로운 밤이었다.
여전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은 더 이상 갈증이 아닌 거센 질투와 분노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어떤 말로도, 그 어떤 글로도, 이 세상 존재하는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그녀의 머리를 갉아 먹었다.
창문이 정면에 달렸지 않아 안을 볼 수 없지만, 엉성하게 지어진 건물의 나무 틈 사이에서 옅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롯불인지, 아니면 누군가 저 안에서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건지, 나무 틈 사이의 불빛은 계속 깜빡거렸다.
실비아는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꽉 깨물었다.
가면을 쓴 건 저 여자에게 저주를 옮기지 않기 위해서였나.
마치 처음 애쉬를 만났을 때의 나처럼.
안에서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걸까.
당장이라도 저 오두막에 들이닥쳐 자신의 빈자리를 꿰찬 저 빌어먹을 여자를 도살하고, 그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애쉬에게 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오두막에 들이닥쳤다가, 정말 두 사람이 엉겨 붙어 있는 꼴이라도 보게 된다면,
애쉬가 자신이 아닌 그 여자를 보호하려 들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실비아는 결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무언가, 지금까지도 단 한 번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 다가올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저주에 고통받는 데다, 죽지도 못하는 주제에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는가 싶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언제까지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영원히 고통받게 할 가혹한 일이 생기고 말 것이란 확신이 어째선지 자꾸만 샘솟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애쉬를 죽일지도 몰라.”
실비아는 뜬 눈으로 오두막을 노려보며 밤을 지새우다, 모두가 잠든 것이 확실한 새벽에 조심히 호숫가로 내려가 목을 축였다.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터질 듯이 부푼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혹한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때,
여자는 오두막을 나섰다.
실비아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안심했다.
여자의 차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호흡도 걸음걸이도, 어제와 같다.
기쁨이나 부끄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나, 바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맨얼굴도 보일 수 없는 상대에게 섣불리 몸을 허락할 애쉬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는 종교적인 장식이 잔뜩 새겨진 성스러운 하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분명 여신교의 전사일 것이다.
종교인이 육욕에 쉽게 빠질 리도 없겠지.
“… 괜한 걱정을 했어.”
분명히, 우연히 낯선 사람이 이 숲에서 길을 잃어 애쉬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이리라.
안 그래도 지옥이나 다름없는 이 숲에 마기까지 가득 찼으니, 아무리 강인한 전사라도 하룻밤 쉴 곳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이곳을 찾아내 잠을 잔 것뿐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실비아는 애타는 마음으로 보낸 지난 밤 동안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애쉬를 믿지 못한 것, 그리고 불온한 상상력에 괴로워하면서도 당당히 들어가 그를 앗아오지 못한 것 역시 그랬다.
애쉬와 만난 이후로 그녀의 용기는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했다.
실비아는 애쉬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안은 책상 하나만 덜렁 놓여 있을 뿐, 어떤 가구도 보이지 않았다.
안쪽 방에는 애쉬가 잠들어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애쉬의 모습은 추위 때문에 온몸을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며 자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깝고, 또 애틋한지.
실비아는 조용히 다시 오두막을 나섰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니만큼 애쉬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죽, 구할 수 있어.”
마기가 들이찬 후, 숲속엔 동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동물들도 있었다.
조금 많이 돌아다녀야 할지 모르겠지만, 애쉬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실비아는 호수에서 걸어 나와 다시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매일 같이 헤매던 숲이 오늘따라 어쩐지 아름답게 보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온종일 사냥감을 찾아다녔지만 잡은 건 겨우 노루 두 마리 뿐이었다.
고기가 아닌 가죽을 원했기에, 최대한 많이 사냥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두 마리.
게다가 시간은 이미 깊은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기에는 짙은 마기가 배어 도저히 먹을 게 못 되었다.
실비아는 하는 수 없이 가죽만을 챙겨 호숫가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애쉬에게 어떻게 첫인사를 건네야 할까.
호숫가를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왜 사라졌는지, 왜 도망쳤는지, 죽은 게 아니었다면 왜 내게 돌아오지 않았는지.
마음속에 원망이 슬며시 피어나려다가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무슨 상관이야.
이제 다시 만났는데.
사랑하기 바쁜데 원망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그때는 자신이 잘못했었다.
그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되었다.
병들고 약해진 애쉬에게 눈을 뗀 내가 잘못이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다짐하며 호숫가에 도착했다.
“…”
어제 본 그 여자가, 또다시 애쉬의 오두막에 들어가고 있었다.
.
실비아가 앨리스를 죽일 수 밖에 없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