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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이 자리에서 단언한다.

     나는 암컷이 아니다.

     태어나기는 비록 무성으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삶을 수컷으로 살았다.

     수컷으로서의 삶이 편하니까.

     특히 마계에서는 강인한 수컷일수록 더 살아남기 쉬웠고, 상대적으로 덜 위협을 받는 게 수컷이었다.

     암컷에 빙의를 하고 나면 나를 노리려는 놈들이 너무 많더라.

     나 벨페고르가 아니라 내가 빙의한 몸을 노리는 것이었지만, 만약 놈에게 당한다면 그걸 겪는 건 나다.

     그래서 나는 상대적으로 위협을 받는 요소가 덜한 강한 수컷에 빙의하며 살아왔다.

     간혹.

     정말 간혹 암컷의 육체가 특정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면 사용하기도 했지만, 나는 삶의 대부분을 수컷으로 살았다.

     수컷으로 살았기에 500년 전, 대마왕 벨페고르로서 정말 많은 이들을 엿먹이고 절망에 빠뜨릴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튼.

     나는 암컷이 아니다.

     이 몸, 영혼의 형태가 암컷인 이유는 마녀 벨에 맞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나를 암컷인 양, 남자가 다가오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척을 하는 그런 ‘여자’인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

     나는 수컷이다.

     때때로 필요에 따라 암컷이 될지언정, 나는 분명히 수컷이다.

     그런데.

     [개소리하네. 지금 완전히 암컷이 되었는데.]

     벨제부브는 나를 향해 너무나도 험한 말을 내뱉었다.

     [그 몸은 뭐냐? 네가 암컷으로서 받아들이기 위한 수컷이냐? 중간계에서 번식하려고?]

     [이 미친.]

     더 이상의 음해는 참을 수 없다.

     내가?

     루키우스랑?

     말도 안 되는 소리.

     [기껏 주박에서 풀어줬더니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뭐라고?]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나를 적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세디아 놈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했지만, 벨제부브는 좀처럼 나를 믿지 못했다.

     [그럴 리가. 나를 소환해서 벌레의 몸에 처박아버린 새끼가 옛날 네 부하였는데? 그놈이 계속 너를 부르겠다며 아주 난리를 치던데?]

     [나도 당했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을 그대로 밝혔다.

     잠을 자다가 눈을 떠보니 소녀의 몸에 깃들었던 것.

     제파르가 나의 영혼을 불러내 소녀의 몸에 빙의시켰고, 나를 이용해서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 것.

     내가 싫다고 하자, 나조차 제어하여 나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 뻔했다는 것.

     [그러니까 네가 500년 전 부하한테 암컷 꼭두각시가 되어 마족양산기가 될 뻔했다는 거네?]

     [말을 해도 좀 적당히 못 하냐?]

     [지금 상당히 수위를 낮춰주고 있는 거다. 따지고 보면 네놈의 부하들이 지금 마왕을 사로잡아 병신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니.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래.]

     아무리 제파르 그 미친놈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해도, 제파르가 나의 부하였던 만큼 내가 책임을 지긴 해야 한다.

     애초에.

     [놈은 나를 노리고 있다. 반드시 붙잡아서 없애버릴 것이다.]

     책임을 지기 이전에, 내가 제파르 놈을 죽여버려야 한다.

     놈은 나를 노리고 있고, 나는 놈의 노리개가 될 생각은 없다.

     [그럼 네가 암컷으로 있는 이유는 그게 유리하기 때문이냐?]

     [유리?]

     [용사를 이용하는데 말이다.]

     [그래.]

     용사 루키우스를 이용함에 있어, 여자라는 몸은 너무나도 편리하다.

     [루키우스는 하렘을 이끄는 용사가 될 거다. 그리고 하렘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이때 여자만큼 좋은 성별이 없지.]

     자고로.

     [남자 하렘에 중매를 서는 건 여자가 하는 게 가장 쉽단 말이지.]

     어떻게 아냐고?

     통계다.

     [그러고 지금 이 모습은 500년 전에 내가 사로잡은 용사 중의 한 명을 카피한 거거든? 혹시나 내 정체를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500년 전에 활동했던 대마법사라고 말이야.]

     [과연. 네 변명은 알겠다.]

     [변명이 아니라-]

     [믿도록 하지.]

     사아아.

     [암컷이 용사를 이용해 제파르에게 복수하는 게 유리하다면, 나도 그에 따르도록 하지.]

     벨제부브의 모습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사아아.

     안개처럼 반짝이던 벨제부브의 모습이 점차 어떤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검보랏빛의 마나는 점차 나와 비슷한 소녀의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고, 소녀의 뒤로는 지옥에서 올라온 파수견과 같은 형상이 세 개 떠올랐다.

     “…믿겠다. 용사.”

     벨제부브는 연보라색으로 물든 눈동자로 나를 향해 웃었다.

     “나를 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었으니, 네게 나의 힘을 빌려주마. 나는 마계의 일곱 마왕 중 하나이자 폭식의 군주.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탐식의 마귀이자, 지옥의 수문장. 다른 이들은 나를 벨제부브라고 부르지.”

     사아아.

     벨제부브는 내게 손을 뻗었다.

     소녀의 작은 손에서 응축된 마기가 보석으로 흘러나왔고, 나는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동그란 형태의 마석을 손에 받았다.

     “나를 대신하여, 마왕을 이용하려는 악에게 복수해다오. 지금은….”

     사아아.

     “조금, 쉬고 싶구나….”

     벨제부브는 보라색 마석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마석이 되자, 그와 이어져 있던 모든 권속이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고오오오.

     아스칼론에서 흘러나온 금빛의 바람이 벌레들의 잔해를 하늘 높이 날려보냈다.

     나의 손에, 루키우스의 손에 올려진 건 벨제부브가 스스로의 영혼을 담은 마석-영혼석 뿐.

     “…….”

     벨제부브.

     소탕.

     * * *

     어둠 속.

     루키우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두 명의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지켜봤다.

     한 명은 익히 아는 적발의 여인.

     그리고 또 한 명은 그에 뒤지지 않는 검보랏빛 머리칼의 여인.

     둘은 언성을 높이는 듯 서로 대립했지만, 곧 검보랏빛 여인이 사라지면서 적발 여인에게 무언가를 남기더라.

     사아악.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루키우스의 눈앞에는 이전에 봤던 그 남자가 자신의 성검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용사여.

     그가 말했다.

     -너는 진실을 모른다. 나는 진실을 알지만, 세계를 위해 함구해야 한다.

     당신은 도대체?

     루키우스는 남자를 향해 물었지만,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언젠가 그녀가 네게 모든 것을 허락하는 날, 나는 진정한 모습으로 너와 다시 마주할 것이다.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루키우스는 선문답과 같은 답답함에 속이 타들어 갔지만, 상대는 그저 연신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넌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북부로 가라. 그곳에서 얼음 마녀를 만나라. 너와 나, 그리고 그녀에 관한 모든 진실은 그녀가 알고 있으니.

     얼음 마녀?

     북부?

     너무나도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루키우스는 뭔가를 직감했다.

     그녀란, 나의 스승을 말하는 것인가?

     -…….

     남자는 침묵했다.

     침묵이 대답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침묵하는 게 답이 되는 때도 있다.

     -이것 두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나는 너의 편이며, 동시에 그녀는 인류의 편이라는 것을.

     그게 무슨?

     

     -이 이상은 말할 수 없다. 언젠가 네가 스스로 나와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나도 제약 없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 테지.

     남자는.

     그저 쓰게 웃으며 하늘을 가리킬 뿐이었다.

     -천공의 섬에서 너를 기다리겠다. 나는….

     “루키우스?”

     “…….”

     루키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향해 가볍게 웃었다.

     “이기셨군요.”

     “그래. 이겼어.”

     붉은 머리의 마녀는 자신을 향해 검보랏빛 마석을 흔들었다.

     “…루키우스 덕분에 마왕도 봉인해보고. 정말…정말.”

     적발의 마녀는 힘겹게나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 루키우스.”

     “천만에요.”

     그래.

     답답하면 어떠랴.

     스승이 이렇게 웃고 있다면, 그거로 충분한 것을.

     그리고….

     “스승님께서 제 몸을 쓰는 동안 이상한 걸 봤습니다.”

     “이상한 거?”

     “예. 금발의 남자인데….”

     “아. 누군지 알겠다.”

     마녀는 손뼉을 치며 눈을 가로로 길게 찢었다.

     “이런 녀석이지?”

     “예. 어떻게…?”

     “그게 아스칼론이야. 성검 내부의 의식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

     “…….”

     역시 스승이다.

     루키우스는 너무나도 편안해졌다.

     

    * * *

     “젠장, 젠장…!!”

     벨제부브가 죽었다.

     아니, 빼앗겼다고 보는 게 옳다.

     “마녀 벨…! 이 망할 년! 역시 마왕님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다른 마왕급 마족들도 사역하는 마법도 익혔어! 이 개 같은 년!!”

     제파르는 원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끄으으. 벨제부브가 빼앗기면 나의 원대한 계획이….”

     [뭘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대는가.]

     “아, 폐하.”

     제파르는 수정구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예의를 표했다.

     “실례했습니다. 조금 예상치 못한 손실이 생겨서.”

     [손실?]

     “예. 마왕 중 하나가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흐음….]

     수정구 너머의 목소리는 다소 심드렁했다.

     [마왕이라고 해봐야 마계에서나 마왕이지, 이곳에서는 그냥 상급 마족 수준에 불과하지 않나.]

     “하지만….”

     [물론 대마왕은 예외시지. 자네, 설마 내가 대마왕과 다른 마왕을 동급으로 취급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파르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마왕을 빼앗겼다는 것부터 말해보게.]

     “벨제부브를 이용했고, 마녀 벨이 바람의 성검을 이용해 벨제부브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용사가 벨제부브를 마석에 봉인했고요.”

     [그걸 마녀가 사역했다?]

     “예. 그러합니다.”

     [음….]

     황제는 잠시 길게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야, 그 소녀가 벨이라는 마녀가 맞나? 체형이 영 아니던데.]

     “맞습니다! 바람의 성검을 각성시킬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오직 두 명뿐. 한 명은 그 가증스러운 마녀 벨이며….”

     [다른 한 명은 대마왕 벨 페고르지.]

     “예. 그렇습니다.”

     제파르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이를 갈았다.

     “대마왕께서 자신을 죽인 바람의 성검을 굳이 각성까지 시키면서 이용할 리는 없으니, 분명 그녀는 마녀 벨이 틀림없습니다. 아마 제 소환을 눈치채고 세계의 저편에서 봉인을 깨고 나와 활동하는 거겠죠. 으으, 그 건방진 년….”

     […뭐, 자네 생각이 그러하다면 알겠네. 솔직히 나도 그 대마왕이 소녀의 몸에 깃들어 용사파티를 주도하는 마녀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은 있을지 몰라도, 상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들의 행보를 파악한 뒤, 함정을 설치할 겁니다. 그리고….”

     제파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낀 여러 개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마왕을 투입하겠습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플러스 15일로 미뤘습니다

    내일은 휴재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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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ro’s Mentor is a (Demon) Witch

The Hero’s Mentor is a (Demon) Witch

Status: Ongoing Author:
I, who was once the Demon King, have become a terminally ill beautiful girl who can't do anything. To survive, I became the witch of the Hero's party. ...No, I don't like the 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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