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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내 품에 여전히 머리를 묻은 아셀라의 정수리가 훤히 보였다.

     

    아셀라의 모발은 반시계 방향으로 자라네.

     

    정중앙을 누르면 선풍기처럼 머리카락이 푸르르 회전하진 않을까 상상해 봤다.

     

    아, 방금 아셀라가 뭐라고 했지.

     

    “저희의 혼약 말씀이시군요.”

     

    “응.”

     

    “뭐, 명문가에서 동맹을 표시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니까요. 게오르크만 해도 첩실까지 혼약자가 셋은 있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둘은 파혼당했대. 게오르크가 사업을 추진할 수 없게 되니 쓸모없어졌나 봐.”

     

    “그렇군요. 황족의 첩실 혼약은 특히나 황실과의 혼약이라기보단 궁과의 계약이라는 느낌이죠.”

     

    “정치적인 혼약이라는 게 그렇게 가벼운 약속이었어?”

     

    “요즘 제국에서는 그런 느낌 아닐까 싶네요. 타국의 분위기야 다르겠습니다만.”

     

    아셀라는 그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나랑 공자도… 서로 누군지도 모르고 혼약자가 되었잖아.”

     

    “그랬죠.”

     

    “공자는 싫지 않았어?”

     

    “글쎄요.”

     

    내 입장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니 좋고 싫고 할 것도 없지 뭐.

     

    “황녀님은 싫으셨나요.”

     

    “나는…”

     

    아셀라가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곁눈질을 했다.

     

    “싫긴 했지만…”

     

    “보통은 그렇겠죠. 비즈니스 약혼이라는 단어부터 너무하잖아요. 자식이 가문의 거래 소재에 불과하다는 의미니까요.”

     

    “응. 나라면 자식에게 그런 건 절대 안 시킬 거야.”

     

    아셀라의 대답은 내게는 조금 의외였다.

     

    “자식이라니, 그런 생각도 하셔요?”

     

    “어? 아니, 깊게 생각해본 건 아니고.”

     

    아셀라가 당황하며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투를 되돌렸다.

     

    “그래서, 어떤데. 지금 우리 혼약 관계에 대해 비즈니스라고 소문이 퍼져있다잖아.”

     

    “확실히 그건 불쾌하군요.”

     

    내가 즉답하니 아셀라가 숨을 들이켰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얼굴도 살짝 상기된 느낌이다.

     

    어쨌든 나와 아셀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도는 건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소문은 흘러가면서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월광궁이 가십거리가 되면 신경 쓰기 귀찮고.

     

    카밀라가 평판 관리를 못 해놓은 덕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주치의로 인식되는 편이 좋다.

     

    적절한 때에 나도 우리 가문도 황실과 관련이 없어지도록 손을 씻을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건만.

     

    벌써 사교계에 그리 이야기가 돌았다면 조금 때가 늦어버리긴 했다.

     

    “…흐응. 공자도 그런 생각이구나.”

     

    “알아주시는군요.”

     

    “공자야 뭐, 단순하잖아.”

     

    아셀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교계에 확실하게 알릴 필요가 있겠어. 나랑 공자는 정치적 혼약자가 아니라고.”

     

    “오, 좋은 생각이시네요.”

     

    아셀라의 발상은 마음에 들었다.

     

    비즈니스 약혼은 나와 월광궁 양측 이미지에 모두 좋을 것이 없다.

     

    월광궁은 권력이 약해 고트베르크 후작가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고, 나는 주도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내가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해 노동 중인 아셀라의 신하라고 인식되는 쪽이 베스트다.

     

    “공자, 생일이 언제니? 이제 성인이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말일이었지요.”

     

    몇 시간 후면 한 해가 저물고 신년을 맞이한다.

     

    만 19세. 내가 성인이 되는 해다.

     

    제국에서 성인은 결혼이 가능한 나이라는 의미 정도밖에 없다.

     

    빠르면 직업도 열다섯부터는 갖는 편이고. 모험가에는 특히 10대도 많지.

     

    대단한 인생의 분기점은 아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3월이에요. 황녀님은 바로 좀 전이셨지요.”

     

    “그래. 내년엔 좀 더 괜찮은 선물로 사와. 성인식 계획은 있어?”

     

    “내의원에서 치유사들과 밥이나 먹지 않을까 했지요.”

     

    “음….”

     

    아셀라가 속으로 즐거운 계획을 세운 듯 미소지었다.

     

    “월광궁에서 파티를 열어야겠어.”

     

    “파티요? 좀 부담되는데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나요.”

     

    “고맙지?”

     

    “자애로운 황녀님의 마음씨에 보잘 것 없는 인사를 올립니다.”

     

    어차피 생각한 건 행동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셀라니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인사를 들은 아셀라는 키득거리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잘래. 지쳤어.”

     

    “아직 2연대가 전투 중입니다만.”

     

    “헤이케가 알아서 하겠지. 나중에 보고만 들을래.”

     

    “저 배고파요.”

     

    “난 식욕 없어. 원정길 동안 계속 식사가 맛없었거든.”

     

    “에이, 그래도 잘 챙겨 드셔야죠.”

     

    “그럼 탕후루 만들어줄래?”

     

    버블티에 이어 이제는 탕후루도 찾는 황녀님이다.

     

    지난번에 후작가에서 제철 과일인 딸기로 해드렸더니 역시나 마음에 들어하셨다.

     

    만들고 싶어도 여기는 재료가 없다.

     

    “안 됩니다.”

     

    “흥, 그럼 잠이나 자.”

     

    아셀라는 기어이 나를 침대로 끌고 가 풀썩 누웠다.

     

    “원.”

     

    어차피 고집을 꺾지는 못할 거 나도 그녀의 옆에 눕기로 했다.

     

    아셀라와 좁은 예비 침대에 기어들어가 얼굴을 마주했다.

     

    “대신 당 보충이라도 하죠. 여기요.”

     

    나는 품에서 사탕을 꺼냈다.

     

    “응…”

     

    아셀라가 대답 대신 혀를 빼꼼 내밀었다.

     

    하나하나 손 가게 하시네.

     

    포장지를 벗기니 벌꿀의 달콤한 향이 코를 자극해왔다.

     

    아셀라의 혀에 붓질하듯 스윽스윽 발라주니 벌꿀이 녹아내리며 톡 튀어나온 혀끝이 조금씩 주황색으로 물들어갔다.

     

    아셀라는 달달한 맛과 따뜻한 이불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르르 눈꺼풀을 아래로 감아갔다.

     

    ‘슬슬 나도 체력회복 걸어야 할 시간인데.’

     

    사탕을 하나 더 꺼내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이런, 실책이었다. 마침 사탕이 다 떨어졌는데 마지막 남은걸 아셀라에게 줘버린 참이었다.

     

    ‘가져오려면 1층까지 내려갔다 와야 하네.’

     

    이미 이불 속에 들어오기도 했고, 온몸이 귀찮음을 내질렀다.

     

    나는 아셀라에게 발라주던 사탕을 가져와 반대쪽을 핥았다.

     

    “어?”

     

    내 행동을 본 아셀라가 깜짝 놀라며 입에 고였던 침을 홀짝 삼켰다.

     

    “공자, 그걸 왜 핥아!”

     

    “저도 먹고 싶었는데 마침 이게 마지막이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먹던 거잖아!”

     

    “반대쪽만 핥아먹고 있어요. 황녀님 침은 안 핥았습니다.”

     

    위생관념은 철저한 편이라서.

     

    아셀라는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하긴 먹던 걸 뺏어가는 건 좀 나빴지.

     

    “마저 핥으실래요?”

     

    내가 다시 사탕을 내미니 아셀라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좀 더러웠지. 이건 내가 잘못했다.

     

    아셀라는 내 손을 밀어 사탕을 통째로 내 입에 집어넣게 하고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품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가렸다.

     

     

     

    ***

     

     

     

    이른 저녁에 잠들어 버렸기에 한참 자고 일어났어도 새벽이었다.

     

    상태창에 알림이 있었다.

     

     

    [No. 032 : 오염된 야만족 17% → 0%]

    [No. 067 : 무모한 돌격 11% → 0%]

    [삭제됨]

     

     

    야만족 부족 중 가장 위험했던 바위족은 완벽하게 토벌했다.

     

    그들이 일으키는 배드엔딩은 삭제됐다.

     

    ‘67번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생각 외의 이득인걸.’

     

    무모한 돌격 배드엔딩은 초반부에 아셀라가 용사파티를 포함한 기사단을 준비되기도 전에 진군시키면 발생한다.

     

    튜토리얼도 안 끝났는데 냅다 첫 중간보스와 붙게 되는 꼴이랄까.

     

    물론 아셀라는 패배를 예상하고 일부러 싸우게 시켰겠지만.

     

    이번 전투에서 아셀라가 직접 기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본 효과 덕일까.

     

    전장의 무서움을 체감했을지도.

     

    어쨌든 내게는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 아셀라는 밤새 내 품에서 머리가 산발이 되어서는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비고 있었다.

     

    시녀장 누님만 한 실력은 못 되지만 간단하게 머리를 빗겨주고는 함께 잠깐 외출하기로 했다.

     

    날이 추우니 코트를 몇 겹으로 입은 채 성채 옥상으로 올라갔다.

     

    “추워. 공자, 아직 새카만데 꼭 밖을 나와야 했어?”

     

    “그러니까 나와 봐야죠. 자요.”

     

    아셀라에게 손을 내밀어 망루 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에스코트해주었다.

     

    아셀라는 묵묵히 내 손을 잡고는 옆에 나란히 서서 경치를 내려보았다.

     

    “월광궁의 깃발이 모든 성채에서 휘날리고 있습니다. 토벌전은 성공이에요.”

     

    “…그렇네.”

     

    아셀라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전투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승리에 환호하던 기사들, 구출에 안도하던 피난민들.

     

    그 모든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당연한 결과지. 내가 누구인데.”

     

    “물론 뷔르템펠트 황실의 꽃, 불세출의 천재 아셀라 황녀님이시지요.”

     

    “그럼.”

     

    아셀라가 키득대며 나를 돌아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그녀의 풍성한 금발을 흐트러트렸다.

     

    어둠에 젖어있던 머리칼이 반짝이며 비로소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아, 떠오르네요.”

     

    내가 동쪽의 산맥 사이를 가리켰다.

     

    까맣던 하늘이 점점 푸른 빛을 되찾아가며, 새하얀 태양이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흐응.”

     

    “새해 일출입니다. 제 고향에서는 이걸 보면 한 해 내내 기운이 좋다는 속설이 있었거든요.”

     

    “북부에는 그런 민담이 있구나.”

     

    “예. 덧붙여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보 같아. 갖고 싶은 건 직접 손에 넣어야지 누가 이뤄준다는 거야.”

     

    아셀라는 나를 비웃었지만 금방 햇빛에 눈길을 빼앗기고는 조용해졌다.

     

    “다 떠오르기 전까지 비셔야 해요. 보세요, 벌써 반이나 올라왔죠? 생각보다 일출이 엄청 짧거든요. 정신 차리면 순식간에…”

     

    “아이참. 조용히 좀 해봐.”

     

    아셀라가 짜증을 냈기에 입을 다물었다.

     

     

    해가 다 떠오르니 아셀라는 별 감흥 없다는 듯 덤덤하게 몸을 틀었다.

     

    층계참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어봤다.

     

    “어떤 소원 비셨어요?”

     

    “안 빌었거든. 그러는 공자야말로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아이,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이루어진댔어요.”

     

    모든 배드엔딩을 지우고 굿엔딩에 도달할 수 있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어도 그렇게 속으로 읊조려봤다.

     

    내 말을 들은 아셀라는 뾰루퉁하게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럼 나도 비밀이야.”

     

     

     

    ***

     

     

     

    황실로 돌아온 아셀라를 기다리는 건 다시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다.

     

    업무, 수학, 사교, 마법.

     

    대단한 전쟁영웅 급의 업적을 세운 것도 아니니 드라마틱한 환대를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평소와 같은 황실의 온도를 느끼며, 원정이 어떤 것인지도 확실하게 체감했다.

     

    자신도 기사들도 생사가 오가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심지어 라스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 전장이 있기에 황실의 평화가 유지된다.

     

    “헤이케는 이런 감각에도 익숙할까.”

     

    지식만으로는 경험을 이길 수 없다고 한 가지 배웠다.

     

    앞으로 전장은 조금 꺼려질 것만 같은 아셀라였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

     

    피난민을 떡하고 구출해오고 야만족도 섬멸하니 헤이케 역시 군말하지 않고 모든 공을 월광궁에게 양도했다.

     

    황제에게 올라가는 공식 기록에는 아셀라에게 유리한 문장만 적히게 되었다.

     

    블뤼허 백작도 인증할 테니 황제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깔끔한 승리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번 토벌전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라스의 공이 컸다.

     

    헤이케와의 교섭에서 그의 치료법을 재료로 사용했고, 전략을 제시한 것도 그였으며, 타냐가 족장을 쓰러트릴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신하의 공은 물론 주군의 공이다.

     

    전부 아셀라에게 좋은 일뿐이긴 하지만.

     

    “…남들이 알아보는 건 싫은데.”

     

    다른 데서 칭찬받아서 득의양양해진 라스의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신하에게 칭찬을 내릴 사람은 주군 한 명이면 충분하잖아.

     

    아셀라는 라스의 활약이 늘어갈수록 그를 독점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도 생겨갔다.

     

    다만 아셀라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아직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후후, 그래도 내겐 이게 있으니까.”

     

    아셀라는 자신의 방, 마나 잠금이 걸린 서랍을 열어보았다.

     

    자신이 아니면 열 수 없는 서랍이다. 중요한 서류는 모두 여기에 보관한다.

     

    그 구석에 가지런히 놓아둔 한 통의 봉인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라스가 가장 원하는 건 나밖에 못 들어줘.”

     

    그렇게 생각하면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아스까지 사용해달라고 자신에게 사정사정했던 라스다.

     

    실제로 그런 적은 없었지만 아셀라의 기억은 그렇게 왜곡되어 있었다.

     

    자신에게는 별 것 아니지만 라스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이걸 이루기 위해서라도 라스는 자신에게 정성을 다해 충성하겠지.

     

    “뭐가 적혀있을까.”

     

    봉투를 열어보고 싶지만 굳건히 잠겨있다.

     

    아셀라의 기아스가 봉했으니 그녀는 물론, 그녀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마법사는 결코 열어볼 수 없다.

     

    라스가 원할 때만 열리는 구조다.

     

    “음… 그래도 이번에 꽤 공을 세우긴 했으니까.”

     

    별 것 아닌 소원 하나쯤은 이뤄줘도 괜찮지 않을까.

     

    대신 대가를 그만큼 더 뜯어내면 되니까.

     

    그것도 재미있겠어.

     

    아셀라는 못된 음모를 세우며 혼자서 쿡쿡 웃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뭷뷃님 후원 : D : D ! !
    하람_219님 후원과 팬아트 감사해요! 재밌게 봐주시니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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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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