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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레온 씨….”

       “네?”

       “솔직히 이제 결혼할 때도 됐잖아요. 안 그래요?”

       “가, 갑자기 무슨….”

       

       실비아의 손가락이 내 턱을 살포시 잡았다. 

       

       꿀꺽.

       

       “동거도 오래 하면 사실혼이라고 했어요. 저희도 같이 산 지 좀 됐잖아요? 후후.”

       “아직 몇 주밖에 안 됐거든요?”

       “어쨌든요.”

       

       실비아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오늘따라 괜히 실비아의 입술에 윤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자, 잠깐만요. 아르도 옆에 있는데 지금….”

       “어디요? 아르는 지금 옆에 없어요.”

       “어어…?”

       

       황급히 주위를 둘러 보니 실비아의 말대로 아르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르가 내 곁에 없을 리가….’

       

       혹시 또 숨기 놀이를 하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나와서 실비아 씨를 말려 주면….

       

       ‘근데 생각해 보면 아르도 나한테 실비아 씨랑 결혼 하라고 그랬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실비아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지근거리에 와 있었다. 

       

       “레온 씨….”

       

       실비아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움직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날이 언젠가 오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실비아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나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핥짝.

       

       “…?”

       

       내 입술을 핥는 촉촉한 감촉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핥짝.

       

       “뀨우….”

       

       눈을 떠 보니 아직 꿈나라에 가 있는 듯한 아르가 내 얼굴을 거의 껴안듯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결에 나에게 꼬옥 붙어서 핥은 게 하필이면 내 입술이었던 모양.

       

       ‘…꿈이었구나.’

       

       그래, 아르가 내 주변에 없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하더라. 

       

       ‘실비아 씨 입에서 사실혼이라는 현대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꿈 안이라 그런지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전혀 캐치하지 못했다. 

       

       “뀨웅….”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아르를 쓰다듬어 주자, 아르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었다.

       

       ‘잘 자네. 귀여워라.’

       

       아르에게서 잠시 얼굴을 떼고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고 나니, 그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실비아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저 외모는 사기 아니냐. 아직도 가끔 적응이 안 돼.’

       

       아무리 예쁜 얼굴도 매일 보면 무덤덤해진다고 하던가.

       하지만 적어도 실비아에게는 그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쿵쿵.

       

       방금 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심박 수가 올라갔다. 

       

       꿈에서 보았던 윤기 흐르는 입술이 이제는 진짜로 눈앞에 있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리자, 레온.’

       

       나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리고 일부러 실비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한 번만 더 볼까.’

       

       그렇게 생각한 내가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으앗, 깜짝이야.”

       “쉬잇. 아르 깨요.”

       

       나는 실비아와 눈을 마주치고 나도 모르게 작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후후. 제 자는 얼굴은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신 거예요? 저의 부단한 노력 끝에 드디어 넘어오신 건가요?”

       “…그, 그런 게 아니라. 꿈을 꿔 가지고.”

       “무슨 꿈인데요?”

       “…….”

       

       아.

       꿈 얘기 괜히 했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굴이 갑자기 엄청 빨개졌는데요?”

       “…오늘 아침은 제가 준비할게요. 슬슬 용병 길드 가서 시프 놈들 심문해야죠.”

       “무슨 꿈이었을까? 너무 궁금한데요.”

       “오늘 아침 메뉴는 순두부찌개로 할게요.”

       

       나는 사력을 다해 화제를 돌리며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이상한 꿈에, 일어나자마자 실비아와의 대화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오느라 정신이 벌써 혼미해지는 것 같았지만, 냉장고를 열고 안에 있는 재료들을 보자 내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후후후. 먹음직스럽게 익었구만.’

       

       냉장고 한쪽, 커다란 용기를 꺼내 뚜껑을 열고 확인해 본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 안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김치였다. 

       

       ‘드디어 그립고 그립던 김치를 먹을 수 있어.’

       

       당연한 이야기지만, 페룬 대륙에는 김치라는 위대한 발효 식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방문조차 안 해 봤을 정도의 대륙 끄트머리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레키온 사가」를 하면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김치는 없지만, 배추는 있지. 고춧가루도 있고.’

       

       내가 설마 페룬 대륙에까지 와서 김장을 할 줄은 몰랐지만, 여기서 기름진 음식 위주로 먹다 보니 김치가 그리워 한국인으로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나는 자취를 하던 시절에 김치 사 먹는 돈이 아까워 재료를 직접 사다가 김장을 해 먹곤 했기에 만드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액젓이나 매실액 같은 것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특히 매실액은 기대도 안 했는데 있어서 얼른 샀고.’

       

       그래도 나름 식문화가 발달한 편이라 소스류를 구하는 데에 제약은 크지 않았다. 

       

       “얼마나 잘 익었는지 직접 확인해 볼까.”

       

       젓가락으로 김치를 한 조각 집어 먹자, 입 안에 그리운 고향의 맛이 퍼져 나갔다.

       짭짤하면서도 매콤하고, 그러면서도 약간의 달달한 맛이 아삭한 식감과 함께하는 이 맛.

        

       “크으, 이거지.”

       

       하지만 아직 본방은 시작도 안 했다. 

       

       나는 김치를 적당히 꺼내 덜어 놓고, 순두부찌개, 정확히는 순두부돼지고기김치찌개를 할 준비를 했다. 

       

       도마 위에 기름이 적당히 있는 돼지고기를 놓고 한 숟가락에 두세 개씩 들어올 정도의 크기로 잘게 잘라 준다. 

       

       “좀 더 썰어 놓을까.”

       

       아르가 고기를 좋아하니, 돼지고기는 넉넉하게 하는 편이 좋겠지. 

       

       타다다닥.

       

       나는 돼지고기를 기존에 썰어 놓은 만큼 한 번 더 썰어, 미리 준비해 둔 커다란 뚝배기에 듬뿍 올렸다.

       

       “파이어.”

       

       불을 켜고 뚝배기가 데워지는 동안 김치 역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두었다. 

       

       곧 지글지글 소리가 나며 돼지고기의 기름이 배어 나왔고, 거기에 방금 자른 김치를 투하했다.

       

       자그르르.

       

       ‘이렇게 돼지고기 기름만으로 고기랑 김치를 같이 볶아 주고….’

       

       이럴 땐 원래 푹 익은 김치가 어울리는 법이지만, 이 정도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고기가 익으며 김치의 매콤한 양념이 고기에 스며들었을 때쯤, 물을 붓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었다. 

       

       이럴 때 육수가 있으면 더 좋긴 하지만, 물만 넣어도 충분히 맛있는 찌개가 된다. 

       

       ‘다진 마늘은 또 빼 놓을 수가 없지.’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그리고 소량의 액젓까지 넣으면 완벽하다. 

       

       보글보글.

       

       ‘크으으. 내가 끓였지만 비주얼부터 기가 막히네.’

       

       이제 화룡점정으로 예쁘게 자른 두부를 퐁당퐁당 넣어 주면.

       

       “순두부돼지고기김치찌개 완성!”

       

       원래는 여기에 콩비지도 들어가야 하긴 하지만, 아르가 콩을 싫어해서 일부러 넣지 않았다. 

       

       자취할 때 여러 레시피를 시도해 봤는데, 딱히 없어도 맛있었기 때문에 콩비지는 넣지 않기로 했다. 

       

       ‘편식하는 건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걸 굳이 막 넣을 필요도 없지.’

       

       어차피 식성은 크면서 바뀐다. 

       

       나도 어렸을 때 양파, 당근, 콩밥 같은 걸 을 싫어했지만 지금은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으니까. 

       

       ‘드래곤이 잡식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아르가 먹는 것들을 보면 잡식이 맞긴 한 것 같으니.’

       

       일단 뭐든 먹는 대로 매우 잘 소화시키는 걸 보면, 아르에게 중요한 건 맛있느냐 맛이 없느냐 하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혹시 영양 불균형이 올까 봐 이것저것 먹이고는 있지만 말이다. 

       

       “와아…. 냄새 죽여요. 레온 씨.”

       

       순두부찌개의 냄새를 맡고 참지 못한 실비아가 아직 잠이 덜 깬 아르를 안고 침실에서 나왔다. 

       

       킁킁.

       

       “뀨우…?”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고기 냄새를 맡은 아르가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아르가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보통 이 정도 냄새 맡으면 눈을 번쩍 뜨던데.”

       “그러게요. 하긴, 항상 자던 시간에 깨어 있느라 피곤하긴 했을 거예요.”

       

       게다가 아르는 어제 나랑 떨어져 있기 싫다고, 그리고 땅굴 속 지나가는 거 재밌을 거 같다며 나랑 같이 움직였고, 시프들과 싸울 때에도 프로스트 같은 연산이 복잡한 마법을 연속으로 썼다. 

       

       잘 못 일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르는 또 한창 많이 잘 때기도 하고 말이다. 

       

       “아르야, 졸리면 좀 더 들어가서 잘래?”

       “뀨우.”

       

       하지만 아르는 이미 맛있는 냄새를 맡고 난 뒤였기에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뀨우움!”

       

       다시 한번 한껏 팔다리를 쭈우욱 펴 기지개를 켠 아르는 실비아의 품에서 폴짝 뛰어 나에게 안겼다. 

       

       “아유, 그래. 일어났으면 아침 든든하게 먹어야지.”

       “쀼우!”

       

       아르의 엉덩이를 토닥여 준 나는 아르를 식탁 한쪽에 앉힌 뒤, 아직 보글보글 푹 끓고 있는 찌개의 뚝배기를 그대로 들어 식탁 한가운데로 옮겼다. 

       

       “우와아….”

       “쀼우…!”

       

       처음 보는 요리 앞에 앉은 실비아와 아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최대한 덜 맵게 했으니까 맛있게 먹어, 아르야.”

       “쀼우우!”

       

       아르의 그릇에 국자로 고기가 많은 부분을 푹 퍼서 주자, 아르의 꼬리가 마구 요동쳤다. 

       

       “쀼웃…!”

       

       아르용 작은 숟가락으로 고기와 함께 국물을 퍼서 입에 넣은 아르의 입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와, 레온 씨. 이런 요리는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저도 나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용병 생활을 했지만 이런 건 처음 먹어 보는데….”

       “하하. 고향에서 어떤 분이 알려 준 레시피인데 이래저래 잘 써먹고 있네요.”

       

       매콤짭짤한 국물을 한껏 머금은 돼지고기와 김치를 밥 위에 얹어 입에 넣은 실비아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쀼우!”

       “그래, 더 퍼줄까? 많이 먹어, 아르.”

       

       다행히 아르 입에도 맞는 듯, 고기를 퍼 먹던 아르는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밥을 국물에 말아서 먹고 있었다. 

       

       아르의 접시에 고기를 한 번 더 넉넉하게 퍼 준 뒤, 나도 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고. 

       

       “아아, 잘 먹었다!”

       “너무 잘 먹었어요.”

       “쀼우움.”

       

       어느새 뚝배기는 고기 한 점, 국물 한 국자 없이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아르는 만족스러운 듯 일어나 여느 때처럼 놀기 위해 튜브 공을 꺼냈다. 

       

       ‘푸흣. 배가 뚠뚠한 게 어느 쪽이 공인지 모르겠네.’

       

       자기 배처럼 동글한 공을 안고 있는 아르를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만 놀아 주다가 갈까.’

       

       어차피 이삼십 분 정도 길드에 늦게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쯤이면 알아서 몇몇 놈들 대상으로는 심문을 시작했을 것이다. 

       

       “아르야, 패스!”

       “쀼웃!”

       “자, 이번엔 실비아 씨한테 갑니다!”

       “어어, 저요?”

       

       그렇게 아르와 놀아 주기 시작한 지 십 분 정도 지났을까. 

       

       똑똑똑.

       

       “레온 님! 계십니까?”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가 어디에 묵는지 알고 있는 용병 길드원 한 명이 찾아온 것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용병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게, 심문 중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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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icked Up a Hatch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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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츨링을 주웠다
Status: Ongoing Author:
But this guy is just too c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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