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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엄청나게 찝찝해졌다.

        

       사실 나는 의심은 하긴 했다. 웬만큼 무섭게 굴지 않는 이상, 돈 많은 집 자식들이 그렇게 납작 엎드릴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실종되게 만든다거나, 건물에 불을 지른다거나 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 음.

        

       그래, 내가 살던 현실에서도 픽션에서 일어나는 일 뺨을 후려치는 정신 나간 사태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게다가 돈 많은 사람들이 돈 없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이런 식의 작품의 클리셰이기도 하지 않은가.

        

       게다가 예사라는 원작에선 진심으로 유하늘을 어떻게든 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 더 찝찝해졌다.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친구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만, 내가 아직 그걸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그게 아직도 ‘소문’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로 최나경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증거가 있었다면 나는 바로 친구들과 거리를 벌렸을 것이다. 일단 나 때문에 내 친구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니까.

        

       만약 폭력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나쁜 일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만 말하면 아는 집안의 딸인 이수아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하늘이와 소희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소희는 동생 소리도 있었고.

        

       어떻게든 좋지 않은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가족째로 이 저택에 들어와 살도록 해버릴까.

        

       하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들이 그것을 바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멋대로 구속하려고 해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겠지.

        

       게다가 그런 방법은 최나경이 하는 짓과 다를 것도 없고.

        

       …….

        

       일단은 예사라가 어린 시절에 대화했던 그 남자애를 찾는 것이 우선일까.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과정을 찾아 올라가는 것으로 최나경이 했던 일들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사라야.”

        

       한참 동안 말없이 걷고 있는데, 하늘이가 옆에서 내 팔을 툭 쳤다.

        

       “으흫.”

        

       불시에 기습당해서 나도 모르게 그런 해괴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데, 이건 진짜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남자였을 때는 이런 소리는 낸 적 없었는데. 화들짝 놀란 적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괴상한 소리를 내던 것도 아니었다.

        

       혹시 이것도 예사라의 몸에 각인된 본능 같은 것일까?

        

       원작에서는 이렇게까지 허당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원작의 시점이, 철저하게 예사라에게 괴롭힘당하는 유하늘의 시점이라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개발자로서도 예사라가 긍정적으로 보일만 한 부분을 굳이 만들어 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아니면, 이게 전부 나중에 예사라 루트를 위해 만들어 둔 설정이거나.

        

       그래, 분명히 이 게임에는 예사라 루트가 있었다. 뒷배경에 대해서 전혀 나오지 않았던 윤다호 루트, 신소희 루트만 보았기에 예사라가 이런 처지의 캐릭터라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아마 플레이어가 어떻게든 예사라 루트로 진입하게 되면 그렇게 ‘악역’이었던 예사라를 동정할만한 스토리가 필요했으니까.

        

       예사라가 악행을 했던 부분은 정말로 자포자기한 예사라의 발악이었거나, 아니면 오해였거나. 그 둘이 전부 섞였거나. 그렇게 가정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면 윤다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나쁜 놈이 되어버리는 거 아닌가?

        

       어떤 이유로 예사라를 싫어한다는 것은 알겠고, 예사라와의 약혼이 본인이 원치 않던 거라는 것도 알겠다만, 만약 윤다호가 유하늘과 이어지게 된다면 그건 ‘그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예사라를 떨쳐냈다는 소리다.

        

       게다가 나는 이미 윤다호 루트를 보았다. 물론 전부 본 것은 아니었지만, 스트리머가 플레이하는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보긴 봤었다.

        

       윤다호는 예사라의 뒷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예사라와 파혼하고, 유하늘과 이어지게 된다.

        

       ……그게 정말로, 유하늘을 좋아해서 이어지게 된 걸까?

        

       어쩌면, 그저 자신에게서 예사라를 떼어내기 위해 유하늘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지난번에 나를 보고 윤다호가 지었던 표정이 생각났다. 평소처럼 혐오하는 것을 보는 표정이 아닌, 어딘가 시원하다는 표정. 나에게 잘해보라는 듯 지어 보이던 표정.

        

       “……사라야.”

        

       “아, 응.”

        

       한 번 반응하고 나서도 내가 계속 생각에 빠져있자, 하늘이는 다시 한번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제야 제대로 대답했다.

        

       “오늘 들었던 이야기, 너무 신경 쓰지는 마.”

        

       하늘이는 나의 얼굴을 걱정스럽다는 듯 들여다보며 말했다.

        

       “…….”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알고 있기에 내가 겪을 파멸을 피하겠답시고 히로인들을 끌어들였다. 사실 이 세 명은 내가 일부러 접근하거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으면 그저 이야기의 바깥에 있었을 인물들이었다. 유하늘도 내가 가만히 있었다면 그냥 알아서 연애하고 해피엔딩을 맞았겠지.

        

       “……그래.”

        

       일단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걱정할 것 같아서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는가.

        

       내가 끌어들였으니, 보호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결국, 그 생각 때문에 나는 그날 공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하긴, 집중한다고 뭐가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

        

       마음 같아서는 사라의 집에서 자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 자고 간다면 다음에 또, 또, 그런 생각이 계속 들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집에서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자신을 보고 가족들이 계속 걱정하던 참이다.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것으로도 걱정을 할 텐데, 자꾸 밖에서 자고 들어가는 것은 너무 나갔다.

        

       ……그래서, 유하늘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 너무 분했다.

        

       소희도, 수아도, 당당하게 집을 나와서 사라네서 살고 있는데,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했다.

        

       하루 정도는 자고 갈 거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는 건…… 뭔가 조금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유하늘은 학교에서 말하는 것을 열심히 배우고 꼭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잘못된 것은 바로 고쳐야 하고,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자신도 잘못된 짓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화영 고등학교에 가서,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로 잘못된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게 당연하고, 그렇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규칙을 어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규칙을 어겨야 한다.

        

       한 대 얻어맞지 않는 이상, 그런 인간들은 스스로 어째서 그런 일을 그만 두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유하늘은 그걸 화영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지 고작 한 달도 걸리지 않고서 깨달았다.

        

       그걸 깨닫게 해준 인간들이 딱히 고맙지는 않았다. 만약 그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유하늘은 진작에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을 테니까.

        

       ……그래, 좋아하는 사람.

        

       지금까지는 친구에 대한 독점욕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질투심이고, 잠깐 생기고 마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라 옆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유하늘은 조바심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저 아이들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떨어지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수업받는 내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맴돌았다.

        

       ……만약, 사라가 어떤 사람과 평생 함께하겠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면, 유하늘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래, 사실 유하늘은 사라에게 뭐라고 할 처지가 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라만큼이나 자신도 집중하지 못했으니까.

        

       아직은 아니다.

        

       아직, 나는 그렇게까지 달려 나갈 용기도, 조건도 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유하늘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

        

       세 친구가 자신을 배웅한 뒤 돌아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유하늘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슬슬 날씨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는지, 별로 춥지는 않았다.

        

       춥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깥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유하늘이 들어간 곳은 어느 한구석에 있는 카페였다. 이미 몇 번이고 와 본 곳이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고급 원두를 쓰고, 티라미수가 맛있는 카페.

        

       커피 한 잔을 주문해서, 한산한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한참 기다리자, 겨우 기다리던 사람이 카페로 들어왔다.

        

       언젠가 보았던,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양혜인이었다. 아마 저 코트 아래엔 메이드 복이 있으리라.

        

       양혜인은 급해 보이지 않게, 카페 안에 들어와 주문한 뒤, 자연스럽게 유하늘이 앉아있는 구석 자리로 다가왔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 보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 펼쳐 유하늘 앞에 내려놓았다.

        

       [돌아가고 나서, 지난번에 본 그 카페에서.]

        

       노트 한구석을 찢어 적은 그 쪽지는 유하늘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양혜인에게, 유하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혜인은 기품있는 몸동작으로 비어있는 앞자리에 앉았다.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따로 부르신 건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것 때문에요.”

        

       유하늘은, 미리 챙겨놓은 사라의 노트를 꺼내 들었다. 직접 읽어보고 고칠 곳을 알려주겠다는 핑계로 가지고 나온, 앞 몇 장 정도밖에 쓰지 않은 노트였다.

        

       “…….”

        

       유하늘에게 노트를 받아든 양혜인은, 노트를 팔랑팔랑 넘기면서 몇 페이지 정도 읽었다.

        

       “이 노트는—”

        

       “사라가 적은 노트예요.”

        

       양혜인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유하늘이 말했다.

        

       “오늘 모여서 공부했거든요. 그게, 사라가 적은 내용이에요.”

        

       “…….”

        

       양혜인은 다시 한번 노트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평소에 표정이 거의 하나로 고정되어있는 그녀였기에, 그 변화는 남들보다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시겠나요?”

        

       “…….”

        

       양혜인은 입을 한 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넘기면서 앞부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노트의 앞부분은 몇 분씩이나 넘겨보기에는 아직 너무 조금밖에 쓰여있지 않았다.

        

       “이쯤 되면 아시겠죠.”

        

       유하늘이 말했다.

        

       “만약 그게 사라의 필체라면.”

        

       양혜인이 고개를 든다. 아직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당신이 보여준 그 유서는, 누가 쓴 거죠?”

        

       ……아직 유하늘은 남들만큼 달려 나갈 조건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남들이 가지 않는 쪽으로 달려보면 어떨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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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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