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0

        

         흐름이 좀 이상하다. …많이 이상하다.

         그리고 그 흐름은 뒤틀린 전제 조건,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 파이브 아이즈를 추격해왔다.’ 라는 끈질긴 억측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귀찮아 죽겠다. 제로가 음료수 뽑아오면 항생제를 빼고 한 알씩 먹고 푹 자야지.

         

         어허, 억측이라 매도하기엔 너무 정황 증거가 많고 선명하지 않냐고?

         

         ……내가 아니라는데 또 억측하네? 화나게시리.

         

         “으휴.”

         

         이건 한숨이 아니라 한탄이다. 처량한 내 신세에 대한 가식 없는 평가나 마찬가지인 한탄.

         꼬았던 다리도 풀어버리고, 잠깐 사이 급격하게 피로가 쌓인 눈을 손등으로 슥슥 비볐다.

         

         물론 그런다고 진지한 표정의 아시프 씨나 왠지 초롱초롱한 로잘린이 마술처럼 시야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원작 무대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렘이나, 일방통행이긴 해도 지인 겸 예비 동료들의 새로운 면모를 본다는 즐거움이 슬슬 피곤함과 귀찮음에 추월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분위기에서 저들을 내리게 만들면 숫제 추방령이고.

         반대로 내가 내리는 건… 여기까지 왔으니 기각. 무슨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여러 번 말했잖아요. 난 거창한 거 없이 돈이나 쫓는 일개 소시민이라고.”

         

         “그럼 우리의 도시 이탈을 막으라는 의뢰라도 있었나?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면 그냥 로잘린의 노트북에라도 몇 마디 적어 두면 됐을 텐데.”

         

         거 의뢰 부분은 맞았는데, 저는 댁들을 이렇게 자주 만날 예정이 없었다니까요?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는 그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거늘. 그보다도 뜬금없이 호명된 로잘린의 참전이 더 빨랐다.

         

         “잠깐, 리더?! 제가 그 정도로 허술하게 밀리진 않아요!”

         

         “……허술하다고는 안 했다. 그저 내 기준의 최선책을 두고 차선책을 고른 연유를 물어본 게지.”

         

         “으으으! 이래서 비전문가는…! 우리들 세계에서는 그런 걸 일방적으로 허용한 시점에서 이미 처참하게 진 거에요!!”

         

         “흠… 그러냐…?”

         

         넷 해커끼리 싸우는 데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느니, 해킹이란 건 자판 위에서 손가락 운동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방어자와 실시간으로 벌이는 총격전이라느니, 장기간 구축된 자신의 보안 시스템을 우습게 보지 말라느니. 왜 그 마지막 대목에서만 나를 노려보는지 모르겠네.

         

         어떻게 말려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삼천포로 굴러 떨어지는 언쟁을 듣고 있으려니… 맥이 탁 풀렸다.

         쭉 뻗었던 손을 높이 치켜든다. 앉은 자리에서 용을 쓴다고 천장이나 둘에게 닿을 리도 없었지만 이 답답한 마음은 넘칠 정도로 꽉꽉 눌러 담았다.

         

         진짜 다 틀렸다고요 이 사람들아!

         

         탕—!!

         

         “꺅?!”

         – !! –

         

         객실 테이블을 향해 휘둘러진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강렬한 소음에 탈선했던 요원들은 물론 창문 밖에서 승강장을 가로지르던 제로까지 이쪽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덤으로 내 손바닥은 새빨갛게 변했고.

         

         – 바로 복귀할까요? –

         – 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니야! –

         

         타는 목구멍에 좀 들이붓게 부탁한 음료수나 얼른 가져다 달라 대꾸하고, 조용히 손을 되돌려 이마를 감쌌다.

         

         그… 허장성세나 두통 때문이 아니라, 힘조절을 실패한 탓에 너무 아파서 눈가를 좀… 부끄러우니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아무튼 좋을 대로 비약하는 건 본인들 자유긴 한데,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 나로부터 뼈대가 되는 사실은 듣고 군살을 덧붙여 주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댁들과는 정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명 의뢰 비슷한 게 있어서 네오 헤이븐으로 향하는 길이야. 객실이 겹친 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사고인데? 나한테 무슨 미련이라도 남았어?”

         

         일이 끝나고도 그대로 남아 알박기 할 예정이 있긴 했지만, 구태여 거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줄곧 하고 싶던 입장표명도 확실하게 쏟아냈겠다. 어느샌가 앞으로 기울여졌던 몸을 원래 위치로 되돌렸다.

         

         둘의 표정을 살핀다.

         불신이나 적의보다는, 미약한 의심과 황당함이 공존하는 게 아주 긍정적이었다. 눈 감았다 떴는데 총부리 겨눠질 우호도만 아니면 됐다.

         

         하지만 안심이 조금 빨랐던 모양이다. 농담삼아 덧붙인 사족에 상정 외의 답변으로 얻어맞았으니까.

         

         “…뭐, 로잘린이 하루 종일 자네 얘기를 달고 지내긴 했지. 성격도 제멋대로면서 외모는 인형 같고, 능력은 재단하기도 어려운 악마 같은… 크흠, 여자라고.”

         

         “……예?”

         

         어… 뭐라고요.

         

         사람 면전에다 대고 이런 식으로 점수매기기가 있나?

         과연 그녀가 떠들었다는 게 칭찬인지 쌍욕인지는 아시프가 얼버무린 자리에 들어갈 낱말에 따라 달라질 것 같기는 한데, 이 아저씨는 그걸 또 일러바치네.

         

         “?! 이 하지(hajji; 아랍계 남성 멸칭) 아재가! 팀 리더라는 작자가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저 아가씨가 진심을 내보였으니, 우리 쪽도 감춘 속내를 좀 보여줘야 공평하지 않겠나?”

         

         “대체 그걸 왜 날 팔아서 메꾸냐니까요!?”

         

         화끈거리는 손바닥만큼이나, 본인의 머리색만큼이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로잘린이 나를 힐끔거리며 아시프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의 키가 얼마나 크더라? 지금 나랑 비슷한가?

         신체조건을 따지면 어림도 없을 하극상이지만, 그는 그저 허허롭게 웃으면서 로잘린의 투정을 받아주고 있었다.

         

         …미풍에 따라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리면서도 이쪽을 살피는 시선은 거두지 않은 채로.

         무디면서 날카롭고, 느슨하면서 꽉 조여져 있다. 오직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파이브 아이즈에 몸담은 용병다우시다. 생각해보니 이 아저씨 별명이 ‘암흑’ 진화한 슈나이더였나?

         

         인종 관련 농담을 날리기엔 형형한 두 눈동자가 너무 매서워서 안 되겠다. 속으로만 떠들도록 하자.

         

         “그래서, 아나스타샤 아가씨는 전부 착각이라고 말하는 겐가? 경찰이 우글거리는 기차역에서 수배서가 갱신된 지도 얼마 안 지난 따끈따끈한 일급 현상범을 둘이나 묶어 놓고, 따로 원하는 것도 없이 기가 막힌 우연이 작용한 결과라고?”

         

         “정확히 맞는데요?”

         

         직접 언급하면 작위적인 느낌이 들까 봐, 차마 스스로 꺼내지 못하던 단어 ‘우연’을 아시프가 먼저 입에 담았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에 올라탔고.

         

         꽉 막혔던 속에 마침내 빈틈이 생겼다.

         참고 참았던 답답함을 모조리 토해내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하나 톡톡히 배우긴 했다. 대인관계는 첫 단추 하나만 잘못 꿰도 돌이키기가 이렇게나 힘들다는 걸.

         

         네오 헤이븐에 도착해서는 두 배, 세 배로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언제 어디서 네임드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아쉬운 쪽이 사려야지.

         

         “……좋아, 믿겠네. 신출귀몰한 용병님이 못 본 척 해주신다는데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오?”

         

         “리더…?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아니면 머리 안에도 터번을 넣어둔 거야(Raghead; 헝겊 대갈통, 마찬가지로 멸칭)?”

         

         아시프의 선선한 수긍에 나를 포함, 로잘린까지 의문을 표했다.

         전 용병 특유의 확실한 맺고 끝냄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뭔가 다른 근거가 있을지도.

         

         아니, 그보다도 얘는 무슨 쌍욕을 이리도 물 흐르듯이 대화에 섞는지 모르겠다. 원래 이렇게 입이 걸걸했나?

         

         내 의뭉스러운 시선을 받은 로잘린이 어색하게 늘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으며 딴청을 부렸다.

         입담이 이 정도라면 나를 두고 한 말은 진짜 칭찬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실수로부터 배워야지. 최근에 꺼지라 할 때 재깍재깍 안 사라졌다고, 다짜고짜 팔을 잘라버리는 괴한과 싸우면서 값진 교훈을 얻었다네.”

         

         “크흠…!”

         

         투덜거리는 말을 마지막으로.

         아시프 씨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버렸다. 팔짱을 끼고자 움직이던 팔이 도중에 움찔하더니 얌전히 팔걸이로 돌아가는 모습은 무언의 시위에 가까웠다.

         

         그 시위에 대한 내 대응은 뭐였냐고?

         아무것도! 헛기침 한 번을 빼고는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사실상 진짜 볼일이 없으면 객실을 반 가르고 서로에게 간섭하지 말자는 휴전 협정을 맺는데 성공했는데 여기서 더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었다.

         

         어디, 나도 그럼 차분하게 부족한 잠이나 채워볼까… 하고 편한 자세를 찾을 때까지 몸을 뒤척이려고 했는데.

         

         “…저기, 하나만 물어봐도 돼?”

         

         “……?”

         

         그런데 어른들의 담소가 끝나기를, 나름 조신하게 기다렸던 소녀는 아직 하고자 하는 말이 남아있었나 보다. 구체적으로 나에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로잘린이 다소곳한 자세로 테이블에 팔을 기댔다.

         

         살짝 어둡고 조마조마한 기색이 감도는 앳된 얼굴이 보호욕구를 저절로 불러일으켰다.

         자존감의 화신 같던 애가 시무룩해할 문제가 있었나 싶었다.

         

         “나보고 위선자니… 철부지니 했던 말들 진심이야?”

         

         “…아이고.”

         

         아무래도, 앳된 건 얼굴만이 아니었나 보다.

         장애물은커녕 벽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실패에 살짝 부딪힌 것조차, 이 천재 해커님께는 충격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겨우 나 같은 녀석에게 저런 해답을 갈구하는 듯한 애절한 눈빛을 보내오다니.

         아직 어리구나… 어려.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을 가지는 건 좋은데, 파이브 아이즈의 사상에 너무 심취하지는 마. 그게 내가 하려던 말이었어.”

         

         괜히 쓸데없는 참견으로 인해 로잘린이 더 엇나갈 가능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근본적으로 선하고 올곧은 사람이란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솔직한 충고를 던졌다.

         

         “…왜죠?”

         

         “신념을 가진다는 건 너만의 기준점을 세운다는 거지만. 사상에 물드는 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자아를 버려두고 무작정 따르는 거니까.”

         

         뾰로통하게 되묻는 그녀에게 훗날 누군가의 명언을 들려줬다.

         아시프 씨의 감긴 눈꺼풀이 움찔하는 게 얼핏 보였다. 본인의 할 말을 미리 듣게 되는 건 어떤 기분일지 나중에라도 꼭 들어봐야지.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부활하고, 기업 머리 위에 관리 감독하는 조직이 몇 개쯤 더 생긴다고 현실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아. 기업 단위로 각자의 이윤을 추구하던 게, 국가 단위로 바뀔 뿐이지.”

         

         확신에 가득 찬 내 어조에 로잘린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 미친 자신감의 근원을 궁금해하는 게 척보기에도 느껴졌지만 아쉽게도 출처를 알려주기는 힘들었다. 두 동네에서 모두 살아본 경험담이라고 하면 믿어줄 사람이 얼마 없을 텐데, 그녀는… 해당되기엔 너무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다.

         

         “네가 좋아하는 소속감은, 조직이 네가 가진 신념에 부합할 때만 가지고 어긋나기 시작하면 내던져버리면 되는 물건이야. 막말로, 기업이랑 비밀 결사랑 다를 게 뭐야? 똑같은 집단 겸 조직이고, 임무-업무- 내려오는 것도 그렇고. 사실 비슷하지 뭐.”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묶음처리에 정신이 혼미해진 로잘린이 뭐라 반박을 하려 했으나 난 얌전히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애당초 이건 그녀를 설득한다기보다는 들을 거면 듣고, 말 거면 말라는 식의 혼잣말에 가까웠으니까.

         

         “적어도 행동할 때, 항상 자신이 납득하는 방향으로 풀어나가. 저기서 자는 체하는 아시프만 해도 어수룩한 마음가짐으로 이 짓거리에 뛰어든 게 아니야. …너도 천재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읏…?!”

         

         사락….

         

         고집이 한풀 꺾이고 분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앞머리를 슬쩍 헝클어트려주었다.

         크리스마스에만 해도 파이브 아이즈가 어쩌구, 계몽이 저쩌꾸 하면서 대변인처럼 굴었던 입이 꾹 닫혔다. 빨개진 채로 후다닥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자기 자리에 착석하는 게 꽤 깜찍하네.

         

         

         – 아스트라 익스프레스 A-185호, 발차합니다. 선로 교체 및 플랫폼 재조정이 이루어지므로 시설 파손 방지를 위해 모두 역사 안으로 이동해주시길…. –

         

         팔자에도 없던 인생 철학 강의를 해주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버렸다.

         

         이거 자칫 여행내내 질문세례에 시달릴 빌미를 만들어준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람은 이미 알고 있던 걸 설명하는 와중에도 스스로 배운다고, 흔들리던 내 정신과 발 밑도 조금 견고해진 것 같아서 안심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 잘 풀렸으니 됐다.

         아시프는 방관, 로잘린은 명상 중.

         

         옆자리가 좀 허전하긴 하지만 원래 비행기에서도 근처 자리가 공석인 게 제일 편한….

         

         “……어.”

         

         축 늘어져 있던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시발, 기차가 떠나려는데 지금 여기가 공석이면 안 되지 무슨 소리야 이 멍청아!

         

         다급하게 승강장을 살피자, 거기엔 한 손으로 자판기 구석을 우그러뜨리고 다른 손에는 달려온 역무원 멱살을 잡고 들어올린 제로가… 야!! 너 안 타고 거기서 뭐해?!

         

         – 비열한 자판기가 아샤님의 크레딧을 수취해 놓고, 해당하는 상품을 제공하지 않아서 정당한 환불 절차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상! 대형 귀중품 분실!

    으… 연재 시간이 점점…! 으아아….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