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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1

       우리를 다시 집안에 들인 올가는 잠시 부엌 찬장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연갈색 전투식량 봉지와 통조림 몇 개를 꺼냈다. 능숙한 솜씨로 전투식량을 데우고 통조림을 까 그릇에 덜어낸 다음, 식탁에 그럴싸하게 세팅한다.

       

       “여기…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맛있게 먹으면 좋겠네.”

       

       어디까지나 레토르트를 데웠을 뿐이지만, 전투식량의 구성 자체는 생각보다 매우 견실했다. 이탈리아식 토마토 소스로 졸여낸 미트볼, 치킨 누들, 으깬 감자, 짭짤한 크래커, 딸기잼, 파운드 케이크, 초콜릿 바에 커피와 밀크쉐이크.

       

       그에 더해 시금치와 복숭아 통조림까지 곁들이니, 식탁 위는 종말을 맞이한 세상의 상차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하긴, 미군 전투식량이 원체 푸짐하긴 하지. 근데 이거 뭔가 갤에서 들었던 생활상하고 심각한 괴리감이 있는데?

       

       “…분명 사냥과 채집으로 먹고 산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아, 그거…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인데. 그걸 믿네.”

       “반쯤 농담이라고?”

       “도시 밖에서 살 땐 정말로 야생동물을 잡아먹기도 했으니까. 이것저것 다 먹어봤어. 평야에서 마주친 들소를 쏴죽이고 구워먹기도 하고, 이리 호에서 낚시로 건져올린 연어도 맛있었지.”

       

       올가는 잠시 추억에 잠긴 눈을 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지금도 그렇게 맛있지는 않겠지만, 식으면 정말 별로일 테니까…”

       “아, 응.”

       

       전투식량이라. 국군 전투식량이야 질리도록 먹어봤어도, 미군 전투식량은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에 더해 이곳은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세계이기까지 하니, 눈앞의 만찬은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에 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미트볼을 한 점 집어 입에 넣어보았다. 그리고 그 옆의 치킨 누들과 으깬 감자도. 이것저것 먹어보고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맛있다. 그리 생각하곤 말없이 식사에 열중하고 있으려니, 올가가 약간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좀 먹을 만해…?”

       

       하나도 자신 없는 말투로 묻길래, 나는 내 소감을 일체의 가식 없이 그대로 이야기해줬다.

       

       “맛있는데?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정말? 다행이다아…”

       “기준을 너무 높게 잡을 필요 없어. 내가 지난 1년 3개월 동안 뭘 먹고 버텼다고 생각해? 그거에 비하면 이건 그냥 고급 뷔페라니까.”

       

       혹시 몰라 챙겨온 우주식량을 주머니에서 꺼내 흔들어보이자, 올가가 나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 고생이 많았구나.”

       “어, 음. 그래도 생각보다 먹을 만해. 물론 같은 거만 먹으니까 좀 많이 물리긴 했지만.”

       

       아니, 웃으라고 한 소린데 진짜 연민 어린 시선을 보내면 어떡하냐. 물론 나 같아도 누가 짤막한 에너지바 하나로 1년 넘게 삼시세끼 다 때운다 하면 동정을 금치 못하겠지만.

       

       근데 그게 나였네. 이런 시발.

       

       “갈 때 전투식량 좀 싸줄까…?”

       “아니, 괜찮아. 정말로. 어차피 곧 있으면 웨일리 영감님한테 있는 거 없는 거 다 보급받을 거니까, 오히려 네가 받고 싶은 거 좀 말해봐.”

       

       정말 진지하게 이것저것 들려보내려고 하는 기색에, 나는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자기 먹고 살기도 바쁘면서 뭘 또 챙겨주려 그래. 내 말에 그녀도 겨우 납득했는지, 사흘 굶은 자식 쳐다보는 어미의 눈을 그제야 거두었다.

       

       그렇게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기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가, 문득 옆에 앉은 교주님이 신경쓰여 쳐다보았다. 별 말도 없이 묵묵하게 한 숟갈씩 이것저것 떠 드시고 계시길래,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교주님, 입맛에 좀 맞으세요?”

       [뭐, 나 말이냐?]

       

       자길 부를 거라고 예상을 못한 건지, 그녀는 흠칫하며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맛이라면 괜찮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구나.]

       

       애써 웃으며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걱정스런 낯으로 말했다.

       

       “아무 말씀도 없으시길래요. 혹시 억지로 드시고 계신 건 아닌가 하고.”

       [그런 거 아니니 신경쓰지 않아도 되느니라. 폐관 수련 중에 먹는 벽곡단에 비하면 별미 그 자체니까 말이다.]

       “교주님…”

       

       그녀도 나와 같은 ‘1년 365일 1메뉴 고정 식단’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니,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냐?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더냐?? 진윤? 진윤??]

       “아뇨, 그냥 조금… 아련해져서요.”

       [???]

       

       자기가 대체 왜 연민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인지 이해 못한 교주님이 무수한 갈고리를 띄우고, 그렇게 어느새 식사가 끝나갔다. 후식으로 파운드케이크에 밀크쉐이크를 먹고 있으려니, 맞은편에 앉은 흰색머리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뭔가 안절부절 못한 기색을 한 채 또 검지로 부드러운 흰색 옆머리를 돌돌 꼬고 있는 그 모습에, 나는 그만 탄식하고 말았다. 아니, 얘는 또 왜 이러고 있어.

       

       분명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차마 입을 못 열고 있길래 그냥 답답해서 선수를 치기로 했다. 왜 저러고 있는지 그 이유야 대충 짐작이 갔으니까.

       

       “슬슬 식사도 끝났는데…”

       “!!”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진한 아쉬움과 미련을 저도 모르게 드러내는 그녀에게, 능청스레 말했다.

       

       “배도 꺼트릴 겸, 간단한 게임이나 할까?”

       “…!”

       

       순식간에 표정이 화악 밝아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아, 이거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뭐라고 변명해야 되나. 대충 동선 상 어쩔 수 없이 늦었다고 하면 믿어주려나?

       

       

       ***

       

       

       게임이라고 해도 전기도 다 끊긴 마당에 비디오 게임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하여 주 종목은 간단한 보드게임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나 때울 겸 간단히 즐기자고 시작한 게임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으니.

       

       땡ㅡ

       

       할리갈리. 바닥에 놓인 카드를 한 장씩 뒤집어, 같은 종류의 과일 카드가 5장이 모인 순간 종을 가장 빨리 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지만.

       

       땡ㅡ

       

       당연하게도, 일개 일반인들이 무림 고수의 손놀림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그 상대가 한 세상에서도 정점에 오른 초월자라면 더더욱.

       

       땡ㅡ

       

       내리 세 판을 압승하고 나서, 천마는 전혀 다 이긴 것 같지 않은 사람의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흥이 다 깨진 것 같구나.]

       “아, 아뇨!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거짓을 고하는 게 티가 난다. 굳이 위로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침울한 낯으로 은색 종을 매만지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고심 끝에 제안했다.

       

       “그, 종목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요?”

       

       피지컬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게임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내가 제안한 다음 게임은 포커였다. 암만 무림 고수라도 이건 어쩔 수 없을 터…!

       

       “레이즈.”

       “콜.”

       

       그러나 그런 내 원대한 계획은 부질없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콜.]

       “…노 페어.”

       “노 페어.”

       [원 페어.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구나.]

       

       블러핑 따윈 여지없이 간파하고 판돈을 쓸어가시질 않나,

       

       [다이.]

       

       기껏 풀하우스를 모았더니 즉각 한 발짝 빠지고,

       

       [올 인.]

       

       그리 높지 않은 패로도 수시로 올인을 걸어온다. 문제는 그게 도박성 블러프가 아니라, 정말로 나와 올가의 패가 개똥패일 때 정확히 노리고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짤그락ㅡ

       

       수북이 쌓인 칩들을 어느새 다 가져간 천마는, 이내 이번에도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되었다… 나 같은 것이 눈치도 없이 끼어든 게 잘못이었다. 너희 둘끼리 재밌게 즐기거라…]

       “잠깐만요!! 진짜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실래요? 정말 괜찮은 게임을 골라볼 테니까!!”

       

       터덜터덜 밖으로 산책을 나가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뜯어말렸다. 아니, 천마씩이나 되시는 분이 뭐 이리 남의 눈치를 보셔. 차라리 다 이기고 당당하게 재밌어하시면 모르겠는데, 지금 저 태도는 아무리 봐도 낙심한 모양새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원래 게임이라는 게 이기려고 하는 것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이기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승패가 확정된 싸움은 재미도 감동도 없는 노가다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녀 정도의 고수에게 있어 남의 심리를 읽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굳이 일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나 동공의 변화. 심장의 맥박과 체온의 변화 등을 통해, 타인의 감정과 심리가 그냥 자연스레 읽히는 것이다.

       

       그녀의 성격 상 일부러 봐주면서 져주는 것도 곤란했을 테니, 나름 최선을 다한 후에 현타가 진하게 왔을 테지. 하여 내가 정말 고심을 다한 끝에 정한 다음 종목은, 다름 아닌 부루마불이었다.

       

       “아니, 근데 이게 왜 집에 있어?”

       “엄마가 이민 올 때 가져오신 거라서…”

       

       모노폴리도 아니고 낡은 부루마불 실물을 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물론 나도 가끔 아버지가 어릴 적 추억 이야기하실 때나 썰로 들었지, 직접 해본 적은 없었다. 그야 내 세대는 주사위를 굴려도 사행성 모바일 게임으로 굴렸으니까.

       

       [이건…]

       “그냥 주사위를 쥐었다 떨구기만 해도 되죠. 어때요, 이러면 정말 할 만하죠?”

       

       굳이 트럼프 카드로 할 수 있는 수많은 게임과, 여타 보드게임을 놔두고 이걸 고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게임이 대부분의 보드게임 중에서도 가장 운빨이 심했으니까. 피지컬도, 심리전도 거의 개입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운빨좆망겜…!

       

       주사위의 눈과, 뽑은 열쇠카드의 종류에 따라 유불리가 정해지기에 사실상 지금 이 상황에는 최적의 게임인 셈이었다.

       

       [좋다. 과연 이것이라면 공평한 승부가 가능하겠지. 헤아려줘서 고맙구나.]

       

       승부는 삼세판이라고 했던가. 내 지극정성에 감동한 듯, 교주님은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치하했다. 됐어…! 난 드디어 이 길고 험난한 싸움에서 이긴 거야…!

       

       그렇게 내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나는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약 2시간 후, 수상할 정도로 운이 좋은 올가의 주사위 눈에 나와 교주님은 처참하게 은행 잔고를 털리고 말았다. 우리 둘이 은근슬쩍 힘을 합쳐도 승부가 안 되더라.

       

       이번에는 연전연패의 수렁에 빠져 볼을 부풀린 우리 철부지 교주님의 모습에, 나는 그저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한 판 더를 외쳤다가 또 발리고 눈시울을 촉촉이 적시려 하시길래, 울상이 된 교주님을 위로하느라 애 좀 먹은 건 사소한 뒷이야기였고.

       

       …이 구시대의 산물이 우정 파괴 게임으로 명성이 자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오늘 뼈저리게 느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교주님 접대특)너무 이기면 풀 죽고 너무 지면 토라짐
    아찐천마님과 좀붕이 사이에 낀 진윤이는 그저 난처하다…
    제자 겸 교인 눈치를 보는 하찮은 초월자가 있다?? 삐슝빠슝뿌슝

    이광상님 후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주신 후원금 덕에 오늘도 낭낭하게 코코아물을 타 마시는 것입니다…! 달지는 않지만, 건강에는 좋은!

    그리고 멋있는 천마님 존안을 그려주신 구그궤겍님 정말 감사합니다!! 슬며시 팬아트 공지에 추가해둘게요…!

    여담이지만, 어쩌면 29일날은 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이 백신 2차 접종일이라서요…!
    1차는 별 이상 없이 잘 지나갔는데, 2차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컨디션이 괜찮으면 그냥 쓰겠지만요!

    다음화 보기


           


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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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FLAD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community for the last people who survived on Earth. This is ‘The Lonely Gallery Afte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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