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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1

       “팔이 아프진 않아?”

         

       파스텔은 멈추라 하지 않았다고 계속 조타륜을 돌리던 앨시어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앨시어가 손을 털었다.

         

       “이 정도는 평소 훈련에 비해 문제없어.”

         

       우리 앨시어는 튼튼하구나!

         

       “그럼 역시 너도 조타륜 돌리기가 즐거웠던 거네!”

         

       명령이라고 생각해서 따른 게 아니었어!

         

       다음에도 하자고 해야지!

         

       앨시어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렇게 안 봤는데~.”

         

       파스텔은 앨시어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바보바보 파스텔과 비슷하잖아~.”

         

       뿌뿌 뿌뿌.

         

       완전 부끄러운 비유~.

         

       “아하하!”

         

       파스텔은 웃다가 멈칫했다.

         

       허억.

         

       비교 대상인 내가 웃을 처지는 아님.

         

       “으아아! 역시 난 바보바보였던 거야!”

         

       분홍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젠 부정할 수도 없어!

         

       천재천재 파스텔이라는 좋은 과거를 회상하며 바보바보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앨시어가 얼떨떨해했다.

         

       “갑자기 왜 그래?”

         

       그런데 내가 천재천재 파스텔이었던 때가 있던가?

         

       오잉.

         

       파스텔은 고심하다가 어느새 침착해졌다.

         

       사실 딱히 변한 건 없었던 거임.

         

       “크래프트……?”

         

       앨시어가 혼란스러워하며 쳐다봤다.

         

       “앗, 앨시어! 아 맞아! 어서 가자! 아무리 기사단의 무능을 믿어도 너무 여유 부리는 건 좋지 않아!”

         

       짐가방의 끈을 고쳐 멨다. 서둘러 선창을 나와 갑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망을 보던 금발 소녀가 돌아봤다.

         

       “정말 아무도 오지 않네요. 이게 판단인 걸까요?”

       “경영 효율화야.”

         

       파스텔은 임시 정박장을 둘러봤다. 나무로 얼기설기 마련된 정박장은 사람 하나 없이 황량했지만 사람 흔적 자체는 꽤 있었다. 상자 위에 놓인 덩그러니 맥주잔이 눈에 띄었다.

         

       “경영 효율화요?”

       “어차피 주변 순찰을 뚫고 유적에 침입하는 게 가능한 도둑은 없을 테니 정박장을 지킬 인원도 유적 공략에 투입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주장이지.”

         

       동의하진 않지만 이해 못 할 판단은 아니다.

         

       “저희가 침입했는데요?”

       “우리야 내부 자료를 살펴서 비공정 순찰을 전부 우회하고 왔으니까!”

         

       파스텔은 진지한 표정이 됐다.

         

       “교단도 마찬가지일 테고.”

         

       무슨 목적이려나.

         

       “어쨌든, 내리자! 내리자!”

         

       줄사다리로 달려가니 멜리사가 서둘러 손을 뻗었다.

         

       “제 짐은 제가 들게요.”

       “괜찮아, 마법사님!”

         

       야영까지 상정해서 챙긴 짐이라 꽤 무겁다.

         

       모두 내리니 비공정이 홀로 움직여 정박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에 숨었다가 정박장이 다시 비어졌을 때쯤 돌아오도록 조작해 놨다. 반자동 항행은 완전 위대해.

         

       “출발!”

         

       앗, 목소리가 너무 크나?

         

       줄여서 다시 외쳤다.

         

       “출발~.”

         

       외치긴 그렇게 외쳤지만 실제 유적에 진입하려면 꽤 이동해야 했다.

         

       “으아아.”

         

       파스텔은 나무 사다리를 오르며 바들바들 떨었다.

         

       사다리는 하늘섬 밑면에서 중심부로 올라가겠다는 것처럼 바위 균열 사이로 끝도 없이 이어졌다. 까마득한 저 위에 사람이 있는지 경계하면서도 적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희 그거 알고 있어? 완전 무서운 괴담.”

         

       파스텔은 파자마 파티 때 공포 괴담을 꺼내는 애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는 사실 유적 입구가 아니래! 왜냐하면 왜냐하면.”

         

       분위기 조성일뿐 진짜 아는지 물어본 건 아닌데 조건반사적인 대답이 아래에서 돌아왔다.

         

       “이 유적은 하늘섬 밑면이 부서지며 드러나게 된 거니까요. 유적 입구라고 불러도 큰 문제는 없지만 정확히는 거대한 유적의 뚫린 벽면인 거죠. 맞죠, 파스텔?”

         

       멜리사가 사다리를 오르며 뿌듯해했다. 질문에 바로 대답한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우등생 같았다.

         

       으이잉.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파스텔은 반갑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못 들은 척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왜 여기가 입구가 아니냐면, 이곳은 하늘섬의 밑면이 추락해서 드러난 부분이기 때문이야!”

       “네. 제가 말한 대로요.”

         

       으아아!

         

       “무려 밑면이 부서져 추락했대! 하늘섬은 사실 무너지고 있던 거야!”

         

       덜덜덜.

         

       “그렇죠. 백 년 전 조사와 비교해 보자면 명백히 부피가 줄고 있어요. 언젠가 하늘섬은 사람이 살기엔 맞지 않는 곳이 되겠죠.”

         

       멜리사가 말하곤 덧붙였다.

         

       “대략 천년 뒤요.”

         

       아래아래 사다리에서 앨시어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한참 남았네.”

       “으아아! 추락하고 있대……!”

         

       파스텔은 혼자서 공포 분위기에 심취했다.

         

       덜덜덜.

         

       한참 뒤 끝도 없던 사다리를 다 올랐다. 사람은 통과할 만큼 넓게 갈라진 석제 벽면이 보였다. 유적 입구였다.

         

       “이, 이런 곳에 있으니 여태 못 찾았죠…….”

         

       멜리사가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땀방울이 금색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아?”

         

       파스텔은 걱정스럽게 살폈다.

         

       멜리사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죄송해요. 저만 짐가방을 메지 않았는데도 이렇네요. 단련 부족이에요.”

       “하긴 그렇지.”

         

       앨시어가 자기 팔을 주무르며 긍정했다.

         

       멜리사가 슬쩍 째려봤다. 그래도 할 말은 없는지 반박하진 않았다.

         

       “앨시어 너무 그러지 마아. 마법사면 당연히 힘들 만하지. 그리고 여기 사다리가 너무 높았어.”

         

       파스텔은 사다리 아래를 내려봤다. 바위 균열의 까마득한 저 아래로 먼지만 한 임시 정박장이 내려 보였다.

         

       으아아, 이게 몇 층이야?

         

       100층?

         

       200층?

         

       일단 추락하면 시체도 못 건질 거 같다.

         

       이쯤 되면 마법사면서도 이걸 오른 멜리사가 대단해. 평소에 얼마나 성실히 체력 관리를 한 거야.

         

       앨시어가 어깨를 돌리며 묘하게 바라봤다.

         

       “너는 안 힘들어?”

         

       나?

         

       “난 천재라 괜찮아!”

         

       당당한 대답에 멍한 시선이 돌아왔다.

         

       “멜리사도 지쳤으니 잠시만 숨을 돌리고 가자.”

       “저는 괜찮다고 답하고 싶지만 그건 그것대로 누를 끼칠 일이겠죠. 감사히 쉴게요.”

         

       짐을 내려놓았다. 소녀 둘이 앉아서 쉬기 시작하자 파스텔은 따로 나와 석제 벽면으로 다가갔다.

         

       매끈한 벽면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큰 균열이 생겨 버렸지만 고급스러운 외견만은 유지했다.

         

       『신성이 느껴지는군.』

         

       악마가 흥미로워했다.

         

       『하기야 이곳에 이런 것을 만들 존재는 신밖에 없겠지.』

         

       헤에.

         

       작게 속닥였다.

         

       “성지 같은 곳이에요?”

         

       악마님과 함께 성지 침입.

         

       배덕감이 두근두근.

         

       『큰 기대는 하지 마라. 구약 시대가 끝난 후 신은 이런 곳을 방치하기 시작했으니. 성지답지 않을 거다. 애초에 괴수가 서식한다고 했었나.』

         

       어쨌든 성지가 맞다는 얘기!

         

       파스텔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눌렀다. 벽면 균열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귀를 기울이곤 상반신을 슬쩍 집어넣었다. 분홍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양쪽으로 넓은 통로가 보였다. 던전 마냥 횃불이 걸려 있어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파스텔은 완전히 들어가 횃불을 살펴봤다. 횃불은 마석 가루가 뒤섞인 점토가 석탄 대신 불타고 있었다.

         

       기사단이 배치한 건가.

         

       “잘됐네요. 기사단의 영역을 알긴 용이하겠어요.”

         

       기사단을 조사할 거면 횃불 영역을 수색하고 야영을 할 거면 횃불이 꺼진 채 한참 방치된 구석에서 하면 되겠다.

         

       『교단은 이렇게 당당히 구역을 만들어 놓지 않았을 거다. 찾으려면 고생을 꽤 해야 할 테지.』

         

       푸푸.

         

       “저도 다 생각이 있어요.”

       『호오?』

         

       그런 것쯤은.

         

       악마님이 어떻게든 해주실 거야!

         

       오예.

         

       『열심히 해봐라.』

       “네! 열심히 응원할게요!”

         

       힘내세요, 악마님!

         

       악마가 멈칫했다.

         

       『왜 응원한다는 거지……?』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화이팅! 화이팅!

         

       얼마간 쉰 뒤 다시 이동했다.

         

       “횃불에 식별 번호가 있네요. 모두 메모하면 기사단의 수색 경로를 복원할 수 있을 거예요.”

       “우왕. 부탁할게!”

       “이참에 지도도 그릴게요. 가방에서 깃펜과 양피지를 꺼내주시겠어요? 이럴 줄 알고 종이 말고도 튼튼한 양피지를 챙겨왔거든요.”

         

       기사단이 이미 청소해 괴수 없이 깨끗한 통로를 거닐며 멜리사가 성실히 지도를 작성했다.

         

       “이 횃불의 마법엔 메모가 섞여 있네요. 암호화가 어렵진 않아서 제가 해석해 볼게요. 흡혈박쥐가 기승이니 주의할 것. 지금은 박쥐가 없는 걸 보면 소탕했나 보네요.”

         

       우와우와.

         

       멜리사는 공부뿐만 아니라 실전도 완전 유능해!

         

       군벌의 후계자가 되려면 이렇게나 실전 경험을 빠듯하게 쌓아야 하는 거야?

         

       으에, 난 그런 거 안 할래.

         

       “멜리사 부탁할게!”

       “네? 하고 있죠?”

         

       인맥 파워를 만끽한 파스텔은 다른 애를 슬쩍 돌아봤다. 흡혈박쥐의 핏자국 흔적을 살피던 앨시어가 의아해했다.

         

       분홍 눈동자가 반짝였다.

       “혹시혹시 앨시어는 뭐 할 줄 알아?”

         

       남부 군벌이 이렇게 활약하는데 북부 군벌도 무언가 할 수 있겠지?!

         

       기대감 백만 배 눈빛을 보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앨시어가 당혹스러워했다.

         

       “나? 나는…….”

         

       은색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봤다. 벽면을 봤다가 횃불을 봤다가 박쥐 핏자국을 다시 내려봤다.

         

       잠시 고민하더니 당당히 말해왔다.

         

       “박쥐를 잡을 수 있어.”

         

       파스텔은 멍해졌다.

         

       “그건 나도 할 줄 알아.”

         

       정적이 흘렀다.

         

       앨시어가 다시 당혹스러워했다. 다시 벽면을 봤다가 횃불을 봤다가 핏자국을 내려봤다.

         

       그리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본인이 멘 짐가방에 멈췄다. 잠시 고민하더니 당당히 말해왔다.

         

       “짐가방을 멜 수 있어.”

         

       정말 당당한 목소리였다.

         

       파스텔은 다시 멍해졌다.

         

       “그건 나도 할 줄 알…….”

         

       오잉.

         

       분홍 눈동자가 굴러갔다.

         

       생각해 보니 난 할 줄 모르는 거 같음.

         

       파스텔은 짐가방들을 스리슬쩍 벗었다. 자기 대신 멜 줄 아는 애에게 건넸다.

         

       “앨시어 부탁할게!”

       “어?”

         

       얼결에 넘겨받은 앨시어가 모든 짐가방을 둘러멨다.

         

       “어……?”

         

       은색 눈동자가 멍하게 깜빡였다.

         

       파스텔은 괜히 이마를 훔쳤다.

         

       “휴우.”

         

       어쩐지! 어쩐지!

         

       짐가방이 적성에 안 맞더라!

         

       적성에 맞는 애가 있었던 거임!

         

       이 구역의 지도 작성을 마친 멜리사가 돌아봤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둘이 뭐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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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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