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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1

     

    “하암.”

     

    하루를 마치고 내 방에 들어온 아셀라가 조그맣게 하품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에 들어오는 건 이제 자겠다는 의사표현이다.

     

    벌써 1년 넘게 이어진 루틴이라 이제는 꽤 익숙하다.

     

    덕분에 나는 업무가 남았어도 새벽까지 못 붙들게 된다.

     

    그만큼 낮에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그나마 지금은 파벌 치유사들이 상당히 분담해줘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정리할 일이 남았다.

     

    “잠시만요. 먼저 누워 계세요.”

     

    내가 책상에 앉아 수첩에 글자를 적고 있으니 아셀라가 나를 닦달했다.

     

    “공자, 나 졸려. 빨리 자자.”

     

    “야만족 토벌전에서 일이 많았잖아요. 검수해야 할 보고서가 마차 한 가득이에요.”

     

    “토벌전 말이지.”

     

    아셀라가 풀썩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공자를 찾던 꼬마애가 있었어. 덕분에 아버지가 위급한 때를 넘겼다느니 시끄러웠는데, 못 만났니?”

     

    피난민 위치를 알려준 소년 이야기 같다.

     

    “급히 출발한 덕에 잠깐 봤습니다. 황녀님이야말로 블뤼허 백작은 만나셨어요?”

     

    “그런 춥고 척박한 땅에 한시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어. 백작은 잠깐 만났어. 월광궁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단다.”

     

    아셀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나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아서야, 점점 귀찮아지지 않겠니.”

     

    “나중에 다 갚게 하실 생각이시죠?”

     

    “그럼. 황제가 되면 이자를 두 배씩 쳐서 베푼 은덕을 돌려받을 거야.”

     

    아셀라가 키득대고는 침대에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그녀의 머리칼이 가장자리로 흘러내렸다.

     

    “공자, 나 충분히 기다렸는데.”

     

    “예이.”

     

    아셀라를 더 기다리게 해서 수면시간을 뺏을 수도 없으니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훅, 입바람을 불어 책상의 촛불을 껐다.

     

    침대로 들어가니 온몸의 근육이 편안함에 환호성을 지르며 수면을 요구해왔다.

     

    원정 동안 마차니 간이침대니 불편했었지.

     

    “안녕히 주무세요.”

     

    “있잖아, 공자. 내가 베푼 은덕 말인데.”

     

    오늘따라 말수가 많은 아셀라였다.

     

    바로 안 잘 거면 내가 일이나 더 하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공자에게 베푼 은혜도 기억하고 있지?”

     

    “황녀님이 제게요?”

     

    은혜보다는 원한을 많이 베푸시긴 했지.

     

    흠, 뭐 이번 생각만 해본다면.

     

    가장 큰 건 목숨을 구해준 건가.

     

    사룡의 저주에 당했을 때나, 이번에 골짜기로 떨어졌을 때.

     

    그건 그만큼 여태 나도 아셀라를 도왔으니 충분히 갚지 않았나 싶은데.

     

    설마 그 정도로 부족하다는 얘기일까.

     

    대가로 뭘 요구해올지 조금 무서워졌다.

     

    “공자를 주치의로 뽑아줬잖아.”

     

    “아하, 거기부터 시작하는군요.”

     

    상상도 못 했다.

     

    “그럼. 지금 공자가 푹신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것도 내 덕이야.”

     

    “아이고, 물론입죠.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내 비아냥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아셀라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래도 이번에 토벌전에서는 잘 했어. 칭찬해줄게.”

     

    “칭찬이요? 이건 좀 놀랍네.”

     

    “왜 놀라. 내가 얼마나 자애로운데. 잘만 하면 얼마든지 칭찬하고 보상을 내려.”

     

    대신 못 했을 때 지옥이 보이기 직전까지 목을 조르시죠.

     

    “그래서 말인데.”

     

    아셀라가 슬쩍 내게 머리를 붙여왔다.

     

    “공자가 내게 기아스까지 부탁하며 빌었던 소원, 이뤄줄까?”

     

    “예?”

     

    생각지 못한 발언에 조금 놀랐다.

     

    분명 우리는 계약을 맺었다.

     

    내가 공을 세우면 아셀라가 내 요구사항을 하나 들어준다는 계약이다.

     

    그게 적힌 편지는 지금도 아셀라의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정말입니까?”

     

    “응.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아셀라가 덧붙였다.

     

    “공자가 일출 때 빌었던 소원이 뭔지 알려줘.”

     

    “그건 왜요?”

     

    “이걸 이뤄주고 나면 그 소원도 같은 조건으로 계약해줄게. 어때, 구미가 당기니?”

     

    아셀라가 작은 악마처럼 큭큭댔다.

     

    그녀가 이렇게 웃을 때는 보통 다른 의도가 있어서다.

     

    ‘당근과 채찍 작전인가 본데.’

     

    아셀라가 귀족가에 잘 써먹는 수단이다.

     

    조교하려는 귀족이 처음 가지고 싶어하는 걸 호탕하게 준다.

     

    한 번 황가와의 커넥션을 맛본 귀족은 더욱 큰 걸 원하게 되고, 아셀라는 그에 맞추어 점점 대가를 늘린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아셀라에게 의존하지 않고 영지를 굴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듯.

     

    마지막엔 얼토당토않은 일을 시키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야만 한다.

     

    불복하면 ‘나 황제인데, 불만 있어?’하고 뻔뻔하게 나가면 그만이다.

     

    중간에 못 빠져나가게 덫을 쳐놓는 것도 아셀라의 특기다.

     

    ‘나는 안 속지.’

     

    당장 서부 대공만 하더라도 아셀라에게 좋은 조건으로 약제를 구매하게 됐지만, 그로 인한 기사단 운용비 절감 때문에 정작 자신이 약에 의존하게 될 걸 아직 모른다.

     

    나중에는 더 좋은 약을 구매하기 위해 보다 많은 금화를 바치게 될 게 뻔하다.

     

    아셀라는 내게도 그런 함정을 걸려는 생각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아직 황실을 떠날 수도 없어.’

     

    아셀라와 관련된 배드엔딩은 수도 없이 남았을뿐더러, 치유사 파벌도 막 성장하기 시작한 참이다.

     

    내의원만큼 의학을 펼치기에 좋은 환경도 없다.

     

     

    나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희 계약은 현상유지 하기로 하지요.”

     

    “뭐어? 왜?”

     

    내 대답은 예상 못 했는지 아셀라가 입을 떡 벌렸다.

     

    “하하, 아직 그만큼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요.”

     

    “내가 인정해 준다니까.”

     

    “제가 좀 겸손한 편이죠.”

     

    흐름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셀라가 가슴팍을 퍽 때렸다.

     

    “대체 뭘 적어놨길래 그래? 정말 별 것 아닌 소원이었어?”

     

    “예. 간단한 일입니다.”

     

    “정말 제국을 달라고 써놨거나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아이, 제가 대국을 통치할 그릇으로 보이시나요. 황녀님께서 당장이라도 말 한 마디로 이뤄주실 수 있는 간단한 소원이에요.”

     

    “뭐길래 그래 정말.”

     

    아셀라가 뾰루퉁하게 볼을 부풀렸다.

     

    뭐, 황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셀라가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지면 나로서는 더 안심이 되긴 한다.

     

    그만큼 내가 후작가로 돌아갔을 때 다른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리 가문을 손대지 못하게 힘써줄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황실이나 귀족들의 귀찮은 정치질은 확실히 끊어내 주겠지.

     

    그때가 되면 아셀라는 하기 싫어도 기아스의 구속 때문에 해줘야 할 테고.

     

    ‘아셀라의 디버프를 짼 후가 좋겠지.’

     

    아셀라가 마법으로 일으키는 대부분의 배드엔딩도 그걸로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생 안고 사는 지병을 고쳐준 건 엄청난 공이기도 하니, 계약을 안 이뤄줄 이유도 없을 거고.

     

    ‘생각해보니 배드엔딩만 다 지우면 아셀라가 황제가 되어도 딱히 상관없지 않나?’

     

    내가 모든 배드엔딩을 봤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 외의 방법으로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미 모든 나쁜 가능성이 없어졌다면 황제가 된 아셀라라도 세상을 멸망시킬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운명인지 억지력인지 뭔지는 모르겠어도.

     

    ‘뭐, 아셀라가 황제가 안 되면 삭제될 배드엔딩도 많긴 하니.’

     

    몇몇 수단은 아셀라가 황제이기에 쓸 수 있었던 것들이니까.

     

    여기는 순서의 문제겠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제가 훨씬 대단한 공을 세운 후에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아하, 공자의 생각을 알았어.”

     

    “뭘요?”

     

    “공자, 처음부터 소원도 뭣도 아닌 쓸모없는 문장을 적어놓은 거지. 그래서 그다지 원하지 않는 거야. 날 놀리려고 했지?”

     

    좋은 추리력이었지만 빗나갔다.

     

    “아니에요. 저에게는 꽤 필요한 소원입니다. 무엇보다 황녀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뤄줄 수 없고요.”

     

    “…그래? 나만이 이뤄줄 수 있다고?”

     

    내 대답에 아셀라가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 이리저리 입꼬리를 씰룩였다.

     

    “됐어, 그럼. 잘래.”

     

    “잘 생각하셨어요. 일찍 주무셔야 피부도 좋아지시죠.”

     

    “이미 좋아.”

     

    아셀라가 투덜대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양손을 내 허리춤에서 꼬물대며 파고 들어왔다.

     

    수면 시에 무게감 있는 물건과 붙어 자면 심리적 안정감을 얻어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애착인형 역할이 나인 건 귀찮긴 해도 담당 환자가 편하다면 참아야지.

     

    척추에 좋은 자세는 아니기에 개인적으로는 고쳤으면 하는 습관이지만.

     

    심리 건강과 육체 건강은 지금처럼 충돌할 때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운동은 무엇보다 귀찮지만 해야만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어느 쪽에 밸런스를 둘지도 정해야겠네.’

     

    주치의로서 마땅한 업무 내용을 생각하고 있으니 슬쩍.

     

    아셀라가 내게서 상체를 살짝 떨어트렸다.

     

    왜인지 아셀라는 머리를 이리저리 꾸물대면서 몸을 이불 사이로 비비적댔다.

     

    주먹을 꽉 쥐고 근육이 경직된 게 분명 잠꼬대는 아니었다.

     

    나는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닿아 아셀라의 어깨를 잡았다.

     

    “황녀님? 배가 아프신가요?”

     

    전처럼 발작이 아닐까 했다.

     

    아셀라는 아픈 티를 내는 걸 싫어하니까.

     

    “황녀님.”

     

    “에, 으응.”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드는 아셀라.

     

    아랫입술을 깨물고 앙칼진 눈매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통증을 참는 기색은 아니다.

     

    그렇다면.

     

    “화장실이 급하시군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야!”

     

    아셀라가 소리를 지르고는 이불을 박차며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내 방에서 잘래.”

     

    “갑자기요? 뭐… 그러세요.”

     

    아셀라가 자기 베개를 들고는 밤중의 귀신처럼 콩콩대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왜 또 저런담.

     

     

     

    ***

     

     

     

    다음 날, 홀로 침대에서 일어난 아셀라는 괜히 분해서 씩씩댔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였다.

     

    “내가 왜 그랬지?”

     

    어젯밤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먼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라스를 괴롭히기 위한 작전의 일부긴 했지만.

     

    “그게 문제였어. 괴롭히는 게 아니잖아.”

     

    작전대로 라스의 첫 소원을 이뤄주고 두 번째 소원을 대가로 기아스를 작성한 들.

     

    결국 소원을 하나 이루고 새 기회까지 얻으니 라스에게는 좋은 일뿐이다.

     

    반면 아셀라에게 좋은 일은 하나뿐이다.

     

    라스가 자신에게 더 매달리게 되리라는 확신이 생긴다.

     

    ‘아냐, 이상하잖아.’

     

    라스가 거절해서 성이 난 걸 보면 분명 자신이 원하던 건 맞다.

     

    그런데, 그게 왜?

     

    라스가 내게 매달리는 게 왜 좋아?

     

    요즘들어 발상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리고 있다고 아셀라는 깨달았다.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발상.

     

    계속 전제가 틀려서 자꾸만 미묘한 언질을 담게 만든다.

     

    “그러고도 문제야.”

     

    라스의 소원을 자신만이 이룰 수 있다고 알았을 때 기뻤던 기분도 이상했다.

     

    왤까? 내가 유능하다는 뜻이니까?

     

    아니면…

     

    “하.”

     

    아셀라는 일부러 찬물로 세안을 하겠다고 시녀장에게 명했다.

     

    시원한 온도가 뇌를 깨우지만 역시 어제 일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라스의 방에서 도망쳤던 일.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이상해져서 그랬다.

     

    그와의 동침은 오래됐지만 어제는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라스를 껴안으려 하니 심장은 더 빨라지고, 땀이 날 정도로 몸은 달아오르고.

     

    아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셀라는 라스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잠드는 일이 기분 좋아서 참을 수 없었던 나머지 그의 방을 뛰쳐나온 것이었다.

     

    “왜 이런지 모르겠어.”

     

    자신의 이상해진 상태가 왜 그런지, 느껴지는 꿉꿉한 기분이 뭔지.

     

    그러면서 이유 없이 가슴 한켠에 차오르는 따뜻한 이건 또 뭔지.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던 아셀라는 그 날의 휴식 시간에 타냐를 불렀다.

     

    평소처럼 그녀와 간식과 차를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아셀라는 타냐에게 어제 있었던 일과 자신의 상태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타냐는 아셀라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거야. 타냐 공, 이런 적 있어?”

     

    “황녀님만큼 심하진 않았어도 경험은 있습니다. 비슷한 현상을 겪은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원인이 뭐야?”

     

    타냐가 종종 두 사람에게 보냈던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뭘.”

     

    “선생님을 좋아하시니까 그런 거지요.”

     

    “뭐?”

     

    타냐가 담담하게 던진 말에 아셀라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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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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