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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1

       엘라는 눈앞에 흘러내리는 토마토를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무대 위에서 토마토를 얻어맞았다.

       서커스에 대해 자부심이 넘치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은 공개적으로 뺨을 맞은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수치심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은 연기자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토마토가 날아온 방향을 노려봤다.

       자신을 보며 히죽대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도스빌 남작.

       개막식에서 원더스타인을 기소했던 남자였다.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누군지 몰랐지만, 그와 한패인 듯 이쪽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수치심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대신 분노가 치솟았다.

         

       엘라는 학교에 있던 시절에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다.

       그녀보다 머리 한두 개는 큰 남자애들도 땅바닥에 처박고는 했다.

       상처가 나고 피가 흘러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겁먹지 않는 것이었다.

         

       막 앞으로 나서려던 그녀는 자리에 멈춰 섰다.

       도스빌 남작의 눈이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패거리의 표정에서도 연기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순간 엘라는 알아차렸다.

       저들은 단순히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뭔가 의도가 있었다.

         

       엘라는 고개를 흘끗 돌렸다.

       원더스타인이 무대 반대편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하얀색 분이 칠해져 있었고, 입술에는 붉은색 립스틱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엘라는 그의 미소를 보고 섬찟했다.

         

       그의 쇼가 방해받았다.

       그가 저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죽이지야 않겠지만, 몸 어느 한구석을 병신으로 만드는 것은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상황은 돌이키게 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될 것이다.

       이번 대결에서 실격하는 건 물론이고, 자신들에 대한 이미지가 곤두박질칠 것이다.

         

       -괴물 서커스가 괴물 서커스 했네!

       -역시 근본 없는 떠돌이들은 그걸 못 참아. 욱하는 거.

       -괴물 단원들 위험한 거 아니야? 자기도 통제 못 하면서 누굴 통제해?

         

       그럴 수는 없었다.

       지난 2달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수 없었다.

       그녀가 잘못한 일 때문에 모두에게 폐를 끼칠 수 없었다.

         

       엘라는 도스빌 남작 쪽을 바라봤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맞받아치는 것은 상대가 바라는 것이었다.

         

       막 허리를 숙여 사과하려는 순간.

       어떤 무형의 힘이 그녀의 몸을 붙들었다.

         

       “뭐 하는 거야, 바보.”

         

       차가운 목소리.

       엘라는 무대 옆을 돌아봤다.

         

       객석에서는 안 보이는 막의 뒤편.

       적갈색 베레모를 쓴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야는 염동력을 써서 엘라의 몸을 묶었다.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저런 인간들한테 고개 숙이지 마. 넌 우리 서커스의 부단장이잖아.”

       “누가 숙이고 싶어서 숙이는 줄 알아? 애초에 토마토를 맞은 것도 내가…….”

       “너 토마토 안 맞았어. 내가 막아줬잖아.”

       “……뭐?”

         

       엘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분명 눈앞에 으깨진 토마토가 번져있고, 그 내용물의 냄새가 나는데도 그녀의 피부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토마토는 그녀의 눈 바로 앞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장님이 부탁하셨어. 네가 또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네 주변에 언제든 염동력을 펼칠 수 있는 준비를 해달라고.”

       “아…….”

         

       그때, 그녀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이 감쌌다.

         

       엘라는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파트너, 익살꾼이 미소 짓고 있었다.

         

       “많이 놀랐죠? 안심하세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가 맡는다는 말에 엘라는 안심이 되기는커녕 더 불안해졌다.

         

       “끼어들지 마. 이건 내가 한 실수라고.”

       “아랫사람의 실수를 책임지는 게 윗사람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원더스타인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엘라는 안심하지 않았다.

       늘 저런 얼굴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던 인간 아닌가.

         

       “어떻게 할 건데?”

       “팔다리를 다 자른 후, 입을 꿰매버릴 겁니다.”

       “당신!”

       “후후, 농담입니다! 문제없이 잘 처리할 테니 물러나 계세요.”

         

       그렇게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기를 잠시.

       엘라는 못 이기듯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무대 위에서는 서로를 믿기로 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친구, 익살꾼을 믿어보세요, 광대 아가씨.”

         

       무대 위에서는…….

       엘라는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마야가 손을 까딱이자 엘라의 몸을 구속하던 힘이 풀렸다.

       으깨진 토마토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녀의 얼굴이나 복장에는 한 점의 파편도 묻어있지 않았다.

         

       실컷 웃고 있던 노름패 무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여유롭게 히죽이던 도스빌 남작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평정심을 회복했다.

       상대가 수상한 재주를 부리긴 했지만, 아직 상황은 그가 상정한 범위 안에 있었다.

         

       개막식의 재판 건 이후로 그에게 오던 후원과 일거리가 모두 끊겼다.

       할부도 덜 갚은 마차를 압류당했고, 월세를 낼 돈도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기회가 바로 카바레에서 열리는 이 대회였다.

         

       그는 규칙을 파악하고 그 허점을 이용하는 일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마야가 탈출왕의 퍼즐 상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그 정보를 쥐고 가만히 기다렸다가 은막의 승리가 선언되는 순간 나서서 판을 뒤집어버렸다.

       덕분에 미리 약속해 두었던 노름패의 큰손들로부터 거액의 보수를 받았다.

         

       “과연 남작 나리십니다!”

       “낄낄, 혹시 다음에도 이런 계획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시죠.”

         

       2주 차의 대결에서는 초장부터 망고 극단의 매출이 파파엘 서커스를 크게 앞서는 바람에 그가 나설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3주 차는 해볼 만했다.

       도스빌 남작은 경우의 수에 따라 몇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 해두었다.

       마침 토요일 입장권에 당첨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시나리오였다.

       그에게 패배를 가져다준 원더스타인을 공개 석상에서 바보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서는 원더스타인을 보며 도스빌 남작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사과, 반박, 무시, 분노.

       어떤 변명을 해도 말꼬리를 붙잡고 수렁으로 끌고 갈 자신이 있었다.

         

       “방금 무대 위에 우리 부단장을 향해 토마토를 던지셨는데……,”

       “아이고, 단장님. 단순한 여흥입니다! 여흥! 서커스 보면 곡예사들도 관객들을 향해 비슷한 짓을 자주 하지 않습니까? 누가 다치기도 했나요?”

         

       도스빌 남작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그에 호응해 웃음을 터뜨렸다.

         

       손님 중 일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노름패 인간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커스 쪽에서도 정색하고 맞서기라도 한다면 공연을 즐기러 온 그들만 손해였다.

         

       원더스타인은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도스빌 남작님.”

         

       그는 바닥에 떨어진 토마토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에서 망가졌던 토마토가 다시 멀쩡한 상태로 복구되었다.

         

       “분명 ‘젖은 자리’에 서명하셨지요?”

         

       도스빌 남작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입장권 뒤에 있던 조항들을 떠올려봤다.

         

       <젖은 자리: 공연 중 의복이 더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는 눈치 하나는 비상한 인간이었다.

       원더스타인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아차렸다.

         

       “설마……?”

         

       원더스타인은 들고 있던 토마토를 있는 힘껏-3대 1000의 힘으로-도스빌 남작의 안면에 향해 날렸다.

         

       퍽.

       토마토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붉은 파편을 주변에 흩뿌렸다.

         

       “크억! 꺽! 꺽!”

         

       도스빌 남작은 토마토 일부가 기도에 들어간 듯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원더스타인은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관객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이건 분명 여흥이지요?”

         

       정적이 찾아든 회장.

       잠시 후, 사람들은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관객들은 싸움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쉬러 온 자리에서 불쾌한 욕설, 감정싸움을 보는 걸 싫어할 뿐이었다.

       이런 유쾌한 응징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원더스타인은 도스빌 남작 패거리를 보며 지긋지긋한 악플러들을 떠올렸다.

       작정하고 덤비는 인간들에게 사과는 또 하나의 좋은 빌미일 뿐이었다.

       그럴 바에 유쾌하게 받아치는 게 나았다.

         

       도스빌 남작은 목에 낀 토마토를 꺽꺽 뱉어내면서 이를 갈았다.

       불의의 일격을 맞기는 했지만, 그는 상황이 여전히 자기편이라 믿었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왔다면, 이쪽도 같은 논리로 받아치면 됐다.

       예정대로 공연을 개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이, 이봐! 토마토! 토마토를 줘!”

         

       그는 다급하게 건너편에서 음식 수레를 밀고 있는 랫맨들을 불렀다.

         

       여흥? 여흥이라고?

       그래. 내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는 거지?“

       좋아. 기다려라. 여흥을 들이부어 주지.

         

       도스빌 남작은 어서 토마토를 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랫맨들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찍찍! 토마토! 한 개에 5 지르코인이다!”

       “뭔 개 소리야! 생토마토는 공짜잖아!”

         

       최근 몇 년간 샤를로티아는 토마토 공급 과잉으로 난리였다.

       아무리 저렴한 식당 가도 후식으로 토마토를 먹으라고 상자째로 입구에 쌓아둘 정도였다.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괴물 서커스는 공연장 안에서 생토마토를 무료로 나눠줬다.

       어차피 그들은 음식을 팔아서 이윤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매점에서 의상 카드를 음식으로 바꿔주는 전략처럼 관객들의 배를 채워서 샛별 측의 요리를 못 먹게 하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랫맨은 토마토 하나에 5 지르코인을 불렀다.

       밖의 시세를 고려해 봤을 때, 몇십 배나 불려 받는 폭리나 다름없었다.

         

       랫맨은 손가락을 쳐들고 외쳤다.

         

       “방금! 가격이 바뀌었다!”

       “뭐?”

         

       도스빌 남작은 랫맨이 가리키는 방향을 봤다.

       그곳에는 마야가 띄운 환상으로 토마토 무료 공급을 중단하고 가격을 받는다는 글자가 띄어져 있었다.

         

       그것은 원더스타인이 지시한 것이었다.

       아무리 재밌는 농담이라도 그걸로 채팅창을 도배하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었다.

       1절만 못하는 인간들.

       거기다 정색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방송의 흐름을 끊어먹는 상황.

         

       그럴 때, 그는 대화창에 ‘기부금’ 설정을 걸었다.

       일정 이상 돈을 내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방송을 훼방 놓을 권리도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지금처럼.

         

       “아이고, 남작님? 토마토를 구매해 주시려고요?”

         

       원더스타인의 이죽거림에 도스빌 남작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분위기를 최대한 험악하게 가져가는 게 목적이지 그에게 토마토를 맞히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여기서 토마토를 사서 던지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스스로 광대처럼 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사람들은 불쾌하기는커녕 그와 원더스타인이 벌이는 쇼를 보며 웃을 것이다.

         

       도스빌 남작은 미소 짓고 있는 원더스타인을 노려봤다.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어 언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그의 특기였다.

       그런데 그는 몇 마디 행동과 말로 상황을 유쾌한 것으로 전환해 버렸다.

       

       그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분명 노리고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확신했다.

       상대가 자신만큼이나 욕하고 물어뜯고 비웃는 세상에서 살아온 인간이라는 것을.

         

       원더스타인은 도스빌 남작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사건이 나쁜 방향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는 이제 관객들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쇼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방송 생활을 하면서 얻은 또 하나의 경험을 간과했다.

       아무리 제한을 걸어놓아도 시청자들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삐약삐약이 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재밌게 봐주셨다니 기분 좋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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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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