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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1

        

         

       검은 공간.

       아주 깊고 포근한 공간 속에서 그녀의 정신이 서서히 가라앉고,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졌다가 중력이 손의 형상으로 그녀를 끌어들이며 무의식의 깊숙한 곳까지. 아주 깊숙하고 깊숙한 곳까지 그녀를 끌어들였다.

       빙산의 뿌리까지 떨어지듯 그녀의 기억은 떨어졌고, 그녀의 자아는 해수면의 아래에 깊이 숨겨져 있던 심연을 향해 내려왔다.

         

       검은 심연에는 비눗방울이 무지갯빛으로 빛나며 하늘로 올라가고, 크고 작은 방울들이 뭉쳐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세로로 곧은 듯 굽어진 듯 떨어지는 궤적에 따라 모양을 그려내는 비눗방울의 선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엘라가 토해내는 숨결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닿았을 때.

         

       엘라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은방울꽃이 가득한 들판.

         

       종 모양으로 늘어진 하얀 꽃이 들판을, 온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색색으로 빛나는 비눗방울에서 무지개색이 뿜어져 나오며 은방울꽃의 하얀 표면을 여러 빛으로 물들이고, 하늘에 떠 있는 환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며 땅을 밝혀주는 그 모습이 몽환적이었다.

       코를 찌르는 은방울꽃의 향기가 그녀의 온몸을 감싸주었고, 향기가 크게 몰아칠 때면 딸랑거리며 울고 싶다는 듯 종 모양의 꽃망울을 이리저리 흔들며 춤을 추는 꽃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 그 자체였다.

         

       “와아….”

         

       그렇게 엘라가 눈앞의 풍경에 취해있을 때, 그녀의 뒤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와악!”

       “히야악!”

         

       엘라의 뒤로 다가온 사람은 그녀를 작정하고 놀라게 하려는 듯 엄청난 성량으로 소리쳤고, 엘라는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제자리에서 튀어 오르며 몸을 앞으로 던졌다.

       다행히 다치기는커녕 침대에 몸을 던지기라도 한 듯 안락한 느낌을 받았으나 엘라는 그 포근함을 즐길 여유도 없이 재빨리 네발로 기듯이 앞으로 뛰쳐나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자신을 놀라게 한 사람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누군데 이런 장! 난…을?”

         

       하지만 엘라는 순간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그녀와 똑 닮은 사람이 서 있었다.

         

       “안뇽?”

         

       엘라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키, 똑같은 목소리.

       그녀가 거울로 볼 때와 똑 닮은 모습을 한 여자.

       하지만 엘라와 다른 커다란 가슴은 엘라와 그녀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엘라와 똑같은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음에도 가슴 때문에 체격이 족히 두 배는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언니예요~”

         

       화사하게 웃으며 말하는 충격적인 발언에 엘라는 다시 한번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똑같은 어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언니예용~”

       “아, 그. 네?”

         

       자신을 엘라의 언니라고 소개한 여자는 계속 얼을 타고 있는 엘라가 답답했는지 성큼성큼 걸어와 엘라의 뒤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엘라의 오금을 슬쩍 제 무릎으로 눌러서 그녀를 주저앉히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예요~”

       “아니, 저는. 저는 외동인…. 데요? 아얏!”

         

       그녀는 엘라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말했다.

         

       “언니라니까?”

         

       그 목소리는 화사하고 발랄했던 아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네! 알겠어요!”

         

       엘라가 압박에 못 이겨 수긍하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에 힘을 풀고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엘라는 자신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폭신함과 안락함에서 벗어나려는 듯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것이 불편했는지 그녀는 자신이 껴안고 있는 엘라의 머리를 배 쪽으로 내리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자신의 가슴을 얹었다.

       그리곤 엘라가 벗어날 수 없도록 단단하게 껴안았다.

         

       “이렇게 동생 안아보니까 언니가 너무 기분이 좋아요. 동생도 그렇지?”

       “네? 네.”

         

       엘라는 자신과 똑 닮은 모습을 한 가슴 괴물에게 영문도 모른 채 안기게 되자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의 두 눈이 이리저리 굴러갔고, 이윽고 그녀는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진짜로 누구신가요…?”

       “으응~? 언니예요~”

       “아니, 그 언니라는 것부터 이해가 안 가서 그런답니다….”

         

       그녀는 엘라의 질문에 무언가 고민하듯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으음. 그렇게 물어도. 저는 언니고, 동생과 함께하고 있었고. 그냥 그뿐인데요?”

       “네? 함께하고 있었다니요?”

         

       그녀는 오른손을 뻗어 엘라의 가슴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검지로 그녀의 가슴께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크기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이 언니는 동생의 여기에 있었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엘라는 몸을 비틀어서 벌떡 일어나더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귀신인가요?!”

         

       다짜고짜 자신을 언니라고 소개하는 사람.

       게다가 자신의 가슴팍에 머물렀고, 평소에도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엘라의 상식 안에서 그게 가능한 존재는 악령뿐이었다.

         

       “자, 잠깐. 여기 그럼 현실이 아니라 환상. 저 지금 악령에게 홀린 건가요? 악령에게 홀려서 지금 꿈을 헤매고 있, 히이익.”

         

       엘라는 패닉 상태가 된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러더니 꿈에서 깨기 위한 물건이 없는지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뭐가 잘못되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전 귀신이 아니라 언니예요? 그리고 여긴 꿈은 맞지만 홀린 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꿈속에 개입할 수 있는 게 악령 말고 뭐가 있다고!”

         

       뒷걸음질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엘라의 모습은 위협에 털을 세우며 소리를 지르는 고양이의 모습 같았다. 혹은 발로 바닥을 탕탕 치면서 자신이 화났음을 내색하는 토끼 같기도 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여자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번개같이 엘라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따악!

         

       “악!”

         

       손가락으로 튕긴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

       엘라는 뇌를 흔들어버릴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눈물을 찔끔 흘리며 자신의 언니를 자처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언니 말에 토 달지 마세요.”

       “네, 네?”

       “따라와요.”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더니, 엘라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엘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이 불안했는지 중간중간 빠져나가려 시도를 했으나, 그때마다 귀신같이 전조를 눈치챈 여자가 쓰읍-하는 소리와 함께 위협을 하거나 눈치를 주면서 그대로 그녀를 끌고 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영화관.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고무찰흙으로 만든 것 같은 화려한 색의 동글동글하고 말랑말랑한 재질의 벽돌로 만들어진 영화관이었다. 크기는 대략 3층 정도 되어 보였는데, 안에 들어갔다가 무너져서 자신의 몸을 덮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얼기설기 지어져 있었다.

         

       “아까까지는 그냥 들판이었는데…?”

         

       은방울꽃을 밟으며 대충 걸었을 뿐인데 갑자기 풍경이 확 바뀌며 영화관이 나타난다.

       심지어 보름달이 떠 있던 아까와는 다르게 하늘에는 네모난 모양의 태양이 떠 있었고, 심지어 태양을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아서 맨눈으로 계속 쳐다봐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또 대낮처럼 온 사방이 환하니,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꿈이라는 게 다 그래요. 꿈의 세계의 베테랑인 이 언니만 따라오면 신기한 거 많이 볼 수 있답니다.”

         

       여자는 엘라의 불안감을 해소해주기 위함인 듯 그녀를 자신의 몸으로 더 끌어당기고는, 그대로 영화관 안으로 걸어갔다.

         

       영화관 안은 밖의 어설픈 외관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현실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영상실의 문을 열자 이것 역시 꿈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필름.

       사진.

       책.

       대본.

       온갖 기록물들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들판이 나온 것이다.

         

       그녀는 그 기록물들의 산을 슬쩍 한 번 훑어보고는 문 옆의 책장에 말을 걸었다.

         

       “동생한테 설명 좀 하려고 하는 데 도움 될만한 거 없을까요?”

         

       그러자 책장이 말했다.

         

       “올바른 명령어가 아닙니다.”

       “아 참, 용용체! 동생한테 설명 좀 하려고 하는 데 도움 될만한 거 없을까용?”

       “검색을 시작합니다. 검색 중…. 검색 중…. 3건의 기록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책장은 기계 팔을 뻗어서 기록물의 산에서 필름 하나, 책 하나, 사진 하나를 집어서 여자에게 안겨주었다. 여자는 고맙다며 귀엽게 말하며 감사를 표하곤 기록물을 들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번 역시 영상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풍경이 보였다.

       아늑해 보이는 방의 풍경이 나온 것이다.

         

       암막 커튼이 쳐진 원룸에는 폭신해 보이는 베개와 인형이 잔뜩 있었고, 뒤편에 홈시어터 기계가 있었다. 홈시어터 기계는 일반적인 기계가 아닌,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렌즈가 있어야 할 위치에는 눈이 달려있었고, 좀이 쑤신다는 듯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뒤편에서는 지퍼인지 입인지 모를 것이 열고 닫히면서 무언가를 넣어달라는 듯 보채고 있었다.

         

       “이거 제가 아끼는 인형인데 특별히 양보해주는 거예요~”

         

       여자는 방 안으로 엘라를 밀어 넣고는 그녀의 품에 복슬복슬한 하얀 토끼 인형을 안겨주며 소파에 눕혔다.

         

       “어? 소파? 조금 전까진 없었….”

       “언니의 힘이에요.”

         

       더 묻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한 여자는 필름을 홈시어터의 지퍼 안쪽에 밀어 넣고는 엘라가 안고 있는 인형과 똑같은 생김새의 검은 토끼 인형을 안았다.

         

       그리고는 엘라의 바로 옆에 앉았다.

       아니, 앉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엘라 쪽에 몸을 한껏 기댔다.

         

       “아까 물어본 질문 이거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집중!”

         

       장난스러운 말투.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진지한 얼굴.

         

       엘라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어 홈시어터가 내보내는 영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영상은 마치 자신이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커다란 글자를 띄웠다.

         

       『 하얀 아기와 마녀의 구원 』

         

       “어라? 뱃속이 아니네요. 잘못 줬나?”

         

         

         

        * * *

         

         

         

       『 하얀 아기와 마녀의 구원 』

         

       [ 이봐! 잡아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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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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