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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1

        

         “아니아니아니, 잠깐만…!”

         

         솔직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 자판기를 일부러 딱 지정해서 심부름을 보낸 건 맞다.

         노골적으로 자리 좀 비켜 달라는 티를 팍팍 낸 것 또한 사실이고.

         그렇지만 진작 끝났을 신경전이 로잘린의 상담 요청으로 인해 지연된 게 결정적이었으니.

         

         여기서 굳이 과실비율을 따지자면… 얘기가 끝나자마자 돌아오라고 말을 까먹고 못 해준 내가 반, 아직까지도 승강장에서 밍기적댄 제로가 반?

         

         하여간 지금 중요한 건,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는 얼른 그를 불러들이는 게 급선무.

         

         – 시간 죽이기는 그만해도 되니까, 얼른 돌아와! 새 집으로 분실물 센터를 고른 게 아니라면! –

         

         – 허나… 바라신 음료는 못 사다 드려도, 이 고물이 잡아먹은 돈은 돌려받아야 맞다고 사료됩니다. 이건 아샤님에 대한 사기행각이나 다름없습니다. –

         

         아이고야… 육 대 사 정도로 과실비를 정정해야겠다.

         음료수 한 캔의 가격 이래봐야 200이나 300크레딧 언저리. 하지만 최근 돈이 줄줄 새어 나가기만 해서 제로에게도 근검절약을 굉장히 강조했더니, 사소한 지출도 간과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혹은… 그냥 내가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정말 못마땅했거나.

         

         – 됐고 괜찮으니까! 후딱 안 돌아오면 아예 너를 수취 거부할 줄 알아! –

         

         – …알겠습니다. –

         

         “으헙?!”

         

         풀썩! 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허공을 발길질하던 역무원이 승강장 바닥에 떨어졌다.

         처박혀있던 강철 손아귀가 뽑혀 나오자 바스라진 유리 조각과 쪼개진 자판기 파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리고 트로피처럼 쥐어진 데일리 브루웍스의 오렌지맛 주스도 함께 딸려 나왔고.

         

         …한동안은 주스를 마실 때마다 저 난장판이 떠오르게 생겼다.

         무슨 짓이니 요 녀석아!

         

         – 아스트라 익스프레스 A-185호, 네오 헤이븐 방면 발차를 위해 남동단 선로 연결. 기차 배치가 완료되는 대로 출발합니다. –

         

         쿠궁…….

         

         수 천, 수 만개의 금속 부품들이 연주하는 굉음을 전조로 삼아 기차가 진동한다.

         엔진에 시동이 걸린 게 아니었는데도 천천히 그 거체가 자신의 위상을 바꾸는데, 그 방식이 선로가 포함된 타일이 통째로 움직여 재조립되는 거라니.

         

         효율과 비효율, 현실과 플랫폼 게임 사이를 넘나드는 장엄한 광경은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이게 무슨 야반 도주도 아닐진대 유일무이한 파트너를 기차역에서 잃어버리는 드라마틱한 전개는 내 쪽에서 거절하겠다.

         

         – 발 헛디디지 마…? 그럼 진짜 대형사고야! –

         

         – ……. –

         

         대답은 없었으나 승강장을 질주하는 제로의 움직임이 한층 정교해지고, 더 빨라졌다.

         

         벌써 승강장과 기차 사이엔 그저 걷거나 뛰는 정도로는 메꿀 수 없는, 5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널찍한 공백이 생겨버렸지만 괜찮다.

         

         최저한의 가속도를 얻게 해줄 도움닫기는 충족했으니 이제 뛰어오르기만 하면 기차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오고도 남았을 것이고. …실제로도 아무런 방해가 없었다면 그렇게 되었으리라.

         

         “거기 드로이드! 정지! 기물 파손 혐의로 조사를…… 씨발, 멈출 기미가 안 보이는군.”

         

         드득! 드드득…!!

         

         어느새 달라붙은 경찰들이 발포를 개시했다.

         폭동 제압용 고무탄이 요란하게 제로가 발을 디디는 근처 지면을 두들기고 튕겨져 나간다. 그나마 실탄이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별 위안도 되지 못했다.

         

         설령 쏟아지는 게 고무탄이 아니라 물렁물렁한 토마토였다고 해도 기껏 얻은 추진력을 줄이고 자세를 요동치게 하는 건 똑같았으니까.

         

         도약 시기는 이미 진즉 놓쳤다.

         옆과 뒤로부터 얻어맞은 충격으로 인해 바닥을 긁으며 미끄러진 케어봇 몸체가 아슬아슬하게 승강장 끝자락에 걸쳤다.

         

         어, 음… 농담없이 진짜로 못 탔네……?

         

         “…야이?!”

         

         팡! 하고, 무심코 테이블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바닥이 제발 그만 좀 괴롭히라며 저릿저릿한 감각을 보내온다.

         

         이쪽의 기행에 고개를 든 아시프와 로잘린도 승강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드로이드를 확인하고.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싶었는지 동공이 수축했다.

         

         제로의 당황한 기색이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아까 전 검색대에서 만류한 대로 경찰과 마찰을 피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내 곁으로 돌아오는 걸 우선시해 교전도 불사할지.

         

         재빨리 판단을 마치고 망설이는 그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싶어도… 내가 교사도 아니고, 단체행동 도중 발생한 미아에 대한 대책이 재깍재깍 튀어나올 리가 없었다.

         

         “어? 어?! 잠깐만 기다려 봐! 기차 관제 시스템을 해킹하면 긴급 정차 정도는 금방….”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왜 그렇게 해결법이 극단적이야?!”

         

         본인 문제처럼 적극적으로 해결 방안을 생각해주는 건 고마웠지만, 실천에 옮겼다가는 온갖 부수적인 말썽이 따라올 게 분명한 길을 택하기는 좀… 로잘린 너, 현상수배자 주제에 너무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 아니니?

         

         하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제로보고 알아서 빠져나오라고 하는 것보다야 내가 직접 가서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그런데, 탑승 시기를 놓치면 환불도 안 해주는 애들이 단순 변심으로 인한 하차를 과연 순순히 허가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절단 사고가 일어나기 딱 좋은 선로 조정이 한창인데, 괜히 잘못 뛰어 내렸다가는… 어우.

         

         다른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발차가 살짝 지연되는 건 부디 참아줬으면 좋겠다.

         

         – 제로, 빨리! 기차 긴급 정차에 해당되는 사유가 뭐뭐 있어? –

         

         – 네트워크에 공개된 규정 상. 역 관제 센터의 지시, 선로 단선이나 외부 위협 등의 안전 유해 요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업 VIP의 사적 요청이 있습니다. –

         

         이론은 빠삭한 만큼, 곧바로 필요한 정보들이 간결하게 열거된다.

         그러니까 상부 지시가 있거나, 기차가 공격당하거나, 잘나신 분의 용무가 있으셔야 한다는 거네.

         

         앞에 것들은 알겠는데… 마지막은 뭘까, 선행된 경우와는 비슷하지도 않을 수준의 하찮은 사유인데 착각 아니야?

         

         – …때로는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사유일 수도 있다 보여집니다. –

         

         “하….”

         

         내가 당장 취해야 할 행동을 알게 되자, 한숨이 저절로 입술 틈새를 지나 공기 중으로 삐져나갔다.

         

         더 심한 소란이냐 공권력과의 자잘한 마찰이냐 고르라면 깊게 저울질할 것도 없이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는 처량한 빈털터리 해커가 잠시 동안의 쪽팔림과 수모를 감수하는 게 맞다. 가장 올바르고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래서 참았지. 아니었으면 그냥 다 때려 치웠다. 이씨.

         

         딸깍, 딸깍, 딸깍!!

         

         “아? 직원에게 항의한다고. 저 치들이 우리 사정을 헤아려 줄리가 없잖아요…? 용건이 급하면 지금이라도 저랑 같이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하는 게….”

         

         “…더 편한 방법이 있으니까.”

         

         승무원 호출 버튼을 무지성 연타하는 나를 본 로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시프는 행여나 내가 변심해서 그들을 밀고하려는 건지 확증하고자 눈을 번뜩였고.

         

         뭐, 엎친데 덮친 온갖 불행을 겪는 와중 다행히도 어색한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부드럽게 차단문이 열리고, 이내 만면의 미소를 띤 직원분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실해 오셨으니까.

         

         이제 명목상의, 이름만 올려놓은 이상한 인물이라 해도.

         접수대 역무원 씨의 말을 믿는다면 아마 VIP 중 하나로 등재되어 있을 내가 당당하게 정차를 요구하면 된다. 별 것 없다.

         

         그러면 어디 요구를… 부탁을…… 아니, 이걸 어떻게 얘기를 꺼내지?

         

         “저기….”

         

         막상 눈앞에 내 의견을 전달해줄 메신저를 두자 말문이 막히고 적절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갑질 따위는 할 줄 모르겠다는데, 자꾸만 상황이 이런 위치에 날 몰아넣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모든 서비스직 직원들의 비애를 녹여낸 것 같은 웃음을 띤 직원한테 내가 뭐라고 해야 해?

         저기 제가 이런 사람인데~ 잠시 기차 좀 멈춰 주시겠어요? 상상만으로도 뒷목이 뻣뻣해졌다.

         

         “그러니까….”

         

         우물쭈물, 그렇게 적당한 단어를 입안으로 굴려보는 행위가 끝나기도 전에. 눈치가 빠른 승무원이 먼저 화려한 인사를 건네 주셨다.

         

         “발렌타인 님, 아스트라 익스프레스에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나, 귀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요인이 있었다면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라는 당부를 받았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청산유수처럼 서비스 멘트가 흘러나온다.

         심지어 ‘거스르는 요인’을 말하는 순간에는 슬쩍 객실 내부를 훑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는 것 같지? 일반 객실에 타겠다고 고집부린 괴짜 손님에 대해 아는 게 맞겠지?

         

         “저기, 미안한데…. 음, 내 일행이랄까. 귀중품을 실수로 승강장에 놓고 왔는데 어떻게 좀 안 될까…요?”

         

         “…….”

         

         점점 멀어져가는 승강장. 정확히는 아직도 그 끝자락에서 경찰들과 노려보느라 바쁜 제로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가리켜 보였다.

         

         구체적인 상황을 풀어놓는 게 유리하다면 얼마든지 그리하였겠지만 어디까지나 ‘사적 요청’이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이런 조악한 설명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우습게도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격렬한 직각 인사.

         심각한 표정을 지은 승무원 씨의 허리가 돌연 90도로 꺾이고 머리가 지면을 향했다.

         

         흡사 모터를 달은 것처럼 현란하게 움직이던 혓바닥은 어디로 갔는지, 한차례 말을 더듬거린 그가 대답을 돌려주었다.

         

         “…곧바로. 쾌적한 여행이 되실 수 있도록 모든 관련 부서 및 역사에 전달하겠습니다. 잠시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어, 네.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나간 대답과는 별개로, 모든 관련 부서라는 게 도대체 뭔지 작은 의문이 생겼지만 금방 해결되었다.

         말 그대로 불만사항을 접수한 그가 내 사정을 중얼거리며 연락을 돌리자마자 상황이 격변하기 시작했으니까.

         

         쿠구궁….

         

        시계 태엽을 되감듯, 거창하기 그지없던 선로 조정 프로세스가 굉음과 함께 역재생된다.

         가련한 폭주 로봇을 포위한 채로 있던 경찰들이 웅성거리더니, 무장을 내리고 각자의 근무 구역으로 되돌아간다.

         금방이라도 발차가 이루어진다며 호들갑 떨던 안내 방송은 ‘사소한 결함’이 출발 직전 발견되었다며 기차를 승강장에 인접한 위치까지 되돌린다고 떠들어댄다.

         

         진짜 자리에 앉은 채로 좀 칭얼거렸다고 전부 해결된다고…? 이… 이게 권력?

         

         …아론에게서 다음 번 연락이 오면 추궁할거리가 늘었다.

         설마 파라다이스 데이터베이스에 대놓고 내 인적사항을 등록하지는 않았으리라 믿겠다.

         

         “후우… 그럼 발렌타인 님? 원래 준비되었던 일등석 객실로 다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맙지만 저는 괜찮….”

         

         식은땀을 훔친 승무원의 제안을 사양하려다가, 뒤지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두 사람의 시선을 눈치채 버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책임지고 골라야 할 결정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허나 그 선택지가 ‘이대로 남아서 처음부터 또 추궁당하기 대-vs 이 참에 모른 척 도망치기’라면 고민의 여지 따위는 없었으니.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멋쩍게 짐 가방을 챙기려고 했지만 벌써 승무원 씨가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등 뒤로. 객실 문을 닫히기 직전에.

         나는 겸연쩍게나마 구질구질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한 두 개쯤 감춘 비밀이 없다고는 안 했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땅콩…이 아니라 깡통 회항으로 논란.
    평소 그녀를 알던 지인들, 충격을 감추지 못해.

    휴재의 힘으로 정시 연재! 사실 이건 정시 연재라고 부를 수가 없네요. 네.

    항상 재밌게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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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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