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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2

    <92 – 노예계약서>

     

    “오크노디 신입생. 역시 자네의 그 안목은 의적이 되기 위해 타고난 것이 틀림없어.”

    “제가요??”

    “자네, 수제자가 되지 않겠나?”

    “수제자면 보통 대학원생이 되는 거죠?”

    “대학원생? 큰 공부를 마치고도 보다 깊은 심득을 연구한다는 의미에서 틀릴 것은 없구나.”

     

    이걸 실수했네.

    교수님 앞에서는 적당히 잘해야 하는데 너무 잘해서 눈도장이 찍혔어!

     

    “절대 싫어요!!”

     

    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 후환이 기다린다.

     

    “자네, 지금 어느 안전에서 큰 소리인가? 교수인 내가 호의를 베풀었는데 감히 거절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무례하게 굴기까지 해?”

     

    이런 대답이라도 돌아오면 그날부로 학점은 조졌다고 생각해야 하잖아.

     

    “저한테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소심한걸요.”

    “내숭도 어엿한 의적의 자질 중 하나지.”

    “전 게을러서 안 될 것 같아요. 듣는 강의도 많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은 나이인걸요!”

    “의적이 되거든 세상의 모든 보물이 네 친구가 될 수 있단다. 남의 보물을 훔쳐서 놀면 더욱 즐겁고. 내 수제자가 되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지.”

    “생각해볼게요.”

    “다음 강의시간까지 천천히 생각하거라.”

     

    애매한 미소를 지은 뒤에야 브론즈 교수의 소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능 경험치 오르는 효율은 미쳤지만 뭔가 좀 그래. 교수님이 이렇게 상냥할 리가 없는걸.’

     

    밥 한 끼로 가난한 대학생을 대학원생 노예로 만들려는 수작은 종종 들어봤다.

    분명 이것도 기능경험치로 나를 꼬시려는 사악한 수작임이 틀림없어!

    근데 다음 주에도 이런 개꿀이벤트를 주면 어쩌지?

    먹고 튈 수 있을까?

    덥썩 물려서 수제자-대학원생-이 되면?

    수많은 고민과 함께 연구동에서 멀어졌다.

     

     

    * *

     

     

    월화수목에 강의일정을 몰아넣은 부지런한 학생들은 금요일이 되어 자유를 만끽했다.

     

    “배고파.”

    “돌이라도 씹어 먹고 싶어.”

    “저기 저 풀, 뭔가 맛있어 생기지 않았어?”

     

    굶주릴 자유를.

    강의가 없으면 포인트를 받을 기회도 적다.

    학생들은 그리움에 사무쳤다.

     

    “저녁마다 먹던 커스터드 요리가 그리워.”

    “앞으론 배가 부르다고 만찬회에 결석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을 거야.”

    “덥고 무거운 페티코트가 그리워. 디너파티에서 사귄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

     

    물론 제국귀족들의 사치스러운 푸념이었다.

    지나가면서 그 푸념을 엿들은 변방출신 귀족들은 코웃음을 쳤다.

     

    “백날 저래보라고 하세요. 어디 포인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앗, 조심해! 거기 밑에 1학년들!”

    “네?”

    “개당 1만 포인트짜리 계약서를 떨어뜨렸는데 함부로 주우면 큰일 나!”

    “!!”

     

    정말로 하늘에서 포인트가 떨어졌다!

    나풀나풀 떨어지는 계약서를 덥썩 붙잡을 거라 생각했던 제국귀족들은 의외로 경계심 높은 태도를 보이며 두 손을 등 뒤로 돌렸다.

    머릿속이 꽃밭에 간 것처럼 사치스러운 과거나 푸념하고 있지만 그들도 일단은 귀족.

    귀족가의 엄격한 가정교육과 과외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몸이다.

    수상한 계약서는 함부로 건들지도 말라는 말은 누누이 듣고 자라왔다.

     

    ‘그래도 궁금한데.’

     

    아카디아는 호기심을 느꼈다.

    여름철만 되면 무더운 더위를 몰아내려고 군함에 타서 해적선을 포탄으로 펑펑 터뜨리는 시원한 경험을 하러 다니던 그녀다.

    그깟 계약서 좀 본다고 큰일이 날 것 같지도 않아서 떨어지는 계약서에 손을 뻗었다.

     

    “안돼요!”

    “오크노디?”

     

    지나가던 오크노디가 열심히 달려오더니 계약서를 쥐려던 손을 잡아당겼다.

     

    “디야.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여자아이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체신머리없이 함부로 남의 팔을 끌어안고 다니면 어떡하니.”

    “아카디아야말로 큰일 날 짓을 했잖아요. 그 계약서는 붙잡은 사람이 정해진 칸에 손도장을 찍는 강제지장날인의 마법이 걸려있다고요!”

    “뭐어?!”

     

    정신이 든 아카디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무심코 계약서를 붙잡은 학생이 엄지를 마구 찍고 있었다.

     

    “신입생들아, 조심해! 실수로 손가락에 묻히면 교내법 효력이 있는 인감도장을 떨어뜨렸어!”

     

    인감도장을 열 개나 손에 든 선배가 창밖으로 도장을 던졌다.

     

    “으아악, 내 몸이 막 혼자 움직여!”

    “누가 나좀 말려줘!”

    “이 자식, 왜 이렇게 힘이 세졌어? 야, 너도 와서 말려봐!”

    “가만히 있어. 너 이러다 수상한 계약서에 손도장 찍게 생겼다고!”

     

    지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달려가는 신입생들.

    불쌍한 하급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아카디아는 충격에 휩싸였다.

     

    “선배라는 작자들이 어쩜 저런 끔찍한 짓을!”

    “진정해요, 아카디아. 상대는 2학년이에요. 함부로 찾아갔다가 해코지만 당할 거예요.”

     

    계약서 잡고 손도장에 미친 친구들을 말리던 학생들이 옆에서 계약서 내용을 힐끔 엿보았다.

     

    ===

    납품계약서

    [수령자 – 벨로카시오](이하 “갑”이라 칭함)와 [공급자 – 계약자](이하 “을”이라 칭함)는 “을”이 공급하는 물자를 “갑”이 수령하고 “을”이 포인트를 지불받는 것을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거래할 것을 합의한다.

     

    제 1조(거래내역)

    품명 – 단가

    등꽃돼지 등꽃 – 1개당 1p

    체실리 풀 – 20g당 1p

    모래포대 – 20kg당 1p

    ….

    …….

    2학년 중간고사 기출문제집 – 1과목 당 10p

    넘버링 입학자 소개 – 1명 당 10p

     

    제 2조(품질검사)

    ○“갑”은 “을”의 공급물자의 품질이 기준미달이라 판단할 시, 포인트 지급을 거부할 수 있다.

    ○“을”은 “갑”이 정한 기일 내에 물자공급에 실패할 시, 위약금 2배를 지불하거나 벌칙을 이행한다.

    ○검사내역은 다음과 같다. “물자의 훼손상태”, “물자의 신선도”, “이물질을 첨가한 중량조작”, “마법적 위장유무”

     

    제 3조(지급기한)

    “갑”은 “을”이 공급한 물자의 값을 일주일 내로 마법시계로 지급해야 한다.

    “갑”이 지급기한을 지키지 못할 시, 계약은 즉시 강제로 해지된다.

     

    제 4조(비용의 부담)

    납품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을”의 부담으로 한다.

    검사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갑”의 부담으로 한다.

    ….

    ……

     

    제 12조(분쟁해결)

    본 계약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분쟁은 학생회의 중재로써 최종 해결한다.

    ===

     

    “무슨 계약서가 이렇게 본격적이야?”

    “아니 근데 포인트를 줘?”

    “이거 은근 개꿀 아닌가? 방법은 조금 기분 나쁘고 꺼림칙하지만 공부를 못해도 포인트를 벌 방법이 생기는 거잖아.”

    “모래만 50kg 날라도 5p 한 끼 식사를 버는데?”

    “중량운동도 되고 좋지 않을까?”

     

    가난한 하급반 학생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제일 먼저 계약서를 만졌던 학생이 엄지에 인장을 묻히고 손도장을 찍었다.

    이에 질세라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자기가 줍겠다고 싸워댔다.

     

    “디. 저 계약서는 저도 탐나는데요.”

    “속지 마요. 물건의 정가도 모르면서 덜컥 계약을 맺으면 어떡해요?”

    “그게 아니라요. 저 계약서를 구하면 2학년이 될 때 필요한 재료를 미리 알아둘 수 있잖아요. 아예 해당물자를 독점하면 부르는 게 값이니까… 후후후.”

     

    아, 아카디아가 무서워!

    오크노디가 겁먹은 표정을 짓자 아카디아는 괜히 미움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졌다.

     

    “앗.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짓지 말아요, 디. 조금 가문의 일을 돕던 경험이 떠올랐을 뿐이랍니다. 저는 평소대로 디의 착하고 상냥한 언니라고요?”

     

    아쉽지만 계약서는 포기하자.

    오크노디를 보내고 나중에 서귀연의 하급반 합격자들을 통해서 입수하면 되지 않겠는가.

    상급반에 합격한 서부귀족연합 여학생은 자신뿐이지만 하급반에 합격한 학생의 수는 꽤 많다.

     

     

    * *

     

     

    [노예계약을 저지하라(아카디아) 이벤트를 달성했습니다.]

    [아카디아가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맘 때 일어날 초반부 랜덤이벤트가 신경 쓰여서 한 번 들르기를 잘했다.

    하마터면 아카디아가 노예가 될 뻔했어!

     

    저 계약서, 언뜻 보기에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밥벌이 겸 일감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순 사기계약서다.

    2학년 벨로카시오.

    981기보다 한 기수 위인 980기의 질서악 성향 캐릭터로 자기가 만든 계약서의 규칙에 따라 학생들을 마구 착취하는 못된 놈이다.

    학생들에게 받은 물자를 두세 배의 값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팔면서 정작 이에 불만을 품고 반항을 하기 시작하면 무서운 현실을 알려준다.

     

    ○“을”은 “갑”이 정한 기일 내에 물자공급에 실패할 시, 위약금 2배를 지불하거나 벌칙을 이행한다.

     

    벨로카시오는 자기 심기를 거스른 공급자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공급물량과 짧은 기한을 지정한다.

    거부권은 1년에 3회.

    공급요청은 매주 1회 실행할 수 있다.

    3주가 지나면 4주째에는 반드시 계약을 이행해야만 하는 악마의 계약.

    중량 별 물자공급기한에 따라 100kg 이상의 물자는 일주일 내에 공급해야 한다.

    처음에는 ‘모래’ 때문에 그렇겠거니 착각하던 학생들도 레어아이템 100kg 이상으로 도배된 리스트를 보면 충격에 빠진다.

     

    -이런 거 절대로 구할 수 없잖아!

    -제발 한 번만 봐줘!

     

    어렵게 물자를 구해도 배상에 대한 항목이 없는 이상 학생회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다음 주부터 몰아닥칠 과제의 폭풍을 견디기도 힘들 1학년들이 짬을 내어가며 학생회에 탄원서를 내고 분쟁관리일정을 잡고 절차를 밟는 것이 가능할까?

    보통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다.

    그 전에 여러 차례 소소한 납품실패로 *발설금지*, *비밀엄수의무*, *추가위약금* 따위가 줄줄이 붙으면 법알못 학생들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다.

    귀족 학생들도 된통 잘못 걸렸네, 하고 진저리를 낼 판에 못 배운 평민 학생들은?

    진짜 말그대로 노예로 전락한다.

    막대한 배상금을 없던 일로 하는 대신, 일정기한동안 무보수로 요구하는 물자를 전부 공급하고 숙식만 간신히 보장받는 공급노예가 된다.

     

    ‘저것도 나중엔 혼쭐을 내줘야겠지만 아직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내버려둘 때인가?’

     

    적당히 근처 해수욕장에 파묻힌 스탯석이나 찾아서 모래나 파다가 돌아오는데, 기숙사 근처에서 아카디아와 지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했다.

     

    “꼬마숙녀께서 모래성을 만들고 오셨나보군요.”

    “어머나. 디는 어쩜 저리 귀여울까요?”

    “두 분은 뭐하세요?”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답니다. 오크노디양에게는 아직 어려운 이야기일 겁니다.”

    “선배들의 사업모델을 보고 저희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수익모델이 떠올랐거든요.”

     

    …선배들보다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가짜깃발로 대소동을 일으킨 지젤이 이번에는 무슨 난리를 벌이려는 걸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적응력이 뛰어난 신입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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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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