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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2

       파스텔은 날아오는 박쥐 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은빛 검격이 박쥐를 휩쓸었다.

         

       하압-!

         

       하압-!

         

       나쁜 괴수 무리를 단번에 처단하고 멋진 자세를 잡았다. 입에서 효과음이 나왔다.

         

       “삐슁~.”

         

       흡혈박쥐를 잡을 줄 아는 파스텔!

         

       짐가방을 멜 줄 아는 앨시어가 뒤에서 멍하게 바라봤다. 가방 줄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앗! 앨시어! 그러다 떨어지겠어!”

       “아 응.”

         

       은발 소녀가 빵빵한 짐가방들을 고쳐 멨다.

         

       “나쁜 역할 분담은 아니네요.”

         

       양피지에 깃펜을 움직이던 멜리사가 살포시 웃었다.

         

       “사람마다 부여받는 책임과 책무가 있는 거죠. 저는 지도를 그리고, 파스텔은 괴수를 잡고, 벨라몬트는 짐가방을 메는 거예요.”

         

       멜리사는 마지막 말을 할 때쯤 과하게 생기는 웃음기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웠다.

         

       “응응!”

         

       파스텔은 팔을 번쩍 들었다.

         

       “난 이 역할 분담에 만족해!”

         

       뭔가 어깨도 홀가분하고 마음도 만족스러운 게 매우 좋아!

         

       항상 이랬으면 좋겠어!

         

       앨시어가 얼떨떨해하며 말없이 번갈아 봤다. 공작 영애로 태어나 한 번도 당하지 않았던 대우에 생경함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멜리사는 그 시선에 양심의 가책을 살짝 느끼는지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이 통로는 넓은 공간을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창을 쓰는 당신이 나서면 너무 혼잡해져요. 파스텔도 그런 의미로 가방을 맡긴 거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설마 별 의미 없이 가방을 넘겼겠어요.”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허억.

         

       그렇게 깊은 뜻이……?

         

       분홍 눈동자가 굴러갔다.

         

       듣고 보니 그랬을 거 같다.

         

       “응! 맞아! 내 생각이 그거였어!”

         

       파스텔도 모르던 파스텔의 생각을 멜리사는 알아주는구나!

         

       역시 내 절친이야!

         

       앨시어가 물어왔다.

         

       “그러면 넓은 공간이 나오면 가방을 다시 분배하는 거야?”

         

       파스텔은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눈을 굴리다가 대뜸 몸을 숙여 지면에 귀를 댔다. 검지가 입술을 눌렀다.

         

       “다들 쉬잇.”

         

       정신을 집중하고 유적의 인기척을 느껴봤다. 발소리와 땅울림이 대지를 타고 전달됐다. 마석을 섭취하며 인간을 초월한 청각은 광범위한 영역을 감지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줬다.

         

       “응! 아무도 없네! 떠들어도 괜찮아!”

         

       이쯤 이동했는데도 인기척이 없다니. 확실히 유적이 거대하긴 한가 봐.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카락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속도를 올려야 할 거 같아. 생각보다도 더 유적이 넓으니 일단 주요 영역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야영지까지 확보하려면 밤이 되기 전까진 매우 빠듯하겠어.”

       “그래 보여요. 이미 기사단이 소탕한 영역인데도 워낙 넓어 걷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드네요.”

         

       멜리사가 고심했다.

         

       “유적 공략이 지지부진했던 건 교단의 간섭 때문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론 유적이 너무 넓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당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요.”

       “아니야, 내 생각도 그래. 기사단에 대한 평가가 조금 박했던 거 같아. 사적 감정으로 과한 평가를 했어.”

         

       무능무능 기사단에서 무능 기사단으로 정정할 수 있는 정도.

         

       멜리사와 의견을 교환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앨시어가 멍하게 뒤따랐다.

         

       “넓은 공간이 나오면 가방을 다시 분배하는 거 맞지……?”

       “어서 이동하자!”

         

       파스텔은 씩씩하게 외쳤다.

         

       “그러죠.”

         

       멜리사도 긍정하자 이동속도가 빨라졌다.

         

       파스텔이 앞장서 박쥐를 잡으며 인기척을 살피고 멜리사가 마석 횃불을 관찰해 기사단의 행보를 추론하는 등 바쁜 걸음을 이어갔다.

         

       “여기 뭔가 적혀 있어.”

         

       혼자 할 일 없이 멍하게 통로를 구경하던 앨시어가 어둑한 벽면을 가리켰다. 음각된 기괴한 언어가 적혀 있었다.

         

       “오잉.”

         

       처음 보는 언어.

         

       “신성어네요.”

         

       멜리사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신성어?”

       “네, 신성어요.”

         

       헤에.

         

       그게 뭐야.

         

       멜리사가 앨시어를 돌아봤다. 본인보다 공부 못하는 애를 배려하는 태도였다.

         

       “구약 시대까지 신전에서 쓰였던 고대 언어예요. 공백기 이후 신약 시대 때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며 대중에게 너무 어려운 신성어는 신전에서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거든요.”

       “그런 상식은 나도 알고 있어.”

       “벨라몬트 당신이라면 혹시 모를까 봐요.”

       “귀족으로서 모르면 바보지.”

         

       바보 파스텔은 조용히 있었다.

         

       사실 알고 있음.

         

       방금 들었으니까.

         

       “해석해 볼게요.”

         

       멜리사가 신성어를 들여다봤다. 한참을 고심하더니 살짝 민망해하며 돌아봤다.

         

       “모르겠네요. 부연 설명 없이 한 문장만 새겨진 걸 보아선 자주 쓰이는 관용어일 가능성이 높지만요. 파스텔, 해석할 줄 아나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파스텔은 바보 같은 표정이 됐다.

         

       “모르세요……?”

         

       아무리 똑똑한 필기 수석이라도 너무 옛날에나 쓰여 이젠 실용성도 없는 언어를 공부할 리는 없나 하는 눈빛이었다.

         

       허엇.

         

       학년 최고 지성의 자존심이……!

         

       “당연히 할 줄 알아!”

         

       파스텔은 일단 외치고 봤다.

         

       그리고 마검을 두드렸다.

         

       악마님! 악마님! 오래된 악마님!

         

       너무 구식이라 배우지도 않은 신진 세대를 위해 조상님 세대로서 지혜를 빌려주세요!

         

       『예전엔 상식이었을 문장조차 귀족 계급이 해석하지 못하다니. 신전이 많이 퇴보하긴 했군.』

         

       악마님은 쪼끔 아니 꽤 윗세대 같은 발언을 하며 혀를 찼다. 그 예전이 몇백 년 전이라는 사실만 빼면 타당한 감상이었다.

         

       『해석해 줄 테니 말해줘라.』

         

       파스텔은 똑똑한 표정이 됐다. 미간을 좁히며 엄청나게 고도의 논리와 추론을 반복하는 양 문장을 들여다봤다.

         

       “이것은…….”

         

       손가락이 음각된 언어를 문질렀다. 뭔가 있어 보이는 목소리 톤으로 해석문을 중얼거렸다.

         

       “여기 이슬로 목마름을 해소하라.”

         

       그런가.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가 살포시 웃었다.

         

       “어렵지 않게 해석하는군요. 역시 당신이에요. 어떤 의미의 관용어인가요?”

         

       파스텔은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휴식처가 있다는 얘기야.”

         

       바로 해석해 낸 똑똑한 나.

         

       끄덕끄덕.

         

       앨시어가 감탄했다.

         

       “평소의 바보 같은 모습은 정말 연기가 맞구나.”

         

       파스텔은 악마의 설명을 들으며 벽면을 더듬었다. 어딘가를 누르자 벽이 밀려나며 넉넉한 내부 공간이 드러났다.

         

       중심부의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자연 샘물을 만들고 있었다. 식수원까지 존재하는 휴식 공간이었다.

         

       푸푸.

         

       똑똑한 나, 유능.

         

       “이곳을 거점 삼아 조사하자.”

         

       파스텔은 기사단의 성과 지표를 살펴보며 보게 됐던 내용을 떠올렸다.

         

       “이번 공략에 기사단이 신전에 협력을 요청하지 않았으니 신성어 가능자는 없을 거 같아. 우리가 이런 구역을 활용하면 들키지 않고 숨어 조사할 수 있겠지.”

         

       유적 자체에 목적이 있을 교단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우연히 마주치는 건 바라던 바다.

         

       아니 오히려 유적에 적힌 각종 신성어를 수색하는 게 교단을 찾는 빠른 길 같다.

         

       휴식 공간에 짐가방을 풀고 거점을 마련했다. 어차피 며칠간 야영할 각오도 하고 준비한 짐이라 부족한 건 없었다.

         

       파스텔은 후추통에 남은 마석 가루를 살펴봤다. 넉넉하다.

         

       “나머지는 밥 먹고 할까?”

       “식사 준비는 제가 할게요.”

         

       멜리사가 본인의 짐가방에서 작은 냄비를 꺼냈다.

         

       “우왕!”

         

       파스텔은 눈이 반짝였다.

         

       “멜리사의 요리 시간인 거야?!”

       “야영 음식은 자주 해봐서요.”

         

       자신 있는 미소가 돌아왔다.

         

       허억.

         

       자칭타칭 귀족 아가씨의 품위 있는 요리는 얼마나 맛있을까!

         

       멜리사를 졸졸 따라갔다. 멜리사는 냄비로 샘물을 뜨더니 마석 가루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에 냄비를 올려놓자 물이 천천히 끓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고픈가 봐요? 거의 다 됐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잉, 벌써?

         

       그럴 리가 없는데.

         

       요리의 스페셜리스트인 악마님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요리해 주셨는데.

         

       냄비에 건조된 가루가 부어졌다. 옥수수 수프 향기가 훅 올라왔다. 끓던 물은 어느새 노란색으로 변했다. 수프가 보글보글 끓었다.

         

       육포를 꺼내지더니 가위질 됐다. 툭툭 잘린 육포가 냄비에 퐁당퐁당 떨어졌다. 노란 수프에 검붉은 육포가 떠다녔다.

         

       “다 됐어요.”

         

       멜리사가 여러 컵에 수프를 나눠 부었다. 컵이 다정하게 건네졌다.

         

       “호호 불어 드세요.”

         

       파스텔은 받아 든 수프를 내려봤다.

         

       육포 수프.

         

       씹으면 질겅일 거 같은 육포가 둥둥 떠다녔다.

         

       품위 있는 요리는……?

         

       악마님 덕분에 언제나 음식만큼은 호강하던 파스텔은 혼란스러워졌다.

         

       으에.

         

       뭔가 격렬히 반찬 투정을 하고 싶어진다. 악마님이었다면 바로 했겠지만 멜리사기 때문에 눈치부터 봤다.

         

       모든 짐가방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앨시어가 다가왔다. 별말 없이 컵을 건네받았다.

         

       파스텔은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앨시어 너 눈치 없이 얘기하는 거 잘하잖아. 지금이 네 재능을 선보일 때야! 어서어서!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앨시어는 별말 없이 수프를 마셨다. 육포가 씹히며 은발 소녀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어째서?!

         

       그러고 보면 얘네 군벌 집안이지!

         

       으아아!

         

       이럴 때만 쿵짝이 맞지 말아줘어!

         

       흐윽.

         

       악마님이었다면 없는 재료라도 구해와서 무언가 만들어주셨을 텐데.

         

       이럴 거면 마검 말고 사람 폼으로 동행할 걸 그랬어. 요리도 해주시고 불침번도 해주시고 짐가방도 들어주셨을 텐데.

         

       『흠? 뭔가 소름 돋는 감각이군. 어린 크래프트, 설마 지금 하극상 같은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하극상이 아니라 그냥 평소의 악마님을 상상했어요오.

         

       멜리사가 의문스러워했다.

         

       “왜 그러세요? 양이 많나요? 덜어드릴까요?”

       “아니야아니야. 나 많이 먹어. 그냥, 뜨거워 보여서.”

       “뜨겁긴 할 거예요. 호호 불어 드세요.”

         

       금발 소녀가 컵을 들었다. 그리곤 시범을 보이듯이 입을 오므렸다.

         

       “이렇게…….”

         

       입바람이 수프를 건드렸다.

         

       “호호~.”

         

       파스텔은 덩달아 따라 했다.

         

       “호호~.”

       “네 그렇게요.”

         

       멜리사가 살며시 웃었다.

         

       “그러면 입안을 데지 않을 거예요.”

         

       헤에.

         

       어머니께 배운 건가.

         

       멜리사도 참.

         

       파스텔은 마석 가루를 조금 뿌린 다음 육포 수프를 홀짝였다. 따끈한 감촉이 몸을 채웠다.

         

       오잉.

         

       생각보다 맛있음.

         

       “한 잔 더 줘!”

       “다 드시고서 드릴게요.”

       “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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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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