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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2

     

    “좋아한다니. 누가 누굴.”

     

    아셀라의 의문에 타냐가 슴슴히 대답했다.

     

    “황녀님께서 선생님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안 좋아해.”

     

    “황녀님만 모르십니다.”

     

    “아니… 하, 하지만.”

     

    아셀라가 말을 더듬었다.

     

    흔치 않은 광경에 뒤에서 대기하던 시녀장과 호위기사들이 흠칫 놀랐다.

     

    “좋아하냐 싫어하냐로 따지면 난 막스도 좋아해.”

     

    아셀라가 타냐의 의견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루시도. 타냐 공도 좋아하는 편이고.”

     

    “성은이 망극합니다.”

     

    “하지만 공자는 안 좋아한다니까!”

     

    “제 표현이 나빴군요.”

     

    타냐가 차를 홀짝이며 정정했다.

     

    “황녀님께서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계십…”

     

    “그만!”

     

    아셀라가 쿵,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 건은 타냐 공이 잘못 판단했어.”

     

    “황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리는 아셀라.

     

    잠깐의 침묵 후에 그녀가 반박했다.

     

    “그럴 리가 없어. 타냐 공이 얘기하는 호감이란 건 그런 거지? 이성 간에 느끼는 애정이라든가.”

     

    “정확합니다.”

     

    “난 지금까지 남성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

     

    “그럼 첫사랑이시군요.”

     

    “뭐어?”

     

    얼이 빠진 아셀라에게 타냐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애정이라 하면 여태 말씀하신 ‘이상 현상’을 대부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과 정치적인 혼약자라고 표현되는 게 마음에 안 드셨다고 하셨지요.”

     

    “응.”

     

    “선생님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진짜 혼약자가 되고 싶으셔서 그 단어가 계속 걸리신 겁니다.”

     

    “하, 반대겠지. 공자가 더 얄미워져서 혼약자 관계인 자체가 싫은 거야.”

     

    “싫으세요?”

     

    “싫…”

     

    즉답하려던 아셀라였지만 어째선지 저절로 입이 막혀버렸다.

     

    왠지 입 밖으로 내선 안 될 것만 같다.

     

    “고, 공자가 자꾸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해서 그래. 점점 내 명령을 어기고 여기저기 쏘다녀. 그러다 죽을 뻔했잖아.”

     

    “좋아하는 만큼 기대감도 높아졌기 때문에 신경 쓰시게 된 것입니다.”

     

    “그럼 잘 때는? 지금까지는 편히 잘 수 있었는데 갑자기 불편해진 건 공자가 미워져서 그런 거 아니야?”

     

    “더욱 의식하게 되셔서 그렇습니다. 심장이 뛰고 조마조마한 기분이라고 하셨죠. 호감 있는 남자와 여자가 한 침대에 들어가면 그렇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럴 수가.”

     

    충격받은 아셀라가 또르르 눈동자를 굴려 떨어트렸다.

     

    “타냐 공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항상 부하들의 연애상담을 해줬습니다. 기사단의 사기 관리도 단장의 업무기에. 우락부락한 사내놈들이 여자의 마음을 뭘 알겠습니까.”

     

    “타냐 공 말대로라면 나도 모르고 있었던 거잖아. 내 감각이 쟤들이랑 동급이라고?”

     

    아셀라가 자기 등 뒤에 서 있던 호위기사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웬델이라면 한 번에 다섯 다리까지 걸쳐본 남자입니다. 황녀님보다 나을걸요.”

     

    “뭐어?!”

     

    아셀라가 자신의 호위기사를 돌아보며 재릿 노려보았다.

     

    웬델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며 시선을 피했다. 구조 요청이었다.

     

    “하.”

     

    두통이 몰려온 아셀라가 이마를 쓰다듬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그녀로서는 그다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북부에서는 다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좀 돌려 표현할 수도 있잖아.”

     

    “직설적인 편이죠. 냄새 나는 자에게 냄새 난다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아니…”

     

    “사랑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들면 남자든 여자든 상대를 허리째로 잡아 들어 올려서 결혼하자고 외치면 그만이죠.”

     

    “…진짜 그래?”

     

    “아뇨. 기사와 모험가만 그럽니다.”

     

    “후우.”

     

    혹시나 진짜로 라스가 자기를 들쳐멜까 불안해졌던 아셀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역시 요즘 들어 사고의 방향이 이상해졌다. 아셀라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했다.

     

    내가 사랑해?

     

    라스를?

     

    그 실실대는 경박한 남자를?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되어 냉철하게 만인을 다스려야 할 이 내가?

     

     

    ‘…사랑, 까지는 모르겠지만.’

     

    아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타냐의 말은 어디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그렇구나.’

     

    아셀라는 어느 정도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이 라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유능한 우두머리는 부하의 조언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부정해선 안 된다.

     

     

    그리고 타냐가 옳든 틀리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든 현 상황과 큰 관계는 없었다.

     

    ‘…라스는 내 거야.’

     

    충실한 신하가 됐든, 명목뿐인 남편이 되든, 단순한 애착인형으로 쓰든.

     

    이미 라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니까.

     

    빠져나갈 틈새는 어디에도 없다.

     

    감정이 혼란스러워 그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가둬놓고 천천히 생각해보면 될 뿐인 일이었다.

     

     

    결론은 내린 아셀라는 평소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타냐 공.”

     

    “예.”

     

    “황족의 정신을 흐트러트린 방해죄로 사흘 구금하겠어.”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선생님을 지키지 못한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 그 건도 포함해서.”

     

    “감사합니다.”

     

    “끌고 가.”

     

    아셀라가 손을 내저었다.

     

    타냐가 남은 케이크를 한입에 집어넣고는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양쪽에 기사 두 명이 붙어 지하감옥으로 호송역을 자처했다.

     

    한 명은 아까 지목당한 웬델이었다.

     

    그가 타냐에게 귓속말로 소근댔다.

     

    “대표로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지켜보면서 답답했거든요.”

     

    반대쪽의 기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을 위한 충언은 때를 가리지 않는 법이지. 타냐가 어깨를 으쓱였다.

     

     

     

    ***

     

     

     

    “선생님, 목휘궁에 납품할 약제가 전량 제작됐습니다. 검수 부탁드립니다.”

     

    “시, 신입 치유사분들 교육 교재 제작 건인데요… 여기 내용 보충이 필요해서….”

     

    “고트베르크 선생, 내달 일반인 진료 로테이션일세. 결재 부탁하겠네.”

     

    “야만족 토벌전 썰 좀 풀어주시면 안 됩니까? 황녀 전하랑 뭔가 있으셨다면서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요!”

     

    마지막 녀석은 꿀밤을 먹여줬다.

     

    바빠 죽겠는데 썰은 무슨 썰이야.

     

     

    내의원은 오늘도 정신없이 돌아간다.

     

    내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에 도장을 찍은 후 가운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료 내려가자. 어디, 오늘은 팔켄하인 반이군요?”

     

    “그렇소이다. 준비는 됐소. 따르겠소이다.”

     

    팔켄하인이 이미 치유사들을 열 맞춰 세워놓고 있었다. 오랜 경험으로 체계를 잡아주니 도움이 된다.

     

    토벌전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때도 내의원에서 내 업무를 잘 해줬다.

     

    보통 일반인 진료를 나오는 주치의는 없지만 나는 스킬 랭크를 올리기 위해서 꾸준히 나가고 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자원봉사도 다녀온다.

     

    이제 월광궁 치유사도 서른 명이 넘었기에, 네 개 반으로 구성해서 로테이션을 돌리며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먼저 걸음을 옮기면 내 뒤로 차트를 든 부하 치유사들이 우르르 따라온다.

     

    “앗, 월광궁 지나간다.”

    “야만족 토벌이 끝나고 귀환했나 보네.”

    “폐하께서 훈장도 내리신다던데.”

    “요즘 제일 잘 나간단 말이야.”

    “다 주치의 선생님이 잘나신 덕이지.”

    “그에 비하면 우리 파벌은… 부럽구만.”

     

    월광궁 파벌은 모두 흰 가운을 입고 있기에 내의원 어디에서도 눈에 띄는 편이다.

     

    “오늘 특이 환자는?”

     

    “여기 있소. 알버타 자작의 장남인데 바실리스크 꼬리에 쏘였다는군. 어젯밤에 급히 찾아왔기에 응급 처방만 해둔 상태요.”

     

    “알버타 자작령이면 거리가 꽤 있군요.”

     

    “진료를 받으러 사흘 동안 실려 왔소.”

     

    “먼저 보죠.”

     

    복도를 걸어 일반인 진료 구역으로 넘어간다.

     

    여러 파벌이 오늘도 분주하게 몰려든 환자들을 치유하고 있다.

     

    “윽, 고트베르크!”

     

    나를 본 알베리치가 식겁하며 이를 갈았다.

    자기 파벌 치유사들과 함께 진료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한답니까?”

     

    “우리 파벌을 벤치마킹했다 하외다. 주치의가 직접 일반인 진료를 보면 주군을 광고하는 효과가 있잖소이까?”

     

    팔켄하인이 내게 설명해줬다. 헤이케가 명령한 건 아닌 듯한데,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직접 내려왔나 보다.

     

    기다리는 환자가 있기에 알베리치는 신경 끄고 진료부터 보기로 했다.

     

    “바실리스크는 신체 조직을 응고시키는 독을 가지고 있어. 사흘이나 지나서 괴사가 시작됐군. 다행히 환자가 건강한 편이라 바로 처치하면 환부도 살릴 수 있겠어.”

     

    응고해서 떡진 피를 뽑고 해독제를 주사, 신경에 다른 이상이 없는지 검사한다.

     

    환자가 상당히 고통스러워하긴 했어도 치료에는 성공했다.

     

    “으윽, 감사합니다. 이대로 발을 잃는 줄만 알았습니다.”

     

    “바실리스크는 강철 정도 재질의 장화만 신어도 못 뚫으니 습지 지나다닐 때 조심하시고. 3일 후에 경과 봅시다.”

     

    처방 후에 일반 진료로 넘어간다.

     

    해독제만 있었어도 금방 치료했을 것을, 여기까지 사흘이나 걸려 오느라 상태가 악화된 케이스였다.

     

    지방 치유사의 실력이 부족하면 환자는 제도 내의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일반 제국민에게는 적절한 교통수단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종종 자원봉사를 나가는 것도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중태인 환자는 내의원까지 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앰뷸런스가 있으면 좋겠는데.’

     

    하다못해 제도 인근까지만이라도 운행이 가능할 정도로 시스템을 구축하면 좋겠다.

     

    황궁만 해도 상당히 넓다 보니 내의원에서 먼 장소에서 다쳐버리면 업어 오는 데만 3, 40분은 소모하게 된다.

     

    ‘응급환자 수송용 구급 마차를 구비해보자.’

     

    나중에 아셀라에게 기획서를 제출하고 결재를 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업무를 끝내고 오후 진찰을 위해 걸음을 옮기려니 웬걸.

     

    “공자.”

     

    어느새 아셀라가 호위기사들과 함께 복도 앞에 서 있었다.

     

    시찰이라도 나온 것일까. 나와 파벌 치유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녀님.”

     

    “일하는 중이야?”

     

    아뇨, 부하들과 새로 맞춘 신형 가운을 자랑하려고 내의원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중입니다.

     

    그래, 내가 여기서 일하지 뭐 하겠냐.

     

    “전하의 은덕 덕에 오늘도 저희 치유사들이 업무에 집중하여 월광궁의 명성을 널리 퍼뜨리고 있습니다.”

     

    슥, 내가 고개를 들었다.

     

    “내의원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공자.”

     

    아셀라가 나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두 달 후에 있을 공자의 성인식 날, 우리의 약혼식도 정식으로 올리도록 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목각님 후원 감사해요! 타냐가 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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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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