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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2

       아나이스가 탄 항공편이 도착한 것은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집사는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까지 직접 나갔다.

         

       몸체 길이가 100m가 넘는 최신식 비행선.

       대형 프로펠러 4개가 비행선의 좌우에 앞뒤로 장착되어 추진력을 담당했고, 소형 프로펠러 수십 개는 기낭을 지탱하는 프레임에 장착되어 선체의 회전을 돕고 균형을 잡는 용도로 쓰였다.

         

       비행선은 수평 조정 없이 비스듬한 사선을 그리며 천천히 내려와 착륙 위치에 단숨에 멈춰 섰다.

       기장의 노련한 솜씨가 엿보였다.

         

       입국장의 로비에 있던 아이들은 비행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크게 탄성을 내질렀다.

       집사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들을 보니 증기선을 구경하러 날마다 강에 나갔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아이라면 누구나 저런 거대한 기계장치에 대한 동경심이 있기 마련이었다.

         

       곤돌라의 문이 열렸다.

       고급스러운 블라우스에 정장 조끼와 치마를 빼입은 날씬한 여인이 비행선에서 내렸다.

       볼록한 형태에 짧은 챙을 가진 모자 아래로 긴 녹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나이스는 비행선을 타면 늘 일등석을 탔기에 제일 먼저 내릴 수 있었다.

       그녀의 경호원인 총사 포르슈 경과 그녀를 수행하는 비서와 시녀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나이스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블라냐크 공항은 운하 북부 도시들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루즈에서는 마차로 3, 4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아마 오후 늦게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 마지막 회차 공연은 볼 수 있겠네. 그래서 얘기 좀 해봐. 대회는 어떻게 됐어? 단장님은 어때?”

         

       이번 대결의 주제를 들었을 때, 아나이스는 원더스타인이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상업에 대한 것이라면 그녀가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의상 몇 가지와 갑옷을 부탁했을 뿐, 다른 요청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과 이윤을 남기는 건 다른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집사에게서 지난 1주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부단장 엘라가 무리하다 쓰러진 이야기, 원더스타인이 광대 분장하고 무대에 오른 이야기, 그들이 내세운 초상화 상품과 대결의 진행 상황까지.

         

       그녀는 한 명의 상인으로서 감탄했다.

       원더스타인이 지닌 상재(商材)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내건 상품도 그가 내세운 판매 방식도 모두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됐다.

         

       그건 경험이나 노련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의 심리와 돈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천재적인 감각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발상이었다.

         

       아나이스는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다.

       그녀가 반한 남자가 그녀가 몸담은 분야에서도 재능을 보이는 것은 조금, 아니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루즈에 도착한 아나이스는 호텔에 짐을 풀기도 전에 카바레로 향했다.

       그녀는 선물을 품에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지막 회차가 끝나고 그에게 달려가 축하한다며 선물을 직접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반가운 걸음으로 홀에 들어선 아나이스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 이게 뭐죠?”

         

       그녀는 순간적으로 괴물들이 난동을 피워서 관객들을 다 때려죽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홀의 바닥과 벽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코를 찌르는 시큼한 풀 냄새에 그녀는 곧 그것이 토마토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연에 관련된 토마토에 대한 관용구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단장님이 혹시 쇼를 크게 망친 것일까?

       그래서 관객들이 토마토를 던져 항의한 것일까?

         

       그렇게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연습실 쪽에서 원더스타인이 걸어 나왔다.

         

       “자작님 오셨군요.”

       “단장님……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원더스타인은 지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그는 오늘 1회차 공연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도스빌 남작이 건달들을 끌고 나타난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토마토로 반격을 했던 것까지.

         

       “그럼 도스빌 남작이 이렇게 만든 건가요?”

         

       그녀의 손에 든 선물 상자가 구겨졌다.

       그녀의 눈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버러지 같은 작자.

       그를 아예 재기불능이 될 정도로 망가뜨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더스타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아, 그건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피해자죠.”

       “……그게 무슨 소리죠?”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던 사건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엉뚱하게도 판도라 마술쇼의 단장인 마술사 루이니였다.

         

       그는 도스빌 남작에게 굴욕을 당한 이후로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커스에 대해 일 푼도 모르는 새파란 녀석에게 논리로 말려든 것이 너무 분했다.

         

       그래서 원더스타인이 멋지게 그에게 반격했을 때, 가장 먼저 박장대소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신난 얼굴로 랫맨에게 토마토를 하나 사서는 도스빌 남작에게 던졌다.

         

       엉거주춤 일어나던 남작이 다시 토마토를 맞고 엉덩방아를 꽈당 찍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는 그에게 루이니는 뻔뻔하게 이렇게 대꾸했다.

         

       “젖은 자리 조항에 ‘관객이 유발한 수분’도 포함되어 있지 않소?”

         

       원래는 오줌을 지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가벼운 농담 섞인 주의 문구였다.

       그런데 그는 뻔뻔하게도 자신에게도 토마토를 던질 권리가 있고, 너는 맞아도 불평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망고 극단의 단장인 솔이 맞장구쳤다.

       그도 도스빌 남작이 아니꼬웠던 참이었다.

       그는 이 안에서는 누구든 토마토를 던질 권리가 있고, 누구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신이 나서 말했다.

         

       그게 실수였다.

         

       “파파엘 서커스단의 단장인 홉스 씨는 자신을 꺾고 별을 얻었으면서도 다른 도시로 안 떠나고 이곳에 얼쩡거리는 솔 씨가 계속 눈에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솔 씨가 그 말을 하자마자 홉스 씨가 토마토를 솔 씨에게 던졌습니다. 그가 떠든 말을 따라 하면서요. 솔 씨는 반격한답시고 토마토를 던졌는데 엉뚱한 사람이 맞았고…….”

         

       원더스타인은 뒷말을 생략했다.

       아나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이미 토마토를 뒤집어쓴 사람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어차피 오늘 안에 다 써야 하는 코인이었다. 아무런 부담 없이 토마토를 사서 다른 사람에게 신나게 던졌을 것이다.

         

       여길 벗어나야겠다고 도망치던 관객도 한 번 토마토를 맞고 나면 180도 태세가 돌변했다. 자신도 한 명을 맞추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토마토를 사서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들 홀 안에 빨간색이 아닌 부분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신나게 날뛰었다.

         

       원더스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후의 공연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카바레 전 직원이 달려들어서 지금 청소했는데, 후후, 이거 4주 차에 대결하는 팀에도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건 입장료로 수입을 내는 시험이 아니잖아요. 공연은 그만두더라도 장사에 집중하면…….”

         

       그녀의 말에 원더스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와중에 마야 양의 스케치북이 토마토에 맞고 말았습니다.”

       “스케치북이라면……?”

       “저희 일러스트 외주……아니, 초상화 판매의 핵심을 담당하던 마도구입니다. 아무리 마도구라도 본질이 종이라서 그런지 푹 젖으니까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군요.”

         

       원더스타인은 연습실 방향을 바라봤다.

       마야는 그녀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스케치북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성과는 없었다.

         

       아나이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수익으로 어떻게 안 되나요? 토마토를 그렇게 비싼 값에 팔았으면 수익이 크게 났을 텐데요?”

       “초상화 작업이 불가능해져서 사용하지 못한 카드는 모두 환불 처리 해줬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 손해가 토마토를 판 수익과 맞먹더군요. 후후, 지금 단원들 모두가 매점 앞으로 몰려가서 음식과 술을 팔고 있지만, 그 격차가 좁혀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결국…….”

         

       원더스타인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나이스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짐작이 갔다.

         

       패배.

       그는 그것을 말하려다 만 것이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희망이 있었다.

       그녀는 품에 안은 선물 상자를 붙잡았다.

         

       “이번에 전후 처리 문제 때문에 토마토 온실에 다녀왔어요.”

       “토마토요?”

         

       원더스타인은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또 토마토.

       토마토 온실은 또 뭐란 말인가.

         

       “토마토는 원래 이 대륙에 없던 작물이에요.”

         

       현재 컬럼비아 대륙에 사는 인간들 대부분은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의 후손이었다.

       신천지를 찾아 건너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이 떠나온 땅에 대한 미련과 향수는 여전히 그들의 의식 속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왕녀 샤를로트의 존재가 특별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민자 중 유일한 왕족이었다.

       귀족 출신들을 주축으로 나라가 세워졌을 때, 그녀가 여왕으로 추대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혈통이 가지는 상징성 덕분이었다.

         

       토마토는 그녀가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현재 널리 재배되는 토마토는 덩굴에서 자랐지만, 그녀가 가져온 최초의 토마토는 나무에서 열렸다.

         

       황금 토마토.

       모든 토마토의 조상이 되는 종이었다.

       현재 사람들이 먹는 토마토는 샤를로트가 가져온 한 그루의 토마토 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땅에 심자 자라난 덩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한 그루의 토마토 나무가 보존되어있는 곳이 바로 궁전 정원 북서쪽에 있는 ‘토마토 온실’이에요. 여왕님이 실종된 이후로 섭정의 관저가 그곳에 설치되었죠. 여왕님을 대신해 한 그루의 토마토 나무를 지키겠다는 의미로요. 물론 실제로 나무의 관리는 정원사가 맡고 있지만요.”

         

       그녀는 품에서 선물 상자를 내밀어 보였다.

         

       “저는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 황금 토마토에서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감칠맛이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토마토 나무에서 열리는 황금 토마토는 일 년에 30개가 안 돼요. 섭정은 그것을 중요한 외교적, 정치적 우호 메시지가 필요할 때마다 선물로 보내죠. 사람들은 농담삼아 그것이 섭정이 가진 가장 큰 권력이라고 말하곤 해요. 그러나 모든 열매를 섭정이 결정하는 건 아니에요. 최초에 수확하는 딱 하나의 열매는 나무를 돌보는 정원사의 소유죠.”

         

       아나이스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황금을 연상시키는 은은한 노란빛의 토마토 하나가 비단에 감싸져 있었다.

         

       “후훗, 이번에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해 섭정 관저에 들렀을 때, 토마토 온실의 정원사분이 제게 선물하셨어요. 유서 깊은 호텔의 정원을 정치적 논리에 따라 내버려 뒀던 것을 장인으로서 사죄드린다고. 그분이 저에게 이것을 선물로 주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그 호텔에 묵었던 다른 손님에게도 죄송하다고.”

         

       원더스타인은 이제 그녀가 왜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하는지 눈치챘다.

       그녀는 상자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걸 상품으로 내걸면 어떨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숫눈 님, 5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답례로 여기 토마토를 남깁니다! 🍅

    -[비공개]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다시 감사의 말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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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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