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2

       “이건 불공평해!”

       

       “애처럼 굴지 말고 결과에 승복하세요 베니.”

       

       “으읏…!”

       

       으드득.

       

       뾰족뾰족한 이빨을 소리나게 가는 베니. 그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었으나, 눈가에 맺힌 눈물 덕에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베니의 등 뒤에서 서서 메고 있는 배낭의 입구를 열었다.

       

       “어디 보자…아, 여깄네요.”

       

       찾는 것은 미궁에 들어오기 전에 사둔 보급형 랜턴. 특이하게도 허리띠처럼 길게 늘려 허리에 감는 디자인인데, 격한 움직임에 부서지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졌다.

       

       2층에서만 나오는 소프트 크리스탈이라는 건데…쉽게 말해 부드러운 유리로 가공할 수 있는 물건이라나?

       

       원리는 나도 모른다. 모르니까 판타지지.

       

       신기한 마음에 허리에 두른 랜턴을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전원을 켰다.

       

       딱-!

       

       스위치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화악 빛나는 랜턴. 덕분에 어두컴컴했던 주변 풍경이 조금 멀리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싼 도로가 흙. 무겁게 가라앉아 퀴퀴한 공기. 그리고 이렇다 할 소리 하나 없는 지독한 정적.

       

       그렇다. 1층의 배경이 대수림이었다면, 2층의 배경은 지하 땅굴이다.

       

       오랜 시간 무수히 많은 땅굴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거대한 미로. 그것이 2층의 컨셉이다. 물론, 공략이 완료되어 지도가 있는 미로지만.

       

       “히야. 직접 보니까 장난 아니네요. 여길 옛날 사람들은 맨몸으로 공략했다는 거죠? 전 못할 것 같네요.”

       

       “응. 아직도 2층의 사망자는 대부분 몬스터가 아니라, 길을 잃어 아사하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요나도 조심해. 1층과는 길 찾기 난이도가 다를 테니까.”

       

       “명심할게요.”

       

       길 찾기 스킬이 있으니 적어도 지도가 있는 곳에서는 미아가 될 걱정은 없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음에도 길 잃을까 걱정하게 될 정도로 눈앞의 풍경은 엄청났다.

       

       랜턴의 빛이 닿는 거리는 대략 반경 1.5m쯤. 그 너머로는 점차 어두워지더니, 이내 아득한 미지로 변화한다.

       

       무저갱을 들여다본 것 같은 오싹함을 떨쳐내며 밝게 웃어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확인할까요?”

       

       “흥! 운이 좋아 2층에 왔다지만, 이제 겨우 한 달 된 신입이 길 찾기를 제대로 할 수나 있겠어?”

       

       담담하게 내 뒤에 서는 리디아와 달리,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대는 베니.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허! 짐꾼이 불평하기 있어요? 됐으니까 구경이나 하세요.”

       

       베니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꼬우면 사람 말 좀 믿고 이상한 내기를 걸지 말았어야지.

       

       키득이며 넓은 방처럼 되어있는 안전지대의 중심, 오도카니 세워져 있는 비석을 훑어보았다.

       

       “17번 구역이네요. 적당한 외곽이라 딱 좋네요. 15번을 거쳐 26번에서 귀환할 생각인데 이견 있나요?”

       

       “응. 괜찮아 보여. 찬성.”

       

       “리디아는 몰라도 난 아냣! 분명 외곽을 따라 빙 도는 루트니 지금의 네 수준에 맞는 적당한 몬스터만 나오겠지. 하지만 그렇게 외곽을 돌기 위해 몇 번의 갈림길을 거쳐야 하는지 알아?!”

       

       “어, 음. 9번이네요.”

       

       “그래! 꽤 많지?! 9번 전부 한 번도 헷갈리지 않고 바른길만 고를 수 있겠어? 어차피 우리가 있으니 몬스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니 좀 깊게 들어가더라도 한 길 따라 쭉 가다가 13번 구역쯤에서 귀환하는 게 어때?”

       

       지도에 손을 짚으며 지금 있는 곳에서 직진으로만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을 가리키는 베니.

       

       최종적으로는 2층의 중입까지 향하지만 베니의 말대로 전력이 부족해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흠. 결국 제 실력을 못 믿겠다는 거잖아요? 이거 완전 건방진 짐꾼이네요!”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너의 뭘 보고 믿겠어!”

       

       “뭐어. 얼굴 몇 번 안 본 저를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정말로 괜찮으니까 한번 믿어보세요. 여차하면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면 그만이잖아요? 베니는 마법사니 기억력 좋을 거 아니에요. 베니가 있다면 어렵지 않겠죠.”

       

       “…걱정해 준 거 아니거든? 하지만 뭐어. 유사시에 내 말에 따르겠다고 하면 이번만은 봐줄게.”

       

       자기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로 으스대는 베니. 언젠가 생각하는 거지만 저 딱 달라붙는 드레스 마녀 복장은 사기나 다름없다.

       

       절대 야할 수 없는 몸매가 야해 보이기 시작했잖아.

       

       스윽 시선을 돌리고는 쪼그려 앉아 바닥에 손을 댔다.

       

       비정기적으로 내부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미궁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길을 찾는 기본 요령은 간단하다.

       

       변하지 않는 요소…즉, 안전지대와 신의 유해의 위치를 기준 삼는 것. 1층에서는 대수림 어디에서나 보이던 세계수가 그러했었지.

       

       그리고 2층의 기준점이 되는 신의 유해는 대지의 심장이다.

       

       지도에는 큼직한 심장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고, 실제로 거기까지 가보면 거대한 바위 심장이 박동하고 있으리라.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2층에 잠든 신은 대지의 신.

       

       다른 원소 계열 신들은 전쟁 도중에 사망했지만, 대지의 신만큼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원소 계열 신의 흔적이 짙게 남은 곳에서 태어나는 정령 중, 땅 속성은 그 숫자가 가장 적다.

       

       다른 신들은 그 사체에서 정령이 무더기로 태어났지만, 대지의 신은 지상에서 죽지 않고 미궁에 묻혔으니까.

       

       가만히 바닥에 손을 대고 있자니 희미하게 느껴지는 진동. 정말 여기까지 대지의 신의 심장 박동이 들리는 것은 아니다.

       

       대수림 전체가 세계수의 권역이듯, 이 땅굴 자체가 대지의 신의 영역이었기에 어디에서나 그 주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뿐이지.

       

       심장의 위치를 기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찾았어요. 이쪽이에요.”

       

       커다란 방 형태의 안전지대. 이곳과 이어진 3개의 통로 중 한쪽으로 향하자, 베니가 뒤에서 불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리디아. 식량은 충분하지?”

       

       “비상식량은 항상 1년 치씩 들고 다녀.”

       

       “그건 너무 많은 거 아냐?”

       

       “하지만 베니는 안 들고 다니잖아. 나누면 반년이야.”

       

       “아앗…미안.”

       

       “그리고 요나랑 나누면 4개월 치.”

       

       “앞으로는 나도 좀 준비하고 다닐게….”

       

       “아냐. 됐어. 어차피 새 비상식이 1년마다 나오니까 딱 좋아.”

       

       “…내 미안함 돌려줘!”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따라오는 리디아와 베니. 그런 둘의 모습에 키득이며 길게 이어진 통로를 나아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투둑.

       

       우리 일행에게서 나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음도 없던 공간에서 들려오는 작은 위화감.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적이에요.”

       

       “나도 알아. …너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베니.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툭 튀어나온 눈동자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자, 좋다고 깜빡거린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제가 감각이 좀 예민한 편이거든요.”

       

       소리를 먹는 발걸음 권능을 얻으며 예민해졌다. 내 존재를 숨기려거든, 내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선명히 인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발끝으로 땅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한껏 날을 세운 정신. 그 끄트머리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오른쪽 벽인가.

       

       소리를 먹는 발걸음을 이용해 존재감을 극한으로 억눌렀다.

       

       어느덧 내 숨소리는 고요해졌고, 걸음마다 들려오는 발소리는 옅어졌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녹아들듯, 혹은 이 세상을 몸에 둘러 나 자신을 숨기는 듯한 감각.

       

       이에 당황한 걸까. 저 멀리에서 들려오던 숨소리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다. 2층의 몬스터는 땅굴에서 살다 보니, 대부분 시야가 퇴화하고, 다른 감각을 발전시킨 녀석들이니까.

       

       아마 저 몬스터 입장에서는 갑자기 적 하나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겠지.

       

       “무, 무슨!”

       

       뒤에서 소리 죽여 감탄하는 베니도 비슷하게 느낀 것 같지만.

       

       리디아의 말에 따르면 오러를 이용해 감지하거나, 계속 보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라도 놓칠 정도의 은신이라 했지.

       

       베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마법사인 만큼 감각의 예리함 자체는 리디아보다 떨어질 테니 더 크게 놀라려나?

       

       속으로 키득이며 조심스레 한발 한발 몬스터를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있는 것은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품에는 곡괭이를 소중하게 품고 있는 이족보행 괴물.

       

       키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커 보인다. 다만 늑대와 도마뱀을 반쯤 섞은 것 같은 외모와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길게 뻗은 가시 투성이 꼬리는 작은 덩치임에도 위협적인 몬스터라는 것을 주장하는 듯했다.

       

       코볼트인가.

       

       1층의 고블린처럼 2층의 최약체 몬스터다. 첫 상대로는 딱 좋네.

       

       조용히 미소를 지은 채, 이쪽을 향해 귀를 기울인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회색으로 변질된 눈동자. 아마 시각이 퇴화한 흔적이겠지.

       

       내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코볼트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코볼?”

       

       바람을 가르는 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유니콘 단검이 뿜어내는 빛 때문일까. 뒤늦게 내 존재를 인식한 코볼트.

       

       과연. 확실히 고블린 따위보단 강해 보이네. 이미 늦었지만.

       

       서걱.

       

       푸딩이라도 잘라대듯, 부드럽게 코볼트의 비늘 섞인 목을 통과한 유니콘 단검.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풀썩 쓰러지고, 머리는 바닥을 구르다 내 발치에서 멈춘다.

       

       잠시 고민하다 일단 녀석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달랑달랑 들고 일행의 곁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베니의 앞이지만.

       

       “베니! 선물이에요!”

       

       “넌 무슨 바퀴벌레 물어오는 고양이 같은 거야?! 필요없어!”

       

       너무해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피뚝뚝 코볼트 헤드
    다음화 보기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Gacha – Civilization’s Ultimate Game. Spin now for a shot at fortune. Spending that doesn’t disrupt your lifestyle? That’s virtually free-to-play. Keep spinning until you strike gold – success is guaranteed. … … Today, yet again, I’m at the gacha wheel. “Did I get a 5-star?!”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