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팔자가 순탄치 않을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꼬여 있을 줄이야.
공수나 점지로 얽힌 인연들은 죄다 고생길이 훤한듯했다.
제일 처음 인연을 맺은 오크새끼마저 이럴 정도니….
이 정도면 하나하나 다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파라몬 영감님은 대충 알겠고…”
휙 –
고개를 돌려 째려보니 움찔하는 클로셀 영감님.
이 영감이 제법 수상하다.
잘 보면, 다들 사연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영감 만큼은 그런게 없다는 것.
“영감님, 사실대로 말하세요.”
“뭘 말인가?”
“인생에 큰 걸림돌이나, 아픈 사연같은 거 없어요?”
“허허, 그런 거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사연없는 사람 없고, 힘들지 않은 사람 없으니.
그렇다면 다음으로 의심이 가는 대상은 이놈이다.
“야, 대가리.”
– ….?
“아주 살판이 났다?”
– …..
대가리 이놈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대가리는 신당의 머슴 같은 존재다.
손님이 오면 알려주고, 촛불을 살피다가 문제가 있으면 나에게 달려오는 역할.
무려 신당에 출입이 가능한 잡귀라는 것이다.
“요즘 장승도 우습지?”
– ….
당장 다른 잡귀들만 봐도 장승들의 눈치를 보느라 조금 떨어져 있는 신세.
하지만 이놈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이곳에 음기가 충만해지면서 제법 강한 잡귀가 된 상태였다.
이곳의 레이스 같은 형태가 아니라 동양식 잡신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
“슬슬 갈길 가야 할 때 되지 않았어?”
움찔.
“준비를 시작해도 될 거 같은데?”
움찔.
한마디를 할때마다 몸을 떠는 대가리.
“이승에 미련이 많이 남았나 봐?”
–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겁이 없던 잡귀였다.
무려 나에게 와서 장난질을 치던 잡귀니까.
클로셀 영감님이 흥미로운 듯 허공을 주시했다.
“지금 대화하는 영혼이 분신사바를 도와 준다는 대가리 경인가 보군.”
“경이라고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잡귀예요.”
“신비로운 힘이더군. 물리적인 현상이라니. 그러고 보니 자네도 비슷한 걸 할 줄 알지 않는가?”
확실히 나도 비슷한 걸 할 수 있기는 했다.
다만.
“그렇긴 한데, 굉장히 효율이 안 좋아요.”
“음?”
“골드주고 장작하나 사는 겪이랄까…”
“소비가 심한 모양이로군.”
차라리 그 힘을 다른 데다 쓰면 훨씬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다.
원래의 용도가 아닌 곁가지로 따라온 힘이라는 것이다.
개발해 볼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도하고.
“어쨌든, 이번에도 워프마법진으로 가나요?”
내가 물음을 건네는 순간 영감님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온 대답은.
“자네 원하는 대로 하게.”
“….?”
“그게 맞네.”
“그래도 되는 건가요? 급한일 아닌가요?”
무려 네크로맨서와 연관된 일이다.
스케일이 굉장히 큰일이라는 것.
내 마음대로 하기에는 굉장히 찝찝했다.
파라몬 영감이 억울한 듯 말했다.
“솔직히 말일세, 머리쥐어 짜서 전략을 세우면 뭣하겠나?”
“….?”
“자네가 방울 몇 번 흔들면 다 풀리는데.”
“……?”
영감님이 저렇게 억울해 하는 건 처음 본다.
지난 전투때 고생을 많이 하기는 한 것 같았다.
영감님에게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단에 간 자네가 걱정되어 힘을 썼더니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났네. 심지어는 성녀를 업고 나타났지.”
생각 해보니, 뭔가를 보냈던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이단으로 몰리고 있을 때의 일이었으려나?
“이번 전투때도 말일세. 밤을 새며 준비한 전략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전략은 잘 먹히지 않았던가?
영감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피해가 더 커졌을 것이다.
“피하래서 피했더니 마법진이 있었고, 불이 난다 하더니 엘프를 부르지 않나, 심지어는 비도 내리게 하더군. 교황과 성녀를 통째로 데리고 올 것도 예상못했네.”
“그….저기….”
영감님이 알게 모르게 불만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뿐인가? 자네 말대로 했더니 온 세상이 우리를 도우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더군.”
가끔 집안에 무속인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런 말을 하고는 한다.
하라는 대로 했더니 순풍에 돛을 편 배 처럼 순항한다고.
그런데 이 영감….
살짝 삐진 것 같았다.
이런걸로 불만을 표시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정성 들여 준비한 연설보다 자네의 방울 소리가 더 사기를 높였네.”
이거 때문이었네.
“오랜만에 한 출정식이었거늘…”
맞네.
옆에서 클로셀 영감이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파라몬 영감님을 살짝 변호해주며.
“라몬이 이리말해도, 자네의 도움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테이블위의 샐러드를 한 조각 입에 넣은 영감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네. 자네가 하는 선택이 가장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지.”
“아니, 그래도 크게보면 대륙의 운명이 걸린 일 아닌가요?”
“자네가 그 운명을 보는 사람 아닌가?”
그렇기도 했다.
사실 틀린 말이 없었다.
길흉화복을 점치는게 내 일 중에 하나였으니까.
“말 나온 김에 한번 보는 게 어떤가?”
테이블에 있는 방울을 들어 올리니 드잔트의 눈이 내 손을 따라왔다.
딸랑 –
“….?”
딸랑 –
“어라?”
반안살.
말위에 앉아 있는 장군을 뜻하는 살이다.
보통은 출세의 의미를 가지고 높은 관직에 앉는 다는 것을 뜻하기도한다.
그런데 이것이 주변에서 가득 느껴졌다.
“영감님들 혹시 출세 하셨어요? 뭐 한 자리 받는다거나…”
“우리는 이미 한 자리 하고 내려온 사람들이네. 또 받기는 싫군.”
“나한테도 끼어 있는데…”
나야 뭐 얼마 전에 작위를 수여 받을뻔했으니 그게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딸랑 –
이번에는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드잔트의 옆으로 보였다.
“물건 같은데…”
“나 말이냐?”
“칼이 됐다가, 부채도 됐다가…부정칼 같기도 하고, 입칼 같기도하고…”
형태가 모호했다.
정확하게는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다는 말.
그리고 이것은.
“내꺼네.”
“음?”
딸랑 –
정신이 흐르고 흘러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느껴지는 물 비린내.
쏴아아 –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딸랑 –
“집안에 뱀이 들어 버렸네.”
작은 뱀도 아니었다.
굵고 긴 뱀이 또아리를 틀고 바다를 보고 있었다.
구렁이었다.
“업구렁이 같기도하고…”
창고의 쥐를 잡아먹는 구렁이.
업구렁이는 집안에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고 알려져 있다.
구렁이가 바다를 향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딸랑 –
머릿속으로 깃발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흰천과 나무로 만든 깃발.
용왕의 몸을 상징하는 용왕기였다.
그런데 이 깃발의 군데군데가 갉아 먹혀 있었다.
쥐가 파먹은 듯이.
“끄응…”
그리고 바닷가 근처에서 보이는 파란 불.
나는 한 번 더 방울을 흔드려다 그만두고 팔을 내렸다.
“왜 그러는가?”
“일단, 별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런 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요즘 신령님이 좀 바쁘세요.”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알루어드까지 말이다.
“내년 쯤에 아이들이 많이 태어날 거예요.”
“혹시…?”
“제가 모시는 신령님이 그쪽 계통의 신이신데, 이것 때문에 요즘 좀 바쁘신 모양이라…”
알루어드는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
“도대체 크리스님께서 모시는 신이 어떤 분이시길래…?”
“다음에 알려줄게.”
“하무!”
“할머니의 형상을 하고 계신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루나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알루어드에게 설명하듯이.
“하무, 루나. 아우으…!”
“맞아, 맞아. 루나도 할머니가 점지해 주셨지?”
“꺄륵.”
알루어드가 입을 떠억 벌리고 나와 루나를 번갈아 보았다.
“루나님께선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원래 아기들은 처음엔 이런 것도 기억해.”
클로셀 영감의 흥미로운 감탄사와 알루어드의 경악.
“호오…”
“저희는 왜 그걸 몰랐던 거죠?”
“물어보지를 않으니까 말을 안 하는 거지.”
아기들에게는 신비한구석이 있다.
민간에 전해지는 것은 엄마 배에서 나올 때 문을 열고 나왔냐, 닫고 나왔냐 하는 것.
열고 나왔다고 하면 다음 아이가 생긴다는 속설도 있다.
성녀로 태어난 루나가 다른 아이들보다 영특한 것도 당연한 일.
유난히 잘 기억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령님이 조금 바쁘셔서 공수가 희미하네요.”
“그,그렇군.”
“자네는 알 수록 신비한 사람일세.”
말이 끊긴 루나가 불만이 있는 듯 옹알이를 시작했다.
“아우으! 아우!”
“루,루나님! 죄송합니다!”
“조!”
“말씀하십시오.”
“까!”
“….??”
알루어드를 향해 손을 내미는 루나.
그런데 어째 억양이 오묘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루나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조! 까!”
“루나니이이임!”
루나를 키우다 싶이 하는 나는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이게 이렇게 이어질지 몰랐으니까.
“과, 과자 달라는 거야.”
피식 –
순간,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무?”
루나의 말대로 이건 내 웃음이 아니었다.
기분 좋은 할머니의 웃음이었지.
이윽고, 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금방 클것이다. 보듬고 다니거라.”
“….크리스님?”
“시작되었군.”
손이 부드럽게 루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주 노련한 동작으로.
이번에는 입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촉이 왔다.
지금바로 출발하면 될 것이라는 촉이.
“지금가야 편하겠네.”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 않았는가?”
그런 줄 알았다.
음기가 너무 강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해가 될 일이 아니었다.
“짐만 챙겨서 바로 떠나시죠. 지금가야 편하게 가요.”
이렇게 바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쩌겠는가.
바로 안가면 또 손님들이 들이닥칠텐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