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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2

       아수라장.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참사의 모습을 표현하기 가장 알맞은 표현이 아닐 수 없으리라.

       허나 이 재난은 정확히 말해 ‘인재(人災)’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의 형상을 한 재난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허나 지금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가, 각하!!”

       “주군을 구해라…!”

       “저,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은?”

       “저택에는 사용인들이 없다! 그러니 각하의 신변이 무사한지만 확인해!”

       “아, 알겠습니다.”

         

       트리스탄의 수장.

       제니미아 후작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기적적이게도 괴한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건 후작이 머무는 저택뿐이었다.

       또한 후작은 예민한 감각 때문에 밤중 근처에 사람이 있으면 숙면에 들지 못하는 탓인지, 밤중엔 저택의 사용인 전부를 내보내는 바.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다는 것이었고, 이제 후작만 무사하다면…!

         

       “가, 각하가 무사하시다!”

       “와아아아아!!”

         

       사실상 아무런 피해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바였고, 후작저의 사용인들은 기쁨 어린 포효를 내뱉어야 했다.

         

       자신들의 주인이 무사함을 확인한 것이니까.

         

       …다만.

         

       “적을 포위해라!”

       “…으으!”

       “모두 가까이 다가가지 마! 포위해도 멀리서 해! 다가갔다간 개죽음이다!”

         

       여전히 적은 물러가지 않은 상황임은 변함 없다.

         

       병사들이 동그란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고, 습격자를 둘러쌌다.

       허나 누구도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니.

         

       …뚝뚝.

         

       안면에서 피를 흘리며 조금은 지쳐 보이는 남성.

       지금이 덮칠 기회가 아닐 수 없나 싶지만, 누구도 방심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았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후작가 정문을 정면 돌파, 아니 정면으로 파괴한 괴인.

       이미 병사들 대부분이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 보았고, 보지 않았을지라도 동료에게 전해들었기에 감히 사내를 경시하지 않는다.

         

       도리어 두렵고도 공포스러웠지.

         

       정예병이라 불릴지언정, 모두가 용맹할 순 없는 법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감히 어떤 무도한 자가 트리스탄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들이 왔다.

         

       “기, 기사단이다! 기사단이 왔다!!”

         

       ‘붉은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을 펄럭거리며 등장한 이들을 확인하며 병사들은 드디어 안도했다.

       도착한 이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의 저력을 가진 기사들이었으니까.

         

       -적혈수리 기사단.

         

       왕국 내부만이 아니라, 타국마저도 그 이름을 아는 오랜 전통과 위세를 지닌 기사단이었고, 트리스탄이 공격당한 지금, 한 명의 기사도 빠지지 않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웅!

         

       기사 열 명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전황의 흐름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 정도로 기사 개개인이 가진 무력이 경이적이란 뜻일 터.

       하지만 단언하건대 적혈수리 기사단의 단원들이 만약 열이 있다면, 그들은 능히 전황을 바꿀 역량을 발휘하리라.

         

       여타의 기사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강했으며, 군신이 직접 지휘했던 ‘전성기 시절’ 백은사자 기사단과 비견된다고 여겨지는 그들이었으니까.

         

       모두가 모른 척할 뿐, 실상 갈라하드와 라이오넬을 제외하면 왕도 최강.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백은사자와는 달리,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 중인 핏빛 수리들.

         

       그러한 적혈수리가 무려 백 명.

         

       백 명의 기세가 내뿜는 기백과 분노는 땅을 흔들고, 뜨거운 아지랑이를 피워내기에 충분했다.

         

       화르르륵!

         

       화마(火魔)와 같은 기세!

         

       괴인이 보인 압도적인 위세마저 모두 잊어버리게 만드는 웅장함이 병사들을 고양시켰다.

         

       그리고.

         

       “-이거야, 원. 잘 자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지, 원.”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병사들은 눈물마저 보였다.

         

       [불패의 궁수]가 저기 있다.

         

       “각하!!”

       “아아, 소리 지르지 말게. 나 귀 예민한 거 알지 않나.”

         

       터벅터벅 걸어오는 붉은 머리칼의 중년, 아니 아무리 많아봤자 3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미목수려한 남성이 무너진 저택 안에서 걸어 나왔다.

       50세를 넘는 남성에게 미목수려하단 말이 어울리는가 싶지만, 그는 당장 연극 무대에 서도 부족하지 않을 미남이 맞았다.

       허나 마냥 그는 곱상할 뿐인 사내가 아니었다.

         

       화아악!

         

       걸음을 옮길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존재감과 그 존재감을 한없이 드높이는 거대한 각궁(角弓)이 패도적인 위압감을 내뿜는 바.

         

       평균적인 여성의 신장보다 거대해 보이는 각궁.

       거우귀(巨牛鬼), 혹은 미노타우로스라고도 불리는 마물의 뿔을 가공하여 만들어낸 활이었다.

         

       대대로 명궁이자 신궁을 배출해낸 트리스탄 후작가의 주인을 상징하는 활이기도 했고 말이다.

         

       “거기 젊은이. 트리스탄을, 아니 나를 노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건드린 것이겠지?”

         

       -제니미아 리발린 드 트리스탄.

         

       당대 트리스탄 가문의 가주이자, 적혈수리 기사단의 단장직 또한 역임하는 활의 기사가 그를 향해 평온하지만 기백 넘치는 일갈을 내뱉었다.

         

       “…….”

         

       백 명의 기사와 제미니아 후작이란 걸물이 등장했기에 긴장한 것일까.

       그에게서 답변은 나오지 않았고, 제니미아 후작은 딱히 답변을 기대하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주군, 명령하시는 즉시 곧장 놈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불손한 괴한의 태도가 충직스러운 기사들의 심기를 건드렸음일까.

       그들은 분노하며 당장 명령을 내려주길 바라였다.

       적의 수급을 취할 수 있도록.

         

       허나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불한당은 아닌 것 같구나. 비록 습격을 하긴 했지만, 다친 자는 없다.”

       “그거야 우연히….”

       “정녕 그리 생각하나?”

       “…….”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후작의 말대로 저 괴인은 강자였다.

       그들도 멀리서 보지 않았던가.

         

       철문을 집어던지는 그의 괴력을.

         

       한데 저만한 힘을 가진 자가 아직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후작의 저택을 무너트리긴 했지만, 사상자는 전무.

       이건 기적이나 우연이란 말로 치부할 수 없는 얘기였다.

         

       실상.

         

       “내 목숨을 살려주었다라, 이거야 원.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군.”

         

       저를 일부러 살려뒀다는 뜻도 되었다.

         

       “또한 저 괴한은 알았던 거다. 저택에는 나만 있었음을.”

       “그, 그럼 그게 더욱 괘씸한 것이….”

       “아니지. 도리어 웃긴 노릇이지. 보이느냐? 정확히 내 침실과 반대편 부근만 무너진 것을.”

       “…….”

       “이게 우연이나 행운이라면 나는 당장 성배라도 찾으러 가봐야겠구나, 허허!”

       “…….”

         

       아발론의 보물인 성배.

       전설상에만 존재하는 보물이었고, 이를 찾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하여 후작의 말은 이것이었다.

       저 괴한은 처음부터 아무도 죽일 마음이 없던 거라고,

         

       병사부터 시작해, 후작마저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신원을 밝히고 투항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보장해줄 터이니.”

         

       후작은 관용을 보였다.

         

       기꺼이 상대를 용서하겠다는 자비로움이 엿보였-….

         

       “이봐, 곱상하게 생긴 아저씨. 거기서 그러면 내가 일부러 당신 침실 쪽에 포환을 안 날린 의미가 없지 않을까?”

         

       “……….”

         

       ……곱상하게 생긴 아저씨.

         

       후작은 태어나서 난생 처음 듣는 호칭에 넋이 나갔고, 이는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는 여전히 거침없이.

         

       “난 오늘 당신에게 시비를 건 거야. 싸우자고 시비를 건 거라고…! 그럼 당신은 날 어떻게든 무릎 꿇리거나 죽이면 되는 거야, 난 전력으로 발버둥 칠거고. 그런데 용서 같은 걸 하면 안 되잖아? 그럼 내가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잖아!”

         

       “…허.”

         

       뻔뻔스럽다 못해 어이를 상실한다.

         

       뭐냐, 이놈은?

       기껏 살려주겠다는데 죽이라고 종용한다.

         

       반백년 가까이 살며 오만 인간군상을 만나보았다 장담하는 후작이었지만, 이러한 유형은 또 처음이었다.

         

       후작은 말문이 막혀 헛웃음을 내었으나, 그는 이를 상관치 않으며 기사단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너희도 똑같다. 난 지금 너희 주인을 위협했으며, 모욕하기까지 했다. 감히 야밤에 후작저를 침범한 불한당이며, 후작저의 재산을 파괴했지. 거기다 후작이 머무는 저택을 반파시켰다. 한데 그런 놈을 앞에 두고 뭐하는 거지? 기사란 녀석들이 왜 당장 칼부터 뽑지 않느냔 말이다-!”

         

       쿠웅!

         

       사내가 발을 굴렸다.

         

       땅울림을 일으키는 진각.

         

       사내의 불쾌감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후작이 보인 배려,

       …귀족의 품위나 고결함은 지금 자신이 알 바가 아니란 듯이 말이다.

         

       “그놈의 명분이 아직도 부족해서 그런가? 그럼 명분을 주지. 난 지금부터 너희 주인의 곱상한 얼굴을 때리러 갈 거다. 그걸 막아서라, 막아서지 못하면 오늘 너희 주인의 얼굴은 더는 곱상하지 않을 테니까.”

         

       까드득!

         

       “이놈…!”

       “가, 감히!”

       “각하를 모욕해! 네놈! 이런 지옥 불에 떨어질 놈을 보았나!”

         

       스릉!

       채앵!

       사악!

         

       검과 창이 뽑힌다.

       살의를 머금은 기사들의 날붙이가 뿜어내는 기세는 막대하였으며, 설령 후작이 그만하라 명령할지라도 그들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주인을 모독한 이를 내버려둔다면, 기사의 이름을 버려야 함이 맞으니까.

         

       콰앙!!!

         

       적혈수리 기사단, 백 명의 기사들이 한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저들의 주인을 모독한 사내의 수급을 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백 명의 기사를 도발한 그는 그제야.

         

       “그래, 이게 맞지.”

         

       만족하며, 자신을 압박하는 살의의 파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 * *

         

       “대·마물 사냥 대형을 펼쳐라!”

         

       아무리 분노에 휩싸였을지언정, 기사들은 절대 멍청하지 않았다.

       도리어 분노했기에 머리가 한없이 냉정해진 기사들이었고, 그들은 곧장 사내를 위한 사냥 대형을 펼쳤다.

         

       이미 사내의 괴력을 목격한 바.

       그의 무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그들은 전력으로 사내를 사냥하려 들었다.

         

       대형 마물을 사냥하는 대형을 펼치는 그들이었고, 백 명의 기사들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압박.

       방어.

       공격.

       서포터.

         

       각자가 맡은 역할이 철저하게 수행하며.

         

       쿠우웅!

         

       콰지직!

         

       화아악!

         

       백 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기세, 아니 단순히 기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 투기력.

       그것은 일만 대군이 선보이는 압박보다 거세고도 포악한 것이었으며, 감히 개인이 대항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인 압박이었다.

       설사 아무리 거대한 마물일지라도, 이들이 내뿜는 투기력의 그물에는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어떠한 마물도 이 대형을 벗어난 역사가 없었고, 기사들은 단숨에 놈을 칠 생각이었다.

         

       ……다만.

         

       “…하!”

         

       이는 상대가 단순한 마물이었을 때의 얘기이지, 그에게마저 통용되는 상식은 아니었다.

         

       그가, 이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웃음이 날 상황이 아닌데도.

         

       그를 죽이려는 백 명의 기사가 있고, 그 백 명의 기사들의 실력도 심상치 않다.

       개개인의 실력이 챔피언 급은 아니더라도, 진짜배기 베테랑이란 느낌이 든다.

         

       그런 이들이 내뿜는 투기력 앞에 이한은 온몸이 금방이라도 짓눌릴 것 같았고, 실제로 관절마저 삐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이러한 압박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하며 깨닫는다.

       이미 자신은 이와 비슷한 기세와 압박감을 느낀 적이 있음을.

         

       ‘…똑같나? 아니 어쩌면 더 강할지도?’

         

       귀왕.

       트롤의 왕이라 불렸던 놈이 내뿜었던 압박감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재밌네….’

         

       세상이 이래서 재밌다.

         

       기사단이란 것들은 다 백은사자 놈들처럼 허약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멀쩡하다 못해 귀왕과도 대적할 만한 기사단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전신이 다 저릿저릿하다.

         

       자칫 방심하면 자신은 죽으리란 죽음의 공포마저 드는 위기감.

       한데도 견딜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귀왕이란 마물을 이미 겪은 덕분이다.

         

       경험이 있기에 견뎌낼 수 있고, 겪은 후에도 나태하지 않고 노력하였기에, 단 하루조차 허투루 보내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그물을.

         

       꾸드득!

         

       기꺼이 찢을 수 있었다.

         

       “무, 무슨 저런 괴물이!”

         

       “창을 날려라!!”

         

       “일제히 검을 찔러라……!!”

         

       투기력의 그물을 망치 두드리듯 두들기고 또 두들기며, 기어이 반대로 그들의 기백과 맞먹는 기세를 내뿜는 이한의 저항이었고, 적혈수리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만약, 적혈수리들이 이한의 속내를 들었다면 당황을 넘어 경악과 굴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리라.

         

       그는-.

         

       ‘우리 애한테 원한이 안 생기려면, 안 죽이고 끝내야겠지?’

         

       불살(不殺).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제압하여 끝내리라.

         

         

       안 그래도 높았던 전투의 난도를 극악 단계로 올리는 혼자만의 결심과 함께 이한이-.

         

       파앗!

         

       ‘허공’을 향해 발을 박찼다.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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