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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늦은 저녁, 열린 문틈으로 몰래 연구소로 잠입한 황금 사신은 인적이 드문 연구소 복도를 살금살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연구소 타일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옮기면서 조심스럽게.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는 어두운 복도 중간에 환한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있었다.

    24시간 운영되는 관리 사무소였다.

    그 안에는 피곤한 얼굴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야간 관리인이 한 명.

    매번 자신을 볼 때마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양갱을 내어주는 할아버지.

    양갱은 별로 맛이 없지만, 느껴지는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하는 할아버지였다. 

    매번 보답으로 어깨 위에서 콩콩 뛰어서 안마를 해주곤 했는데, 이렇게 몰래몰래 지나가려니 마음이 아팠다. 

    다음에는 안마 두 배로 해줄게! 

    작은 다짐을 하면서 관리 사무소 앞을 뚜방뚜방한 걸음걸이로 지나쳤다. 

    다행히 졸고 있는 할아버지는 바닥을 가로지르는 작은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황금 사신 앞에 더욱 큰 장애물이 등장했다. 

    애착 인간에게 도착하기 위해서 꼭 지나쳐야 하는 커다랗고 인간이 가득한 방이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는 커다란 물건들. 

    그 앞에는 퀭한 표정의 인간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으으,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인간들이 가득해. 

    다음에 잔뜩 놀아줄 테니까 힘내!

    방 안에 가득한 물건들은 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들이 근처로 다가가면 안절부절못하는 인간들이 많은 것을 보면 중요한 물건이겠지?

    그 물건 뒤쪽에 몸을 숨기고 천천히 지나가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게 천천히.

    “야야, 잠깐만 이거 봐봐.”

    “뭔데 그래?” 

    말소리야! 이러다가 들키겠어! 

    인간이 말을 멈출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고 때를 기다려야 해.

    “그냥 좀 와봐. 저기 보여?”

    “설마 숨어있는 거야?”

    소근소근 작은 소리로 말하는 인간들.

    장난치는 듯한 감정이 느껴지는 걸 보면 인간들도 우리들처럼 심심할 땐 장난도 치나 봐!

    “사신이가 숨어있는 거 처음 봐.”

    “모르는척해야겠지?”

    인간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어. 

    들키면 안 되는데!

    “사진 한 장씩 찍고 흩어져! 지금 사신이가 움직이질 못하잖아.”

    찰칵찰칵. 

    이상한 소리가 잔뜩 들리더니 인간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후우, 다행이야. 

    겨우 안 들켰어.

    그런데 ‘찰칵찰칵’ 소리가 들리고 나니까 인간들이 건강해진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다음에 알아봐야겠어!

    ***

    언제나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트리니티 제3 연구소장의 저택. 

    늦은 밤, 제3 연구소장은 집사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의뢰를 맡겼던 밤 까마귀 조직원 두 명이 모두 사망했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작전 진행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밤 까마귀들이 어디까지 진행했었지?” 

    “공장을 폐쇄하고 가방을 훔치는 것까지는 성공했었습니다. 다만 갑자기 나타난 회색 사신에게 가방을 빼앗긴 터라, 공장 폐쇄만 성공한 상태입니다.”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차분하게 내려놓은 뒤,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황금뿔 장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로군. 적어도 공장 폐쇄는 시켰으니 말이야. 제임스의 공장이 한국에 세워져서는 절대로 안 돼. ‘연금술’이 한국에 퍼지게 둘 수는 없지.”

    “….”

    “자네는 회색 사신 때문에 공장 폐쇄도 역시 물거품이 될 것 같다는 표정이로군.”

    큭큭큭. 

    낮게 웃음을 흘리는 연구소장.

    “이번 공장에는 아무리 회색 사신이라도 처리할 수 없는 오브젝트를 숨겨두었으니 괜찮아. 회색 사신이 처리하지 못했던 오브젝트의 복제품을 말이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소장은 다시 자리에 앉아 와인을 즐겼다.

    ***

    푸딩 공장 깊숙한 곳.

    한때 활기가 넘쳤던 공장은 이제 귀를 찌르는 비상벨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섬뜩한 정적 속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 비상벨 소리의 리듬은 어딘가 망가진 채, 불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어서 혼란과 혼돈을 부각시켰다.

    비상벨과 같이 동작을 시작한, 붉은 비상등은 길고 왜곡된 그림자를 드리우고 불길한 진홍색으로 차가운 강철 구조물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 불길함으로 가득 찬 강철 구조물의 중심에는 거대하고 기괴한 오브젝트가 하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검은색 점액을 흘리는 아귀.

    송파구 싱크홀 속으로 사라진 뒤, 그 행방이 묘연했던 아귀와 닮은 꼴의 오브젝트였다.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촉수와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피부는 아귀와 비슷했지만, 그 위로 악취를 풍기는 검은 점액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오브젝트 피부에서 줄줄 흐르는 검은색 기름은 공장 바닥으로 스며들어 점점 주변에 악취를 흩뿌리고, 주변 대지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이 아귀와 닮은 오브젝트는 가끔 뾰족하고 위협적인 이빨로 가득 찬 입을 크게 벌리고 주변의 철제 구조물들을 마구잡이로 물어뜯었다.

    인간도 먹잇감도 없는 이 황량한 공간에서 이 오브젝트가 계속 머물 이유는 없어 보였지만, 마치 소중한 물건을 지키려는 것처럼 공장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기계에 집착하고 있었다.

    ***

    곰돌이의 멋진 등장과 퇴장을 겪은 뒤, 갑자기 사라졌던 사신이가 이상한 서류 가방을 나에게 넘겨줬다. 

    고풍스럽고 멋들어진 서류 가방이었다.

    비싸 보이는 데, 도대체 어디서 주워 온 걸까?

    사신이가 제대로 가져왔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나중에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줘야겠지.

    뚜방뚜방.

    나보다 살짝 앞서서 걷는 사신이는 아무래도 조금 심심한지, 공장 내부의 아스팔트 위에서 혼자서 놀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그려진 새하얀 선위에서 선으로 폴짝폴짝.

    아스팔트 위에는 시선도 두지 않고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 같았지만 사신이의 작은 발은 새하얀 선만 밟고 있었다.

    후후.

    내가 알아챈 걸 눈치채면 토라질 테니까, 모르는 척해야지.

    사신이의 아스팔트 모험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마음속으로 작게 응원했다.

    ***

    공장 내부에 깔린 아스팔트를 예린이와 함께 걸었다.

    사람의 감정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니, 어떤 한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벽면에 <7>이라고 쓰인 커다란 건물.

    그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오브젝트들이 나와 예린이를 둘러싸는 것이 느껴졌다.

    분홍색 토끼 모양의 인형들. 

    요리사 모자를 쓰고 조리 도구를 들고 있는 오브젝트였다.

    [푸딩!]

    [푸딩!]

    요리사 모자를 쓰고, 조리 도구를 들고, [푸딩!]이라고 소리치는 오브젝트.

    누가 봐도 푸딩을 만드는 오브젝트였다.

    드디어 찾았다. 

    푸딩을 만드는 오브젝트.

    이제 저 오브젝트들을 업무에 복귀시키면 맛있는 ‘닌자 푸딩’이 만들어지겠지.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토끼 인형들의 눈빛이 영 불손했다.

    옆에 나만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

    제과 인형이라기보단 살인 인형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겼다.

    또 하나는 토끼 인형의 몸에서 나는 지독한 악취. 

    검은 점액의 냄새.

    만약 저 인형들이 푸딩을 만든다면 푸딩에 냄새가 밸 정도로 지독한 냄새였다.

    능력의 열화를 감수해서라도 파괴해야 할까? 

    아니면 ‘귀여운 강아지’처럼 길들일까? 

    고민이 깊어지는 와중,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조대죠? 제발 살려주세요!”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삐쩍 마른 남성의 목소리였다. 

    길들이기에는 시간이 없어 보이네, 열화된 능력이라도 얻는 쪽으로 해야겠어.

    ***

    통역사는 한계에 가까웠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호흡하기가 힘들어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살인 토끼가 조리 도구를 휘두르는 흉흉한 소리가 바로 뒤까지 쫓아와 있었다.

    “좀 더 빠르게 뛰게, 그 상태면 앞으로 5초 뒤에 엉덩이를 찔릴 거야!”

    반면 앞서서 뛰어가는 제임스는 뒤를 돌아볼 정도로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 말에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거품기가 눈앞으로 찔러왔다.

    ‘아 이젠 정말로 끝이구나. 다시는 이딴 의뢰 받지 말아야지.’ 

    주마등을 보던 통역사의 앞으로 황금색 빛이 반짝였다.

    쪼그마한 황금색 빛.

    불길한 붉은색 조명 밑에서도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물결이 토끼들을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살았어.’

    통역사는 안도감이 벅차올라 바닥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

    생존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내버려 두고, 황급히 황금 사신 정원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신아? 왜 그래?”

    갑자기 눈을 감고 있는 나를 보고 예린이가 의아해하면서 내 볼을 꾹꾹 찔렀다.

    하지만 나에겐 더욱 중요한 일이 있어.

    푸딩!

    황금 사신 정원 가운데에 못 보던 시설이 보였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조리모.

    황금 사신 스케일의 조리도구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조리대.

    최악의 경우 토끼 모양 푸딩 같은 게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갑자기 나타난 조리시설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가던 황금 사신이들. 

    각자 조리모를 하나씩 차지하더니, 그걸 뒤집어쓴 황금 사신이는 토끼 귀가 뿅 하고 돋아나더니 능숙하게 푸딩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금 사신이의 조리 과정은 조금 특이했다.

    평범한 푸딩 조리가 아니라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분업화된 생산 공정이었다.

    어떤 황금 사신은 설탕을 잔뜩 부어서 녹이다가 살짝 손가락으로 찍어서 냠냠.

    그리곤 맛이 있는지 새롭게 돋아난 토끼 귀를 파닥파닥.

    또 어떤 사신은 즐겁게 웃으면서 계란을 섞고, 어떤 황금 사신은 재료들을 옮기면서 몰래 설탕을 집어 먹기도 했다.

    각자 하는 작업은 제각각이었지만, 일체감이 느껴졌다.

    물이 끓는 소리, 계란을 휘젓는 소리, 유리컵을 경쾌하게 내려놓는 소리.

    이런 온갖 소리가 모여서 공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각 잡힌 군무를 추는 것처럼 일정한 속도와 박자를 가지고 진행되는 조리 작업은 계속 보고 있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성공이야!

    맛을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분명 닌자 푸딩이 완성될 거야. 

    히히, 푸딩이 완성되면 먹어봐야겠어.

    목적을 달성해서 그런지, 왠지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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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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