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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파도가 친다.

       

       고요하게.

        

       아주 고요하게.

        

        

       부드럽게 일렁이는 물결 속으로 누군가의 의식이 떨어진다.

        

       그리고 가라앉는다.

       

       

       아래로.

       

       아래로.

       

       더는 가라앉을 수 없는 바닥에 닿을 때까지.

       

       그렇게, 집어삼켜진다.

        

       

       

       ***

       

       

       악몽을 꿨다.

       

       아주 지독한 악몽을.

       

       

       그것은 마치 낡은 비디오 테이프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파편으로 쏟아지는 단편적인 장면들.

        

       나는 흐릿한 초점으로 화면 너머를 바라봤다.

       

       

       -찰칵, 드르륵…

        

       깜빡거리는 시야 속으로 테이프의 첫번째 장면이 시작된다.

        

        

       [나루야, 위험해!]

        

       [-끼이이익, 쾅!!]

        

       [엄, 마…?]

        

       

       눈앞에서 엄마가 죽었다.

        

       달려오는 트럭에 덮쳐질 뻔 했던 나를 밀쳐내고는, 대신하여 온몸이 찌그러져 버렸다.

       

       내 발치에는 새빨간 핏물이 선명하게 튀어있었다.

       

       

       -찰칵, 드르륵…

       

       곧바로 두번째 장면이 재생된다.

        

        

       [미안, 나루야… 형이 말이야, 조금 먼 곳으로 떠나게 돼버렸어…]

        

       [이별 선물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이거, 받아줘.]

        

       [그럼… 안녕, 나루야.]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 곁을 떠났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나를 감싸주려 했다는 이유로, 악의에 찬 사건에 휘말렸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울먹이는 아이에게 책 봉투를 쥐어주고는, 쓸쓸히 등을 돌려 락커룸을 나선다.

       

       

       -찰칵, 드르륵…

        

       다시 한 번 화면이 깜빡이며, 곧 세 번째 장면이 이어진다.

        

        

       [오늘부터 이지혜는 없다.]

       

       [네…?]

       

       [자살했다는군… 쯧, 나약한 년.]

        

       [지혜… 누나가요…?]

        

        

       나름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도장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건물의 옥상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이것도 아마 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찰칵, 드르륵…

       

       네 번째로 흘러나오는 장면.

        

       

       [이해가 되지 않는군.]

        

        

       비루한 삶의 전부였던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

        

       일말의 감정조차 녹아있지 않은 시선.

        

       그는 망설임 없이 나를 떠나갔다.

        

        

       멀어지는 뒷모습.

        

       나는 그 희미한 발자국을 보며, 자살을 결심했다.

        

       

       -찰칵, 드르륵…

        

       비디오 테이프가 돌아가는 플레이어에서는 잔망스러운 소음이 덜컥거린다.

        

       얼마 가지 않아 다섯 번째 장면이 번쩍인다.

        

       이번에는 내가 시스템과 계약을 맺은 이후, 두 번째 기회를 잡은 이후의 시점이었다.

        

        

       [공손한 말투.]

        

       [이제 와서 점잖은 척이라니, 같지도 않네요.]

        

        

       아무런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나는 사람들로부터 경계와 의심, 그리고 미움을 받았다.

        

       적의로 가득한 시선들의 앞에 선다는 것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어떤 용무이십니까, 리시트 공자님.]

        

       [그, 그만…! 거기서 멈춰주십쇼!]

        

        

       연회장 습격 사건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이후.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에 마주쳤던 앨런과 아이들.

        

        

       금발의 소년은 나를 향해 검을 겨누며,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허탈감을 느꼈다.

       

       

       -찰칵, 드르륵…..

       

       일곱 번째 장면.

        

       

       [히익…!]

       

       [야, 야, 빨리…! 빨리 지나가자…!]

       

       [눈 마주치지 마…!]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이들이 나를 두려워했다.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뒷걸음질 치던 모습.

        

       귓가를 스치는 그들의 수근거림이 내 몸을 더욱 무겁게 적셨다.

       

       조금은 지쳤던 것 같다.

        

        

       -찰칵, 드르륵…

        

       여덟 번째 장면.

        

        

       [다 괜찮을 거에요.]

        

       [학생은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요.]

       

       [라이덴 학생이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이번 생에서 가장 의지했던 사람을 잃었다.

        

       싸늘한 추념비가 되어 남은 스승님의 이름을 보며, 나는 익숙한 이별의 슬픔에 잠겼다.

        

        

       -찰칵, 드르륵…

        

       아홉 번째 장면.

        

        

       [이번 수학여행 습격 사건에서 사망한 루카스 수석 교수… 공자님의 짓입니까?]

        

       [당신이 죽인 거냐고 물었습니다.]

        

        

       오해를 받았다.

        

       스승님을 살해했다는 오해를.

        

       그날, 나는 처음으로 미움이라는 감정을 품었다.

        

        

       -찰칵, 드르륵…

        

       점점 끝으로 향하는 테이프.

        

       짙은 음영이 서린 화면 위로는 이내 마지막 장면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쾅쾅쾅!]

        

       [리시트 공자님!! 당장 이 문 열어주십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부, 분명 편지의 내용에는…]

        

       [성녀님께서 위험에 빠지셨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다시 한 번 오해를 입었다.

        

       누군가를 위해 검을 들고.

        

       누군가를 위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건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번에도 의심과 경계, 그리고 미움 뿐이었다.

        

        

        

       [……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

        

       [대체, 씨발… 그 좆같은 오해가, 벌써 몇 번째냐고…]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지쳐있었다.

        

       피로에 절여진 입술은 내가 감정을 추스를 틈도 주지 않으며 말을 쏟아냈다.

        

       결국에 나는.

        

       스스로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우욱… 허, 허윽…]

        

       [아아… 아아아…!!]

        

        

       추레한 절규로서 바스라진다.

        

       한 송이의 비명꽃과 함께 의식이 끊어진다.

        

        

       그렇게.

        

       길고도 길었던 한 편의 일대기는 끝을 맺었다.

        

       돌아가던 플레이어는 작동을 멈추며, 낡은 비디오 테이프를 뱉어낸다.

        

       

       검붉은 얼룩이 묻어있는 하얀 테이프가 바닥에 떨어진다.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피와 눈물만이 가득한 불행의 스너프 필름.

        

       나는 발치에 놓인 그것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여기가 꿈 속이라서.

       

        

       이건 꿈이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의 파편에 불과하니까.

       

       흐릿한 정신을 차리고 닫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이런 어둡고 끈적한 것들은 전부 사라질 테니까.

        

       

       그래, 이 정도로 불행한 일들이.

       

       이 정도로 절망에 찌든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잖아/

        

       전부 꿈이라고, 꿈.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식에서,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것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 하는, 멍청한 소년의 어리석은 발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으, 윽.”

        

        

       그렇게 나는 눈을 떴고.

        

       

       “리시트 공자님…?”

       

       “라, 라이덴 씨! 정신이 드시나요?!”

        

        

       애써 외면하려 했던 상처투성이의 현실을 마주했다.

        

        

       “……”

        

        

       어지러운 시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다섯의 소년 소녀들이 비춰진다.

       

       그들 뒤로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서져 있는 현관문.

        

       이리저리 뒤집어지거나 밀려나 있는 가구들.

        

       온 사방을 적시고 있는 검붉은 핏물들과,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붕대 조각들.

        

       그 모든 것들이 지독한 현실감을 선사했다.

        

       

       혹시 이것도 꿈이 아닐까?

        

       ……라는 생각조차 품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현실감을.

        

       

       “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멍한 소리의 한 줄기가 새어 나온다.

        

       그 안에 섞여있는 것은 절망.

        

       오직 하나 뿐이었다.

        

        

       무의식 시청했던 모든 장면들은.

        

       전부 내가 지나왔던 삶의 발자취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잊고 있었던 고통들이 다시금 깨어났다.

        

       목을 졸라오는 울렁거림.

        

       뇌를 뭉개버리는 듯한 두통.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집어삼킨다.

       

        

       “윽, 아… 아아아…!!”

        

        

       처연한 비명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흔적도 남지 않으며 조각나는 감각이었다.

        

        

       불합리함을 느꼈다.

        

       불행으로 만연했던 삶이, 누구도 아닌 나의 몫이었다는 사실에.

        

       그토록 바랐던 행복과 사랑이,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끄아아아아!!!”

        

        

       짙은 절망은 새빨간 증오로 번져간다.

        

       추하게 이리저리 튀어나온 마음은, 흉측한 가시가 되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눈앞으로 아른거리는 너희들이 미웠고.

        

       세상이 미웠고.

        

       내가 미웠다.

       

       

       “으아아아아!!”

       

       “라이덴 씨! 정신 차리세요!”

        

        

       온몸이 간지러웠다.

        

       슬픔, 원망, 증오 같은 것들이 뒤섞이며 꿈틀거린다.

        

       소름끼치는 감상이 전신을 물들인다.

        

       

       살가죽은 전부 벗겨내고 싶었다.

       

       부서진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는, 가슴팍에 자리하고 있는 붕대를 향해 가져갔다.

       

       

       -뿌드드득!!

        

       우악스러운 손길이 피부를 긁어낸다.

        

       뒤를 이어, 정성스럽게 덧대어져 있던 천조각들이 살점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검붉은 핏물이 손끝을 흥건하게 적신다.

        

       

       “라, 라이덴 씨!!”

       

       “젠장, 다들 막아! 팔 붙잡아! 팔!!”

        

        

       당황하는 목소리들.

        

       튀어 오르는 핏방울.

        

       그 혼란 속에서 나는 절망에 잠긴 채로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

        

        

       이후로도.

        

       라이덴은 몇십 번이나 발작을 반복했다.

        

       

       “아아아아악!!!”

       

       “젠장! 끈 풀리지 않게 단단히 묶어!!”

       

       “성녀님! 어서 치료를…!”

        

        

       깨어나면 괴성과 함께 자해를 하고.

        

       그러다 한계에 달하면 다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또 자해를 반복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몇 시간.

       

       결국 라이덴은 아이들에 의해 양팔이 묶인 채로 침대에 눕혀지게 되었다.

        

        

       “하아, 하아… 이제 괜찮은 걸까요?”

       

       “적어도 자해는 막을 수 있겠죠…”

       

       “……”

        

        

       몸을 결박시켜놓으니.

        

       격하게 날뛰던 라이덴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것인지.

        

       소년은 멍한 눈빛으로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그런 라이덴을 내려다봤다.

       

       

       “로벤 공녀님… 상태는 어떤가요.”

        

       “심각합니다. 쇼크로 죽지 않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극한까지 몰려있는 상태입니다.”

        

        

       담백하게 돌아오는 에이비의 답변.

        

       마하렛은 입술을 씹었다.

        

       소녀의 시선은 텅 비어버린 소년의 눈동자로 향해 있었다.

        

        

       칠흑으로 덧칠되어 있는 흑안.

       

       겨울의 숲처럼 공허함만이 남은 눈빛을 보고 있으면, 가슴팍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대체… 저는 무슨 짓을…’

        

        

       자책을 씹으며 옷자락을 움켜쥔다.

       

       무거운 침묵이 소녀의 어깨를 짓누른다.

       

       

       “……”

        

        

       그렇게 다시 한 번 적막이 방 안을 채워가던 때.

        

       부서진 현관문 너머로부터 부산스러운 잡음이 들려왔다.

       

        

       -덜컹! 터벅, 터벅…

        

       아이들은 복도 전체를 울리는 그 소음에 반응했다.

        

       

       “뭐지…? 분명 복도 전체에 ‘출입 제한(Access Restriction)’ 결계를 걸어두었는데…?”

       

       “……누군가 결계를 찢고 들어왔어.”

        

        

       클라라의 중얼거림에 아이들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는 경계의 시선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우당탕! 터벅, 터벅, 터벅…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처참하게 부서진 현관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덴! 거기 있어?!”

       

       “오빠!”

       

       “도련님!!”

        

        

       방으로 들이닥친 것은 세 명의 소녀였다.

        

       각자 금색, 붉은색, 갈색 머리칼을 지닌 세 명의 소녀.

       

       

       “아리엘… 그리고 1황녀님…?”

        

        

       앨런은 갑자기 나타난 루시와 아리엘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당혹스러운 것은 아리엘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어…? 우리 오빠는?”

       

        

       적발의 소녀는 미간을 사납게 굽혔다.

        

       

       “너희들, 우리 오빠 방에서 대체 뭘……”

        

        

       아리엘은 아이들을 향해 살벌한 기세를 겨누며 입을 열었지만.

        

       그런 물음은 얼마 가지 않아 흩어져 버렸다.

        

        

       “방, 안에… 핏자국…?”

       

        

       시야에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는 내부의 모습이 들어왔지 때문이었다.

        

       붉은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온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멍한 물음이 어둠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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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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