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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올가는 하늘 너머로 점점 멀어져가는 수송기를 바라보며 말없이 담배를 한 개비 빼물었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불을 붙이려다가, 사흘에 한 개비씩만 피기로 했었지ㅡ 하고는 담배를 다시 담배갑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실로 좋은 날이었다. 좋은 일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던 고난의 3년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고. 그럼에도 그녀가 저도 모르게 담배를 찾은 것은, 지금의 이 공백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전했기 때문이리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분명 처음 그들이 왔을 때만 해도 30분만, 10분만, 5분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는데. 막상 매일 들르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니, 이제는 다음 방문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겨워졌다.

       

       평소에는 그래도 갤질 좀 하고 일과도 수행하다 보면 하루가 꽤 금방 갔는데. 지금은 내일 아침이 너무 멀어서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올가는 씁쓸하게 웃으며 실내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자 셋이서 앉아있을 때는 그렇게 비좁게만 느껴졌던 소파가 지금은 쓸데없이 넓게 다가온다. 올가는 그들의 빈자리를 절실히 체감하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꾸만 진윤에게 조금만 더 있다 갈 것을 온몸으로 권유하는 제 행태와, 이제 정말 떠나려는 진윤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던 추태가 한 박자 늦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채 언어가 되지 못한 아우성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아… 아으…”

       

       그제야 올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 생기라는 것이 활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쪽팔림과 자괴감에 몸부림친다는 뜻이기는 했지만. 올가는 방금 막 갱신한 따끈따끈한 흑역사에 동요를 금치 못하고 애꿎은 소파만 퍽퍽 치다가, 이내 흐물흐물하게 축 늘어졌다.

       

       “에휴.”

       

       이미 지나간 일에 암만 괴로워한들 뭘 어쩌겠는가. 괜히 상처를 헤집느니 얼른 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던 그녀는, 이내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살다살다 종교에 귀의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얼떨결에 가입하게 된 천마신교였지만, 입교가 싫은 건 당연히 아니었다. 오히려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 명분을 통해서라도 외톨이 신세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매일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게 그저 기뻤다.

       

       그리고 고마웠다. 계속 무언가 받기만 하는 입장에서 차마 더 구차해질 수 없던 그녀에게, 그런 감사한 제안을 해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매일 찾아온다는 것도 그렇고, 굳이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것도 그렇고.

       

       “아, 이러면 안 믿을 수가 없지.”

       

       구성원이 겨우 2명, 아니지. 이제는 3명뿐인, 누가 봐도 모범적인 사이비 종교였지만. 뭐 어떤가. 이런 사이비 종교면 평생이라도 믿을 것이다. 흐흫거리며 실없이 웃던 올가는, 문득 천마의 얼굴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섬겨야 할 분이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얼핏 보기에는 자기보다도 어려보이는 여자를 신처럼 모셔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행성도 부숴먹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초월자잖아.

       

       백날 기도해봐야 들어주지도 않는 신보다 훨씬 가까이 있는 신앙의 대상이 아닐까. 아군이면 그만큼 듬직한 존재가 없을 테고. 올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녀가 어째서 올가 자신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혹시 오늘 뭔가 실례한 게 있었나 찬찬히 기억을 뜯어봐도, 짐작가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인가? 원래 그런 표정을 하고 다니는 사람인 건가? 그런 것치곤 진윤을 볼 때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천마라는 양반이 낯이라도 가리는 거야 뭐야.

       

       아니, 이렇게 불경한 마음을 먹을 때가 아니지. 그래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직접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분이신데.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삐딱한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어 나쁜 생각을 털어내려는 올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부러움을 느끼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그녀는 조용히 떠나간 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수송기를 타고 차원의 저편으로 둘만의 드라이브를 즐기며 수다를 떨고, 이런저런 세상에 들러 진귀한 경험을 하고, 화성으로 돌아가 무공 수련에 전념하고.

       

       그렇게 하루종일 붙어다니는 둘의 모습은, 그야말로 영락없는 부부였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함께하고, 즐거움도 놀라움도 전부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추억을 쌓는다. 그 인연의 고리에 외로움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오히려 이따금 혼자 있고 싶다는 사치스런 생각을 품지 않을까.

       

       그 사실에, 올가는 저도 모르게 애달픈 한숨을 흘렸다. 이유 모를 시기심이 마음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공포와 경외의 대상일 터인, 그리고 지금부터 숭배해야 마땅할 천마에게.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무심코 질투심을 품고 말았다.

       

       그가 와주기를 바라며 내일 아침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그에 비해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천마가 너무나도 부러워서.

       

       그저 살아남는 것이 고작인 자신의 무가치함이 보잘것없고, 그에 비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룰 능력을 갖춘 천마가 너무나도 부러워서.

       

       결국 자신 따윈 연민의 대상이지, 그에게 어떤 도움도 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해서.

       

       올가는, 그만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어버리고 말았다.

       

       “…아냐. 그럼 지금부터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면 되지.”

       

       그러나 그녀라고 해서 감염자들이 활보하는 세상에서 3년을 헛으로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멘탈의 회복 속도와 근성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내일부터 열심히 무공을 수련해야지.”

       

       베개에서 얼굴을 쏙 빼낸 그녀는, 막상 지금 당장 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창피함을 느꼈다. 아니, 하지만 정말로 할 게 없는 걸 어떡해. 무공은 내일 아침에나 배울 수 있을 거고.

       

       결국 그녀는 잠시 갈등하더니, 슬며시 갤러리를 켰다. 몸풀이로 가벼운 운동 정도는 저녁 무렵에 실내에서 해도 좋을 것이고. 뭔가 전형적인 작심삼일의 패턴이라 모양새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오늘 정도는 스스로의 행운을 자축하며 쉬어도 되겠지.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서큐버스련 설레발 반박 들어간다][67]

       [좀붕이 오늘 계 탔네 ㅋㅋㅋㅋㅋㅋㅋ][48]

       [은인님 왜 안 와? 은인님 왜 안 와? 은인님 왜 안 와???][56]

       [연락두절 3시간 30분째 ㅋㅋㅋㅋㅋ 독하다 독해][32]

       [프로젝트 책임자 어디 갔냐고 ㅋㅋㅋㅋㅋ][13]

       [내 책 언제 오냐고 ^^ㅣ발][27]

       

       

       그리고 활활 불타는 갤러리를 본 순간, 그녀는 그제야 떠올리고 말았다.

       

       아. 이거, 내가 후기 안 올리면 근황을 알 길이 없구나.

       

       갤럼들 속이 타들어 가는지도 모르고 느긋하게 빈둥거리고나 있었으니, 그야말로 직무유기나 다름없었다. 당황하며 진윤과 천마가 다녀간 후기를 작성하려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어차피 늦었는데 10분 정도 더 늦어도 티도 안 나지 않을까?”

       

       솔직히 지금 갤러리가 불타는 꼬라지를 파악하지도 않고 글을 쓰면 그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다들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하여 그녀는 게시글들을 순서대로 쭉 훑어보았다.

       

       

       [작성자 : 시우멈춰*]

       [제목 : 내 책 언제 오냐고 ^^ㅣ발]

       [무슨 도서관을 통째로 들고 오고 있나

       왜 아무 소식도 없는데 아]

       

       [하이쿠를읊어라* : 도서관 누렁이가 침을 질질www]

       [아호이원위치* : 네가 선택한 쿠팡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ㄴ[시우멈춰* : 술 배송 당일날 얼마나 잘 버티는지 함 보자 ㅇㅇ]

       [섹무새* : 책에서 밤꽃냄새 푹 우러나올듯 ㅎ]

       ㄴ[시우멈춰* : 아 진짜 제발 그러지 마]

       

       

       [작성자 : 콜드슬립*]

       [제목 : 연락두절 3시간 30분째 ㅋㅋㅋㅋㅋ 독하다 독해]

       [개미털이하려고 작정했나 본데 어림도 없지ㅋㅋㅋㅋㅋㅋ

       좀붕이 후기 올라올 때까지 숨 참는다 흡]

       

       [화룡점정* : 라고 적혀있는데요?]

       ㄴ[콜드슬립* : 아이~ 씻팔]

       [에반데용* : 아니 이새기들 도대체 3시간 반 동안 글도 안 쓰고 뭐하는 거냐 ㄹㅇㅋㅋ]

       ㄴ[섹무새* : 누가 봐도 야스각인데 아직도 정신이 안 들어??]

       ㄴ[ㅇㅇ(114.603) : 이쯤 되면 킹리적 갓심 ㅇㅈ한다…]

       [지나가던선비* : 근데 트롤은 숨 몇분 참을 수 있냐?]

       ㄴ[콜드슬립* : 재보진 않았는데 드래곤보단 오래 참을듯]

       ㄴ[화룡점정* : ?? 투기장으로 따라와 십련아]

       

       

       [작성자 : ㅇㅇ(487.361)]

       [제목 : 은인님 왜 안 와? 은인님 왜 안 와? 은인님 왜 안 와???]

       [왜 나만 빼고 다 씨뿌려줘? 나 추워… 빨리 와줘…]

       

       [ㅇㅇ(023.708) : (안아줘요 콘)]

       [수상할정도로돈이많은* : 뽀기해라]

       [섹무새* : 어차피 다음에 들를 텐데 엄살 무엇??]

       [섹무새* : 난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달게 받아]

       ㄴ[ㅇㅇ(487.361) : 앆!!!]

       [금속은나의친구* : 메모… 엘프는… 천성이 음탕한 종족]

       ㄴ[ㅇㅇ(487.361) : 이거 음해야!!! 난 그냥 은혜를 갚고 싶은 건데]

       ㄴ[ㅇㅇ(487.361) : 그리고 금속박이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

       ㄴ[금속은나의친구* : ??? 거따가 왜 박아 음란마귀년아 개소리하지마]

       

       

       [작성자 : 섹무새*]

       [제목 : 좀붕이 오늘 계 탔네 ㅋㅋㅋㅋㅋㅋㅋ]

       [캡틴 코리아가 몇년째 묵혀놓은 푹 익은 정자 독식하겠네

       아니 천마랑 같이 마실 테니까 반띵인가]

       

       [ㅇㅇ(487.361) : 나 줄 건…?]

       ㄴ[섹무새* : 그런 건 없다 게이야 ㅋㅋㅋㅋㅋ]

       ㄴ[ㅇㅇ(487.361) : 웨 납븐말해]

       [순결의수호자* : ? 뭐라는 거냐 갤러리 내 처녀지수는 변동 없는데?]

       ㄴ[ㅇㅇ(114.603) : ?]

       ㄴ[웨않덴뒈* : ??]

       ㄴ[불의세례를받아라* : ???]

       ㄴ[ㅇㅇ(023.708) : 이게 사람 말이 맞냐?]

       ㄴ[ㅇㅇ(678.912) : 사람이 아니라 유니콘이잖음]

       ㄴ[ㅇㅇ(023.708) : 아]

       ㄴ[마법사죽이기* : 어질어질하거든요]

       

       

       [작성자 : 순결의수호자*]

       [제목 : 서큐버스련 설레발 반박 들어간다]

       [유니콘 레이더로 정밀측정해봤는데 GVU 수치는 그대로임

       그러므로 좀붕이네 지구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음

       참고로 GVU는 Gallery Virgin Unit의 약자임 ㅇㅇ]

       

       [ㅇㅇ(114.603) : 무친련 진짜 ㅋㅋㅋㅋㅋㅋ]

       [ㅇㅇ(023.708) : 무슨 스코빌 지수냐? ㅅㅂㅋㅋㅋㅋ]

       [빅데이터분석중* : 그쪽 세계에는 그런 문명이 있나 보군요…]

       [삼강오륜* :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으면서 기립박수쳤다… 유니콘은 진짜 전설이다]

       [콜드슬립* : 아니 그럼 얘네 도대체 3시간 넘게 뭐한 거냐? 그게 더 궁금하네]

       ㄴ[화룡점정* : 뭐 셋이서 보드게임이라도 하면서 놀았겠지 병신아 ㅋㅋ]

       ㄴ[콜드슬립* : 지랄ㅋㅋㅋ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냐]

       [섹무새* : 섹무룩…]

       [ㅇㅇ(487.361) : 젠장!! 은인님 믿고 있었다고!!!]

       [섹무새* : 아니 근데 기다려봐]

       [섹무새* : 야한 건 안 했어도 썸은 탔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섹무새* : 천마랑 좀붕이랑 뉴비 사이에 두고 질척한 캣파 한판 때렸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섹무새* : 좀붕이한테 판정패하고 분해진 천마가 돌아가서 뉴비 잡아먹는 각 날카롭다 ㄹㅇㅋㅋ]

       ㄴ[빛의정의* : 추합니다]

       

       

       “무, 무, 무슨…”

       

       3시간 반의 기다림 끝에 미쳐버린 갤 꼬라지를 살피며,

       

       올가는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높여 외쳤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이 사람들은!!!”

       

       이후 잔뜩 흥분하여 해명문을 작성한 그녀였지만.

       

       당연하게도, 슬슬 열기가 가라앉던 갤러리에 장작만 더해주고 말았다.

       

       일심동체로 조리돌림을 시전하는 갤럼들의 만행에 그제야 뒤늦게 후회하는 올가였지만, 한번 시작된 고로시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거듭된 열애설 뇌절에 살짝 열받은 주딱이 천안문을 시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불타는 갤의 말로는 언제나 천안문 엔딩
    초월자와 좆반인의 쌍방질투… 이건 꽤 귀하군요…

    야스터이님 후원 감사합니다!!! 그리고 비공개로 후원해주신 분도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많이 후원해주시다니… 그저 감격입니다… 좀붕이… 야캐요…

    그리고 천마님 팬아트를 완성해주신 GuLi님 정말 감사합니다!!! 팬아트 공지에 슬쩍 추가해둘게요…! 금방 공지 하나 새로 파겠습니다!

    오늘 한편 더 쓰겠다(새벽연재)
    그저… 손이 느려서 미안합니다…!!!

    아, 그리고 좀붕이 일러는 댓글에서 제시해주신 4번 안이 너무나도 인상 깊어서 그쪽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설문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아마 1번과 4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다음화 보기


           


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GFLAD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community for the last people who survived on Earth. This is ‘The Lonely Gallery Afte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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