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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아카샤는 폭풍우가 멎을 때까지 살리에르 백작가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다. 물론 저택에 잠입하려던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 저택에 입성하게 된 계기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당초 생각해두었던 저택 침입 계획은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지워진 지 오래였고, 남은 건 수치심 뿐이었다.

         

        “쯧.”

         

        모두가 두려워하는 구천지대계가 이런 창피를 당하다니. 이래서야 마왕군 군단장으로서의 체면이 안 선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른 생각만 하고 있을 자신이 아니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곱씹어봤자 나아지는 건 없다. 애꿏은 시간만 날려먹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은 본분을 다하는 것에 집중하자. 아카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내다보았다.

         

        “여기가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야.”

         

        생각을 정리하던 사이, 로테는 아카샤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침대와 책상이 각각 두 개씩 딸린 널따란 방이었다. 로테는 두 침대 중에서 창가에 가까운 쪽을 가리켰다.

         

        “네가 쓸 침대는 저거야. 원래는 에테르에게 빌려줬던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로테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저택 식구들은 아카샤를 에테르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 소녀를 에테르와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건 현재로선 로테 혼자뿐이었다. 

         

        화목한 가정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맹수와도 같은 소녀를 한 방에 들여야 한다. 그래야 허튼짓을 하는지 안 하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아카샤. 어느덧 아카샤는 창가 너머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전경 좋네. 피치블렌드 산이 한 눈에 보여.”

        “밖에 비 오는데?”

         

        하늘은 사랑하던 남자를 잃은 여인처럼 구슬피 울어대고 있었다. 이만한 폭우가 내리치는 날씨에선 낙룡봉은커녕 바로 앞에 있는 시내의 모습도 안 보인다.

         

        그런데 산이 보인다니.

         

        백발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칙칙한 방 안에서 아카샤의 금색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번쩍, 하고 먹구름이 때마침 번개를 토해낸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장마 때문에 땅이 식어서 그런 걸까? 여름치곤 유독 추운 날이었다.

         

        “뭘 그리 뻣뻣하게 있어? 심심한데 얘기나 하자.”

         

        금안족에 대한 건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그저, 눈앞의 소녀를 동년배의 평범한 여자아이로 받아들이는 거다.

         

        두꺼운 알약을 삼키듯이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로테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교회나 다과회를 자주 드나들었는지라 처음 보는 이를 상대로 말을 붙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만 보자. 어떤 이야기를 해야 얘가 좋아할까.

         

        고민할 틈도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보던 아카샤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종잇더미를 발견하더니 관심을 가지고 집어들었다.

         

        “이거, 재미있는 게 적혀 있네.”

         

        소녀가 미묘한 한숨을 흘린다. 감탄,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이 담긴 날숨이었다.

         

        아카샤가 집어든 건 복잡한 수식이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는 계산지였다. 얼마 전에 에테르가 쓰고 나서 대충 놓아둔 것이었다. 그때 버리지 말라고 해서 따로 치워버리진 않았었는데.

         

        “적혀 있는 게, 다차원 유랑 방정식이네.”

         

        다차원 유량 방정식이라면 로테도 들어본 적 있었다.

         

        물론 들어만 봤다. 고급수계마도였나? 그쪽 과목에서 가르치는 심화 내용이라 방정식 형태가 어떻게 생겼는지까지는 로테가 알 수 없었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거기 적힌 게 뭔지 알아?”

        “그래, 나한텐 나름 추억이야. 어릴 때 언니랑 붙잡고 풀어봤었는데.”

        “해를 구했었다고?”

        “아니, 거기까진 못 헀지. 일반해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거든. 난 도중에 포기했고, 언니도 아마 일주일 정도 더 만지작거리다가 포기했을 걸?”

         

        로테는 아카샤에게서 종이 한 장을 나눠받았다. 복잡한 식이 종이 이곳저곳에 전개되어 있었다.

         

        수학을 웬만큼 한 로테였지만 전혀 알아보질 못하겠다. 처음 보는 기호도 많았고,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계산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카샤가 고개를 까딱이며 물어왔다.

         

        “이거, 네가 끄적인 거?”

        “아니. 에테르가 풀다 만 거야.”

         

        로테의 대답에 소녀는 흐음, 하고 짧은 침음을 삼켰다. 

         

        “우리 언니랑 글씨체가 전혀 다른데.”

         

        적어도 아카데미에 막 입학한 소녀에게서 나올 법한 동글동글한 필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30대 정도 되는 남성이 술 마시고 쓴 듯한 지렁이 글씨였다.

         

        “근데 수식 전개하는 모양새가 우리 언니랑 똑같긴 해.”

        “뭐 그런 걸 다 알아.”

        “우린 일란성 쌍둥이니까. 이런 거 묘하게 닮았다고. 특히 적분변수 날리고 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니까? 자, 여길 봐봐.”

         

        아카샤가 보여준 건 편미분방정식이 적힌 한 줄이었다. 

         

        “이거 바로 아랫줄 보여? 윗줄의 수치해가 바로 아랫줄에 있어. 중간과정 다 빼먹고 보자마자 답을 적었다는 소리야. 웬만한 금안족도 이런 식으로 바로는 못 하거든?”

         

        다차원 유량 방정식은 독립변수만 네 개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간의 머리로는 암산을 돌려 풀 수 없다.

         

        “…괴물이네.”

         

        덕분에 로테의 경계는 한층 강해졌다.

         

         

        **

         

         

        아카샤를 집에 들인 직후부터, 로테는 그녀 곁에서 한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로테는 아카샤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아니, 금안족 전반에 대해 알 수 없는 의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장 궁금했던 건 아카샤가 어떻게 재앙급 마수인 펜릴을, 그것도 두 마리나 제압했는가였다. 그러나 그걸 물어봤다간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저기, 오늘은 뭐 할거야?”

        “2학기 예습.”

         

        일과를 같이하게 된 지도 거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아카샤는 틈만 나면 로테에게 말을 걸었다. 주로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때마다 로테는 최소한의 단어만으로 대답했다. 

         

        이게 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또 재미없게 그러네. 서재에 매일 틀어박혀 있으니까 이젠 책 냄새만 맡아도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아.”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귀족은 열심히 공부할 의무가 있어.”

        “나라의 미래?”

         

        아카샤는 픽 웃었다.

         

        “그래, 열심히 해 봐.”

         

        그러고는 근처 책장에서 책을 몇 권 가져와 로테의 반대편에 착석했다. 슬쩍 시선을 흘겨보니 하나같이 소설책이었다.

         

        대부분은 언니가 사 놓았던 로맨스 소설이었다.

         

        서로 적국에 속한 왕자와 공주가 밀회를  나누는 금단의 사랑 이야기, 불치병으로 죽어가던 공녀를 살리기 위해 ‘천 년 묵은 층층나무의 열매’를 구하러 대륙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는 한 청년의 이야기, 반란으로 황폐화 된 어느 나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궁의 첨탑에서 떨어져 죽은 중세 왕녀의 이야기 등등.

         

        언니의 영향으로 로테도 한 번쯤은 읽었던 이야기들이었다. 하나같이 수작들이었지. 

         

        “로맨스 소설 좋아해?”

        “그냥, 심심풀이용이지.”

         

        감정표현이 없다시피 하는 금안족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니, 진귀한 광경이었다.

         

        아카샤는 몇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번씩 미소를 지었다. 소설을 보며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는 건 그녀가 적어도 인간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얘는 이렇게 미화가 됐네.”

        “응?”

        “아니, 바이올린 연주하던 이 왕녀 말이야. 내가 알던 결말과는 조금 다르거든.”

        “출판사에 따라서 스토리가 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네가 읽은 건 어땠는데?”

        “어, 음.”

         

        아카샤가 입술을 달싹인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잠시간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망국의 왕녀 이야기. 그 이야기는 로테도 꽤나 좋아하던 것이었기에 아카샤가 알고 있는 또 다른 결말에도 묘하게 관심이 갔다.

         

        “떨어지는 것까지는 동일하거든?”

        “그런데?”

        “죽지는 않아.”

        “뭐야, 그게.”

         

        싱거운 대답에 로테는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데?”

        “성에서 뛰어내린 충격으로 사지가 마비된 왕녀 앞으로 마신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지. 마신은 변절된 정령왕의 자아이자, 미련이 많은 자의 앞에만 나타나는 일종의 사신이라는 설정이고.”

         

        다 죽어가던 왕녀 앞으로 마신은 천천히 다가선다. 그녀가 그녀의 몸과 함께 내던졌던 바이올린을 주워 순식간에 고쳐내고, 그것으로 진혼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진혼곡. 이미 죽은 자들이나, 죽어가는 자들은 위한 위로의 노래. 그 노래를 들으면서 왕녀는 핏물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지.”

         

        ─ 마신이시여. 내 영혼을 그대에게 줄 테니, 그 대가로 영원한 육체를 내려주소서.

         

        “뭐야,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데? 비밀 연애하던 평민 남성은 어디로 가고 이야기가 그렇게 돼?”

        “글쎄다.”

         

        아카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책을 덮었다. 지치지도 않고 이번에는 더 두꺼운 책을 펴들었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6974(무검열판) ─ 죠지 오일]

         

        잠깐만.

         

        “너, 너 그거 뭐야…! 어디서 가져왔어!”

        “이거? 저기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던데?”

        “그거 관능소설이잖아! 당장 원래 있던 곳에 꽃아 놔…!”

        “관능소설? 그게 뭔데?”

        “그, 그, 그…! 아무튼 그런 거 있어!”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데.”

         

        로테의 충고를 무시한 채로 두꺼운 하드커버 책장을 넘기는 아카샤.

         

        “어디 보자. 맑고 쌀쌀한 4월의 어느 날, 딜…….”

        “그마아아아아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테가 그대로 책을 빼앗아 들었다. 어릴 적 멋모르고 이걸 읽어버렸던 기억은 로테에게 있어 또 다른 트라우마였다. 오죽하면 첫 문장만 들어도 양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이건 읽으면 진짜 후회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돌려줘. 원래 있던 곳에 두고 올 테니까.”

        “나도 같이 가.”

         

        살리에르 백작가의 서고는 웬만한 도서관에서 한 층을 차지할 만큼 넓었고, 또 그만큼 책도 많았다. 때문에 이 금서를 원래 위치로 두려면 1분 가까이 걸어야 했다.

         

        “여기 구석에 있었지.”

        “이 근처 확실해?”

        “정확한 위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데나 놓지 뭐.”

         

        로테에게서 책을 받아든 아카샤가 대강 적당한 위치를 찾아 책꽃이 사이로 쑤욱 밀어넣었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쉽게 들어간 책 안쪽에서 무언가가 달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

         

        분명, 스위치 같은 게 작동하는 소리였다.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등 뒤로 책장 하나가 바닥을 질질 끌며 움직이더니 그 안쪽으로 네 평 남짓한 공간이 드러났다.

         

        “이건….”

         

        로테는 이미 한 번 봤던 물건.

         

        “이게 왜 여기서 나와?”

         

        피치블렌드 원석을 노란 가루로 바꿔내는 기계이자, 가히 살리에르 백작가 마도공학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는 가문 기술의 집합체.

         

        정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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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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