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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디에레 일족.

     딱히 일족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하나의 성씨가 무려 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그건 충분히 일족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평범한 잭슨이나 심슨 등과 달리, ‘디에레’라는 성은 조금 특별한 이름이다.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

     핏줄 자체가 신의 가호를 받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디에레 가문의 여인들은 유독 창월여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기로 유명했다.

     지금의 성녀 얀 디에레도 그렇지만, 먼 옛날의 성녀인 ‘츤 디에레’ 또한 마찬가지였다.

     뭔가 성격이 그녀와는 너무 달라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츤 디에레는 성녀의 정석…이라기보다는 용사 파티의 성녀로서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새침데기의 전형 같은 여자였는데.’

     딱히 나를 직접적으로 돕거나 그런 여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왕군에 항복한 인류를 가장 많이 신경을 써준 여인이었다.

     -이 자들은 분명 마왕에게 굴복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여신께서는 이들이 죽음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를 바라셨을까요? 아닙니다! 신께서는 오히려 그렇게라도 살아남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창월여신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니까요!

     마왕군의 몰락 이후.

     그녀는 창월여신교의 성녀였음에도, 창월여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한 인간들을 살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

     나의 죽음 이후.

     아마도 가장 겁을 먹은 자들은 마왕을 따르던 마족들이 아니라 마왕의 아래에서 노예가 되기로 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다른 자도 아니고 마왕에게 무릎을 꿇었던 이들이다.

     그냥 무릎을 꿇었던 것도 아니고, 창월여신에 대한 신앙을 꺾고 마왕을 믿기로 한 자들이다.

     -어떻게 인류면서 창월여신을 배신하고 마족의 편에 들 수 있는가!

     -저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모두 죽여서 창월여신님의 분노를 진정시킬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배신한 인간들을 죽여서 피의 복수를 하자! 귀족과 왕족의 피를 빼앗아 살을 찌운 저 천한 것들을 죽여 신분의 지엄함을, 피의 차이를 보여주자!!

     승리(당)한 인류는 분노했다.

     마족들에 의해 노예처럼 살고 억압받는 줄 알았더니, 왕족과 귀족의 영지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마왕의 따뜻한 젖꼭지를 빠는 게 그리도 좋았더냐!!

     마왕군에게 부와 재산을 빼앗긴 상류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마왕군에게 시달리면서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던 평범한 이들도 이들을 규탄하고 나섰다. 

     원래, 인간은 내가 고생하는 동안 남이 꿀 빠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

     안 그대로 인류를 배신했다는 명분만으로도 얼굴에 침을 뱉어도 유분수인데, 창월여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이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누군가는 배신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다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신앙을 저버린 이들을 단죄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배신에 대한 순수한 분노로.

     저마다의 이유로 마왕군의 노예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소위 대규모 마녀사냥이 일어나려고 하던 시기, 당시 창월여신교의 성녀였던 ‘츤 디에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한다.

     죽이지는 말자고.

     무분별한 학살은 우리가 마족과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거라고.

     혹시나 죽어서 창월여신의 앞에 섰을 때,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어쩔 거냐고.

     그렇게 그녀는 인류의 분노를 잠재웠다고 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역사서의 기록에는.

     “성녀님. 혹시 ‘츤 디에레’라고 아세요?”

     나는 이 여인에 대해 기록으로 마왕군 멸망 이후의 기록을 통해 단편적인 기록을 찾았을 뿐이다.

     “알죠. 저의 먼 조상님이자 창월여신님의 자비와 자애를 가르쳐주신 분인걸요. 동시에…교단에서 함부로 성함을 불러선 안 될 분이기도 하고요.”

     “그건 왜죠?”

     “…현자님은 500년 전의 분이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창월여신교는 정말 숨기는 게 많아요. 그걸 말씀드리기 위해서 제가 이 파티에 들어온 거고.”

     “이해합니다. 말해주세요. 제가 주의해야 할걸.”

     “…저희는 ‘트레이터’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500년 전 마왕군에 부역한 자들을 일컫는 표현이에요. 다른 말로는 인류반역자, 친마왕파라고 부르죠. 역사서를 살펴보셨다면 알겠지만, 그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죠. 저는 마왕 사후의 일에 대해서 봉인 절차를 밟느라 잘 몰랐지만, 역사서를 보고 알았어요. 인류연합이 분열했다는 것을.”

     여신교단식 표현으로 ‘친마왕파’에 대한 처분을 두고 인류는 분열했다고 한다.

     

     저들을 살려둘 것인가.

     저들을 죽일 것인가.

     “제 조상님, 츤 디에레께서는 철저하게 재판을 통해 친마왕파에 대해 처분을 내리고자 하셨어요. 마왕군에 직접 가담하여 인류를 공격한 이들은 결국 연합법에 따라 사형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추방당했죠.”

     “추방이라.”

     “예. 저 멀리, 머나먼 북쪽. 얼음의 대장벽이 깔린 북부의 설원으로 쫓아냈어요. 얼어 죽는 곳으로 쫓아 보내는 게 죽이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욕하는 자도 있었지만, 당시의 여론을 생각하면 조상님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겠죠.”

     

     얀은 담담히 차를 홀짝였다.

     “조상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직접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자주 만났죠. 전장에서는 누구보다도 공과 사가 확실한 분이셨지만, 사석에서는 투덜거리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마음씨가 정말 다정하고 착한 분이셨어요.”

     -아 씨, 뭐 하자는 짓이야! 네가 이런다고 내가 너를 봐줄 것 같아?! 장난치지 말고 꺼져! 이딴 약품들 필요없…. 하아, 아니. 일단 받겠어. 착각하지 마! 이건 다친 사람들을 위한 거니까!

     -뭐라고? 고맙긴 한데 여기에 무슨 독이라도 들어있는 거 아니냐고? 미쳤어?! 너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네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아니거든!! 나는 그 사람들을 구하려고 지금 이걸 가져온 거야! 하나라도 먹기만 해봐! …아, 아니. 먹지 말라고 해서 다 가져다 버리는 건 아니겠지…? 응? 그렇지? 조, 조금은 먹어도 되는데, 이거 무조건 거기 고통받는 사람들한테 보내줘야 해!

     -…뭐야. 병력을 일부러 안 보내는 건. 지금 우리를 조롱하는 거야? 추격대를 보내면 전부 몰살할 수 있으면서? 하, 웃기지도 않는 동정 따위…. 두고 봐. 언젠가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겠어.

     아아.

     정말 전장에서 많이 마주쳤던 여인이다.

     용사도 아니면서 용사만큼이나 강했던.

     나와 몇 번이고 싸우고 패배하면서도 결코 전의를 잃지 않던, 하지만 나와의 전투는 별개로 내게 지배당하던 사람들도 신경을 써주던 여자.

     눈앞의 여자는 그 여자의 후손이었다.

     ‘500년이나 지나면 인상도 좀 달라질 수 있지.’

     500년이란 긴 시간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디에레’라는 성에 붙어있는 힘.

     “츤 디에레 성녀는 성검 없이도 용사만큼의 힘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강했죠. 특히 마족을 상대할 때는 더더욱. 얀 디에레 성녀님은 어떤가요?”

     “후후. 이렇게 보여도 저도 제법 강하답니다?”

     얀 디에레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릴리에즈가 정령기를 각성했다고 한들, 정령기 없이 일 대 일로 싸우면 제가 이겨요. 저는 창월여신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강해지니까요.”

     그렇다.

     성녀의 힘은 곧 창월여신에 대한 신앙 그 자체.

     츤 디에레는 내게 수도 없이 패배하면서 신성력이 점점 약해졌지만, 현재 창월여신에 대한 신앙이 가득한 현재 얀 디에레가 가진 신성력은 츤 디에레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

     츤 디에레처럼 마왕군에게 인류가 패배하고 창월여신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사실상 얀 디에레는 인류 최강자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력으로서도 손색이 없고, 용사님도 강한 동료가 늘어나는 것에 딱히 불만은 없으시겠죠. 용사님이 거부한다고 해도 현자님이 좋다고 하면 다 통과될 거고.”

     “딱히 그렇지는….”

     “괜찮아요. 전 알 수 있어요. 결국 모든 것은 마녀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이제 오드론 백작령을 떠나서 어디로 갈 지도.”

     “……그건 제 역할이니까요.”

     용사 파티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방향을 정하는 게 나의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성녀님께는 조금 불쾌한 곳으로 갈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네. 저는 어디든 따라갈 거랍니다. 설령 그게….”

     아마도 얀 디에레는 다음 목적지를 눈치챈 듯했다.

     “창월여신교로서는 금기시되는 장소라고 해도. 오히려 성녀니까 갈 수 있지 않겠어요?”

     대륙의 북부.

     “배교자들의 땅으로.”

     * * *

     그 시각, 오드론 백작령 리그레트 성 영주 집무실.

     “그러니까 내 딸과 함께 북부로 가겠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루키우스의 말에 오드론 백작은 침음성을 흘리며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북부가 어디인지는 알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알고 있습니다. 500년 전, 마왕군에 부역한 인류 반역자들이 추방당한 곳이지요.”

     “그렇네. 그리고 그들이…아직도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예. ‘설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500년 전.

     성녀 츤 디에레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친마왕파는 대부분 설원으로 쫓겨났다.

     누구나 동상으로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라 대부분 죽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남았다.

     마족이, 마인이, ‘설인’이 되어.

     피부가 온통 하얗고 머리는 백발이 되고, 인간으로서의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 된 그들은 인류의 적이 되었다.

     그래서 인류는 대륙 북부에 그들이 넘어올 수 없는 대장벽을 세웠고, 설인들을 지금도 감시하며 살아오고 있다.

     “가다가 얼어서 죽을 수도 있네. 그곳에서 나의 딸이 몹쓸 짓을 당할 수 있어. 그런데도 데려가야 하겠나?”

     “드로니엘이 결정한 일이고, 저는 드로니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루키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드로니엘은 제가 책임지고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무사히. 다치지 않고. 반드시.”

     “…지금.”

     오드론 백작은 눈을 빛냈다.

     “책임을 진다고 했지?”

     “예.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책임을 지게.”

     “…예?”

     오드론 백작은 입꼬리를 씩 비틀었다.

     “정실이 아니더라도, 첩실이라도 좋아. 제발 좀 데려가 주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아이, 자네가 안 데려가 주면 내가 큰일이 나게 생겼거든.”

     오드론 백작은 너무나도 편안한 얼굴로 루키우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오드론이라는 성 씨도 버리겠다고 선언한 아이일세. 자네가 책임지기로 했으니, 이제…음…자네 성씨가 뭐지?”

     “……드로니엘 아서도, 드로니엘 루키우스도 안 될 겁니다. 드로니엘은 계속 오드론일 것이며.”

     루키우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성씨는 없습니다.”

     “허어, 그런가…?”

     “예. 그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키우스는 담담한 얼굴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정이 끝난 뒤, 저는 아내가 될 사람의 성씨를 따라갈 거니까요.”

     저 멀리.

     붉은 머리의 마녀를 비롯한 루키우스 파티의 일원들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가…그렇다면 이름은-”

     “루키우스 입니다.”

     루키우스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을에서는 아서로 살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루키우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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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ro’s Mentor is a (Demon) Witch

The Hero’s Mentor is a (Demon) Witch

Status: Ongoing Author:
I, who was once the Demon King, have become a terminally ill beautiful girl who can't do anything. To survive, I became the witch of the Hero's party. ...No, I don't like the 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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