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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에이, 쯧.”

     

    거울 앞에 선 알베리치가 성의를 챙겨 입으며 혀를 찼다.

     

    내의원으로 출근 준비를 하는 도중이다.

     

    “이건 또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주케토가 잘 맞지 않아 괜히 성질을 냈다.

     

    사실 모자가 머리에 안 들어간 게 아니라 최근 가속한 탈모로 앞머리 라인이 후퇴해 위화감이 든 것이다.

     

    제도 한복판의 비싼 저택에 살며 직장에서는 최대 파벌의 우두머리다.

    부와 명예 어느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그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도무지 한 치유사 때문에 마음이 편치가 않다.

     

    라스 고트베르크, 다 그 녀석 때문이다.

     

    ‘실리를 중시하시는 헤이케 전하는 잡기술에도 관대하시지. 그건 그렇다 치자고.’

     

    이제는 황제조차 고트베르크가 개발한 음식을 먹고 약제를 복용한다 들었다.

     

    그가 게오르크파를 흡수한 건 물론이고 벌써 자신의 파벌에서도 이직자가 꽤 나왔다.

     

    고트베르크와 자원봉사를 다니며 치유사의 초심을 찾았다나 뭐라나.

     

    “치유술의 초심은 신앙심이란 말이다.”

     

    투덜대던 알베리치가 결국 주케토를 벗어 던졌다.

     

    “에이.”

     

    혼자서 씩씩대는 그의 주케토를 주워 곱게 펴주는 손이 있었다.

     

    “아침부터 화내시면 주름에 안 좋아요.”

     

    그의 아내가 온화한 말투로 알베리치를 달랬다.

     

    “씁, 알았소.”

     

    아내가 다정하게 주케토를 씌워주니 알베리치가 얌전해졌다.

     

    법국에서 주교직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자신을 믿고 묵묵히 따라와 내조해준 성심 고운 아내였다.

     

    그녀 앞에서까지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던 알베리치였다.

     

    “다 잘 풀리실 거예요.”

     

    “풀리기야 풀리겠지. 내가 누구요. 목휘궁의 주치의인 주교 디에고 알베리치 아니오.”

     

    “그럼요.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남편이고요.”

     

    아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알베리치를 긍정해줬다. 그만큼 신앙심도 깊은 좋은 여자였다.

     

    “고트베르크 그놈은 혈기만 믿고 설치고 있을 뿐이오. 내 그런 놈은 많이 봤지. 곧 제 발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질 게야.”

     

    “그땐 여보가 치유해주셔요.”

     

    “아니, 진짜 코가 깨진다는 게 아니라…”

     

    알베리치가 헛기침을 했다.

     

    “하여튼, 오늘부터 일성궁에 권터 1황자의 새 주치의가 올 거요. 전성기의 나만큼이나 신앙심이 깊은 치유사지.”

     

    “그러셔요? 잘 됐어요.”

     

    “음. 그에게 된통 혼나면 고트베르크도 조금은 기가 죽을 테야. 내의원에 혁신의 바람이 불 거요.”

     

    “점심 잊지 마시구요.”

     

    아내가 알베리치에게 도시락을 전해줬다.

     

    알베리치는 꾸러미를 받아들고는 내의원으로 향하는 출근길에 올랐다.

     

     

     

    ***

     

     

     

    “그래, 거기서 좌관상동맥 봉합 들어가고. 잘하네.”

     

    “어흡, 흐어업.”

     

    나는 클로에에게 수술 실습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당연히 진짜를 쓸 수는 없으니 돼지 심장을 구해다 혈관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꽤 손이 빠른 것이 간호사보다 외과의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내의원에 신경 써주셔서 저희야 좋습니다만 월광궁 쪽 일은 괜찮습니까?”

     

    작업 중이던 휴고가 내게 질문했다.

     

    “약혼식은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는지요.”

     

    “약혼식 말이지.”

     

    이제 와서 정식으로 식을 올리겠다는 아셀라의 주장은 뜬금없긴 했다.

     

    그래도 이유는 충분히 납득했다.

     

    나와 아셀라는 부모끼리 계약해서 맺어진 혼약 관계이고 공식으로 발표한 적이 없으니 비즈니스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부모에 휘둘린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켜서 아셀라와 월광궁의 위상도 함께 올리겠다는 거겠지.

     

    ‘근데 그러면 나중에 파혼했을 때 문제가 좀 더 커지겠는데.’

     

    연애 약혼인데 파혼했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이미지에 타격이 가지 않나.

     

    흠… 이건 잘 모르겠네.

     

     

     

    조금 궁금해져서 라우가에게 물어봤다.

     

    “귀족가의 연애 약혼? 있지, 있지. 요즘 시대에 얼마나 로맨틱하고 좋니? 어디 보자, 최근에는 클루크 남작네 둘째랑 메른도르프 자작네 장녀도 있었고…”

     

    실수였다. 따발총에 탄창을 넣어준 격이었다.

    라우가가 순식간에 사교계의 온갖 정보를 나불나불 늘어놨다.

     

    “아, 있긴 하군요?”

     

    “그럼. 그런 커플이 있으면 사교계에서도 얼마나 축복해주는지 몰라. 왜, 요즘은 다들 가문이 정한 대로 결혼하곤 하잖아? 가주 입장에서는 자식들 하나하나가 다른 가문과 깊은 계약을 맺을 기회니까, 가능하면 힘 좋은 가문과 이어지려고 하지.”

     

    “그게 보통이죠.”

     

    “아주 흔치는 않지. 귀족가 자제끼리 눈이 맞아도 결국 가문이 서로 어느 정도 타협할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얘, 못 들었니?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가문이 혼약을 허락 안 해준다고 둘이 야반도주했었잖아. 늪지를 지나다가 남자애가 다쳤거든.”

     

    “알버타 자작가 장남이요? 그러다 바실리스크에 쏘인 거였어요? 저한테 실려 왔는데.”

     

    “걔 다리 고쳐준 게 너였구나? 하여튼, 그래서 결국 자작이 손 들었다더라. 나 완전 감동했잖아. 아, 언젠가 내 남자도 그렇게 열정적이었으면.”

     

    라우가의 수다를 평생 받아주려면 초인적인 정신력을 가졌거나 귀머거리인 남자겠다.

     

    “과연. 그럼 연애 혼약은 파혼 날 일이 거의 없겠네요.”

     

    내 말에 라우가가 깔깔 웃으며 팔을 툭툭 쳤다.

     

    “라스, 너 되게 순진하구나. 연애 혼약도 정치적 혼약만큼이나 자주 파혼 나.”

     

    “그래요?”

     

    “그럼. 결혼은 성인부터 가능하잖아. 혼약은 보통 십대 때 하고. 그런데 서로 상대랑 동갑이긴 힘들잖아? 한쪽이 몇 년 먼저 성인이 되곤 하거든.”

     

    “그렇네요.”

     

    “그럼 대개 성인이 된 애한테 이런저런 유혹이 들어와서 정분이 나버려. 우리 나잇대 애들이 또 얼마나 혈기가 좋니?”

     

    우리 나잇대라고 표현했지만 라우가는 가십을 쫓는 게 어째 이모 같은 느낌이다.

     

    “아, 그러면 연애 혼약이 파혼 나도 아주 이상할 일은 아니겠군요.”

     

    “응응. 그런데 그건 왜? 뭔가 있구나?”

     

    눈치가 빠르고 입이 가벼운 라우가니 필요 이상의 정보를 주는 건 위험했다.

     

    나는 말을 돌렸다.

     

    “아는 귀족 친구가 파혼을 생각 중인데 가문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더라고요. 참고가 됐습니다.”

     

    “그으래? 흐응.”

     

    라우가가 슥 내 턱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럴 때 사람을 꿰뚫을 것 같은 눈빛은 역시 아셀라와 닮았다.

     

    “뭔가 재밌는 냄새가 나는데…”

     

    “냄새 하니 새로 개발한 세정제가 있습니다. 폼 클렌저라고, 얼굴과 손을 닦는 용도입니다. 비누에 비해 피부를 덜 손상시키고 촉촉하게 유지해주지요. 향도 좋아요.”

     

    “정말? 빨리 보여줘 봐.”

     

    라우가는 폼 클렌저에 신경을 뺏겨 파혼 이야기는 금방 잊어버렸다.

     

    그날도 금서궁에 화장품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덕분에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아셀라와 나의 정식 약혼식은 곧 연애 혼약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위장 연애까지 이용해서 사교계를 손에 넣으려는 아셀라였다.

     

    이거야말로 진짜 비즈니스 커플이지. 보는 사람들을 전부 속이잖아.

     

    성인식은 별 부담 없이 준비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오후 진찰을 위해 내의원을 나서던 찰나였다.

     

    “여기가 본관이오. 지금 일성궁의 사무실은 위치가… 윽, 고트베르크.”

     

    알베리치가 나를 보고는 독두꺼비처럼 턱을 부풀렸다.

     

    내 뒤를 따르던 팔켄하인이 먼저 그에게 인사 아닌 인사를 걸었다.

     

    “기운 넘쳐 보이시는구려, 알베리치 주교. 내의원 안내 같은 잡무도 도맡아 하고 계시는군. 훌륭한 자세요.”

     

    “물론이오. 누구와는 다르게 엄연한 황족의 주치의니 모범에 앞장서야 하지 않겠소.”

     

    “허허, 앞장서서 후퇴하는 주교의 앞머리를 보니 정말 솔선수범하시외다.”

     

    “어디 성호의 뚜껑만 하겠소.”

     

    “어이쿠, 왜 이리 날씨가 덥담.”

     

    팔켄하인이 주케토를 슬쩍 벗어 풍성해진 정수리를 자랑했다.

     

    반면 알베리치는 M자 탈모가 시작되어 이마가 넓어졌는데, 덕분에 그곳에 돋은 힘줄이 아주 잘 보였다.

     

    이 영감들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모양이다.

     

    “흥, 이쪽에 인사나 하시오. 권터 전하의 주치의로 새로 임명된 리비오 신관이오.”

     

    알베리치가 안내해주던 남자를 소개했다.

     

    가슴께까지 기른 장발을 단정하게 정돈하고 턱까지 올라오는 사제복을 입었다.

     

    “안녕하십니까, 리비오입니다.”

     

    단안경을 고치며 인사하는 남자의 말에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 어조가 일정했다.

     

    “리비오, 계시자 리비오 말인가?”

     

    팔켄하인이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그의 이름에 반응했다.

     

    “그렇게도 불리고 있더군요. 보잘 것 없는 소인에게는 과분한 호칭입니다.”

     

    리비오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리치가 당당하게 대신 나섰다.

     

    “사이먼이 일으킨 사건 때문에 법국이 사죄와 함께 보내온 특사요. 리비오 신관은 그 막대한 신앙심과 신성력, 그리고 계시로 유명하지. 법국에서 최근 떠오르는 최고의 실력자요.”

     

    법국 출신이었던 알베리치가 자부심을 가지고 가슴을 폈다.

     

    “앞으로 내의원에서 활약해줄 기대감이 크오. 신성력에 의한 진짜 치유가 뭔지 보여주겠지. 특히 네게 말이다, 고트베르크.”

     

    알베리치가 나를 삿대질했다.

     

    팔켄하인이 반박하려 나서기 전에 리비오가 먼저 말했다.

     

    “고트베르크 선생님이시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치유술 뿐만 아니라 의학을 사용해 많은 환자를 고치셨다고 하셨지요.”

     

    리비오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부족한 몸이지만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부디 의학이라는 기술의 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리비오는 꽤 정중하게 내게 인사했지만 나는 딱히 그에게 악수를 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흠.”

     

    이유는 간단했다.

     

     

    계시자 리비오 신관.

     

    나는 이 자의 얼굴을 아주 잘 안다.

     

    ‘황제 시해범.’

     

    그는 앞으로 발생할 황제 암살 사건의 진범이다.

     

     

    ‘사이먼이 빨리 퇴장해서인지 이놈의 데뷔도 앞당겨졌어.’

     

    본래 그가 제국에 오는 건 대략 2년 후다.

     

    말투는 정중하지만 기계 같은 미소 뒤에는 감정 없는 악이 숨어있다.

     

    ‘진단.’

     

     

    [상태 : 경계선 성격장애]

    [상태 : 중독]

     

     

    리비오가 지금 입 밖으로 내뱉은 문장에 진심은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그가 제국 내의원으로 흘러들어온 목적은 오직 거대한 혼돈과 파괴를 위해서다.

     

    한순간의 대붕괴를 위해 평생을 참으며 일반인인 척 의태하고 있다.

     

    ‘어차피 황제야 오래 살지 않겠지만.’

     

    리비오는 굳이 사건을 일으켜 문제를 크게 만든다.

     

    ‘황제 암살 건은 우리 가문이 뒤집어썼어. 고트베르크가 멸문할 단초를 제공할 자다.’

     

    나조차 깜빡 속을 정도로 겉으로는 선인을 연기하며 치유 능력까지 대륙 최고 수준으로 좋으니 악질 중의 악질이다.

     

    “리비오 신관.”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내의원에 너무 일찍 오셨어. 아니지, 너무 늦었다고 해야 하나.”

     

    이미 내의원에는 내 파벌이 자리 잡았다.

     

    멋대로 설치게 둘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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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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