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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유일한 수익 창출 수단을 상실한 괴물 서커스는 오전 이후로 거의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그나마 번 돈도 토마토 싸움을 일으켰던 세 서커스단의 사람들이 미안한 마음에 남은 코인을 털어준 것이었다.

         

       코인을 안 쓴 사람이 많으니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말자는 유라크네의 격려는 공허한 것이었다.

         

       아직도 코인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물건을 사는 거야 막판에도 할 수 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대한 소비하는 것을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승부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인가?’

         

       단원들 앞이라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엘라는 속으로는 자꾸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이번에 진다고 해서 대회가 끝나는 건 아니었다.

       다시 순번을 받아서 2, 3달 뒤에 또 시험을 치르면 됐다.

         

       그러나 다시 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까?

         

       6대 극장이 내건 시험의 주제는 2년 동안 유지됐다.

       즉, 2달 반 뒤에도 그들이 치르는 시험은 지금과 같은 것이었다.

         

       20명 남짓한 인원으로 다른 대형 서커스단과 맞붙을 수 있는 것은 마야의 스케치북이라는 마도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케치북을 어떻게 수리하거나 다시 구할 수 없냐는 질문에도 원더스타인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입니다. 수리는 아마 힘들 겁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모두가 절망했다.

         

       반면 물건의 주인인 마야는 침착했다.

       그냥 입술을 좀 깨물거나 한숨을 내쉬는 정도의 반응밖에 안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상당히 무심해 보이는 태도였다.

       애초에 물건에 애착이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엘라는 알고 있었다.

       그건 마야에게 있어서 울먹이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는 것을.

         

       그녀는 연습실 쪽을 바라봤다.

         

       마야는 몇 시간째 방에 틀어박혀 스케치북을 복구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그녀는 연금술 길드에 달려가 아카데미 학생증을 내밀고 온갖 시약을 한 아름 사 들고 와서는 이것저것 스케치북에 대고 뿌려봤다.

         

       그러나 스케치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종이마다 데칼코마니처럼 토마토즙이 번져 있을 뿐이었다.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그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렇게까지 동요하는 마야의 모습은 처음 봤다.

       엘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대를 가로지르며 빗발치는 토마토 세례를 마야는 염동력을 동원해 척척 막아냈다.

       특히 엘라의 근처로는 단 한 점의 파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더스타인의 부탁을 철저하게 지킬 요량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정작 자신을 방어하는 데 소홀히 했다. 뒤에서 날아오는 눈먼 토마토를 미처 보지 못했고, 스케치북을 명중 당하고 말았다.

         

       던진 것은 평범한 관객 중 한 명이었다. 그냥 열심히 붉은색이 안 칠해진 곳을 향해 던지다 보니 마야를 노리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새하얬으니까.

         

       스케치북이 젖으면서 그 안에 있던 그림들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물감인지 진흙인지 알 수 없는 색색의 액체들이 신음과 비명처럼 들리는 것을 내며 바닥에 스며들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야가 무엇을 쳐다봐도 다시는 종이에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더스타인은 마법의 힘을 잃어버린 스케치북을 보고도 마야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질책의 한 마디도 없었다.

       그저 안타깝게 됐다는 말 한마디를 하며 미소로 그녀를 위로했다.

         

       마야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준 마도구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마법사라면 스케치북이 지닌 힘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 만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마신들이 기거하는 세계, 어비스에서 온 물건이었다.

       마신의 마도구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에도 많이 퍼져 있었다.

         

       문지르면 거인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라든가.

       신으면 죽을 때까지 춤만 추는 구두라든가.

       사람을 빨아들여 가두는 호리병이라든가.

         

       마법적 공학적 기전 없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마신의 마도구가 가진 특징 중 하나였다.

         

       원더스타인이 준 스케치북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특별한 재료가 쓰이지도 별다른 가공이 더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강력한 마법의 힘을 발휘했다.

         

       마도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마신에게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가 준 스케치북은 완벽하게 그녀를 위한 물건이었다.

       앞면에 금박으로 새겨진 ‘마야의 스케치북’이라는 글씨가 없어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마법이 가진 약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 도구를 구해준 것이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확실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그것을 마신으로부터 받아낸 것이다.

         

       절대 쉽게 얻은 기회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작 본 지 며칠 본 소녀를 위해 그것을 사용했다.

         

       그가 무슨 대가를 치렀는지는 몰랐다.

       그의 성격상 캐물어도 웃으며 별거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일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그녀는 그 외에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녀는 이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마도사였다.

       마신의 힘을 빌려 쓰는 자.

         

       마도구를 가져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그가 옷을 갈아입히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됐다.

       그가 쓰는 마법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규칙과 무관한 것이었다.

       마력의 흔적도 자연계의 변화도 없이 ‘그냥’ 발현되었다.

       마신의 힘이 확실했다.

         

       무적자의 신분.

       마도의 힘.

         

       둘 다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서커스단의 단장이라니.

       은막 아르노도 명성을 떨친 지 10년 민에야 겨우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학계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곳이었다.

       마법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원더스타인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다닌다면 학계에서 백안시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걱정한 것일 것이다.

       자신의 제자가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마야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안타까웠다.

         

       그가 사용하는 것이 어떤 마신의 힘인지는 예상이 갔다.

       키르쿠스일 확률이 높았다.

       능력이 장난스러운 것도 딱 그의 신도들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옷을 갈아입히는 인스피라라…….

       그는 어떻게 그런 힘을 얻게 된 것일까.

       인스피라는 곡예사의 뛰어난 재주를 보고 그에 걸맞은 걸 내려준다고 들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베르그송 자작과 침실에서 걸어 나오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의 외모를 떠올려 봤을 때, 그 이전에도 많은 여자와도 엮였을 것이다.

       설마…….

         

       쾅.

       그 순간 연습실의 문이 열리며 방금 그녀의 상상 속에 등장했던 두 사람이 나타났다.

       원더스타인과 아나이스였다.

         

       그는 스케치북을 꼭 붙잡고 있는 마야를 보며 미소지었다.

         

       “아직 그러고 있었나요, 마야 양?”

       “……제 잘못이니까요.”

         

       원더스타인은 그녀가 생각보다 크게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아 의아했다.

       게임에서 나온 그녀의 성격은 무심, 무감, 무뚝뚝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곤 없이 묵묵히 자기 일에만 집중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입에 담다니.

       아직 어려서 그런가.

       게임에서의 그녀보다 무른 부분이 많았다.

         

       원더스타인은 그 모습이 왠지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다.

       미노바의 경우처럼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에게서 의외의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는 것이 즐거웠다.

         

       “마야 양, 그거 내버려 두고 밖에 나가지 않을래요?”

         

       마야은 고개를 저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툭 잘랐다.

         

       “제가 나가서 할 건 없어요.”

       “왜 없나요. 이건 축제잖아요? 즐기는 거죠.”

       “뭐를요?”

         

       그는 씩 웃으며 손에 든 상자를 들어 보였다.

         

       “안 보시렵니까? 우리의 마지막 비책을.”

         

       대회 종료까지 30분.

       샛별 서커스의 마지막 공연을 보고 나온 사람들은 매점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남은 코인을 모두 소모할 시간인 것이다.

         

       “원더스타인 쪽은 이제 끝인가.”

       “초상화를 더 이상 못 그린다잖아.”

       “역시 사업할 때는 한 아이템에만 매달리면 안 돼.”

       “어서 가자. 매점에 쓸만한 게 안 남아날라.”

         

       그렇게 로비로 나간 사람들은 의외의 광경과 마주쳤다.

       바로 텅 빈 샛별 서커스 쪽 매점 앞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괴물 서커스 쪽 매점 앞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온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려 카드 뽑기의 상품으로 그 ‘황금 토마토’가 걸렸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사, 사기 아니야?”‘

       “어째서 황금 토마토가 여기에?”

         

       황금 토마토는 한 국가의 원수나 종교 지도자, 대기업의 회장 정도나 맛볼 수 있다는 전설의 과일이었다. 그런 물건이 매점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베르그송 상회가 보장했으니 확실하오.”

       “베르그송? 아, 맞아. 괴물 서커스 후원자가 베르그송이었지!”

       “그럼 가능할지도…….”

         

       사람들은 서둘러 매점 쪽으로 달려갔다.

       혹시나 늦어서 카드가 다 팔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때, 2번 홀에서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외쳤다.

         

       “잠깐! 이의 있소!”

         

       사람들의 시선이 구석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열심히 카드팩을 뜯고 있는 도스빌 남작이 있었다.

         

       “왜 나를 보는 거요? 저 사람이 외쳤소.”

         

       도스빌 남작이 가리킨 방향에는 방금 소리를 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까 괴물 서커스 쪽에 와서 행패를 부린 노름패 건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카드팩을 뜯고 있는 도스빌 남작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도스빌 남작님! 뭐하고 계십니까? 저희가 샛별 쪽을 보러 간 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근데 왜 괴물 서커스 쪽의 카드팩을 뜯고 계십니까? 저, 저번에 남작님이 그러셨잖아요! 경품을 걸면 반칙이라고…….”

       “에효, 또 일반 카드네.”

         

       도스빌 남작은 카드를 탁 테이블에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쏠려 있었다.

       황금 토마토라는 말에 눈이 뒤집혀 달려들긴 했는데, 이거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건지 갑자기 의심이 든 것이다.

         

       “경품 걸면 누가 반칙이래. 반칙 아냐. 대신 경품의 유통가만큼 매출에서 제외한다고 했지.”

       “어, 어쨌든 그럼……괴물 서커스의 패배죠……? 황금 토마토는 무지……비싸잖아요?”

         

       건달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혼란에 빠졌다.

         

       도스빌 남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무식한 새끼들.

         

       “초대 섭정 각하가 황금 토마토를 처음 자신의 장인어른에게 선물했을 때, 큰 논란이 일었소. 섭정은 여왕을 대신해 국가의 행정, 외교, 국방을 대리할 뿐, 그분의 소유물을 선물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오. 꽤 중요한 논쟁이었소. 여왕님이 실종되고 섭정의 자리를 만들 때부터 그의 군주적 권한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함축하고 있었으니. 어쨌든 우리 섭정 각하가 장인어른에게 선물한 토마토는 다시 회수되었소. 여왕님의 소유물을 하사하고 베푸는 건 여왕님의 권리라 이거지. 섭정 각하는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되고. 같은 의미로 작위와 영지도 섭정이 건드릴 수 없으니 어쩌고저쩌고 자세한 건 뭐 역사책에서 배우시고. 비록 섭정 각하가 패했다지만, 그렇다고 황금 토마토를 썩혀 두는 것도 우습지 않소? 그래서 황금 토마토는 선물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거래되어왔소. 총리 관저의 잉여 농산물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말이오.”

         

       도스빌 남작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이목에 아까 느꼈던 패배감이 조금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그 가격은 1로티.”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1로티는 정부 자산을 거래할 때, 소유의 이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자주 써먹는 방법이었다.

       증여는 물권법상 회수나 취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로티라는 것은 샤를로티아의 화폐 단위이자 그 애칭 그대로 여왕 샤를로트의 얼굴이 새겨진 지폐였다. 여왕의 소유물을 거래할 때 쓰는 방식으로 아주 적절해 보였다.

         

       “거기다 베르그송 상회가 입수한 저 황금 토마토는 온실 정원사의 것이라 들었소. 따자마자 가장 신선한 상태로 먹으면서 자신의 권리를 30년 내내 자랑하던 사람이 준 거란 말이오. 규칙대로 저 토마토에 매길 가격은 1로티요.”

         

       도스빌 남작의 설명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전력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20분.

       다들 미친 듯이 카드팩을 사서 뜯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노름패 건달들도 섞여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이 시험편 마지막 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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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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