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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3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로 안심해버렸다.

        

       원래라면 나보다도 작았을, 이제 고작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품에 안겨 안심하다니, 솔직히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하건 옆에 있어 주겠다는 하늘이의 말은 그만큼 안심할만했다.

        

       어쩌면, 차라리 들켜버렸기에 마음을 터놓을 사람을 찾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직접 전부 털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마치 나쁜 짓을 한 것을 부모님께 들키고 차라리 잘 되었다고 시원하게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하늘이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하늘이는 내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알았어.”

        

       결국, 나는 그렇게 말했다.

        

       “말해줄게. 내가 알고 있는 곳까지는.”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하늘이는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자기 팔을 풀었다. 둘 사이가 조금 떨어지고, 그 사이를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그게 무슨 이야기건, 들어줄게.”

        

       하늘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

        

       이야기는 길게 끌지 않았다. 사실 해줄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기도 했다.

        

       내가 원래 다른 세상에서 살던 남성이라는 말을 해줄 수는 없다. 그걸 믿어줘도, 믿지 않아 줘도 문제니까. 사실 믿어줄 가능성보다는 믿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긴 하다. 이세계니 뭐니 하는 말을 누가 진지하게 믿겠는가. 사실 나도 아직 그쪽으로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조리하기만 하고 답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쪽 세상으로 오고 난 뒤에 내가 겪은 일들 뿐. 2달 하고도 2주 정도의 기간 정도의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듣고 난 하늘이가 물었다.

        

       “단순히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예사라’와는 다른 인격인지는 너 자신도 모른다는 뜻이야?”

        

       “그래.”

        

       분명히 ‘나’는 예사라가 자기 보호용으로 만들어낸 존재는 아니었다. 내가 일생의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천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저 방 안에 갇혀 지내던 어린아이가 절대로 상상하지 못할 세세한 부분까지 포함된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의 서울이 아니라, 내가 살던 세상의 서울. 그중에서도 중심가였던 종로나 명동, 종종 가곤 했던 대학가나 번화가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친구와의 관계, 가족, 직장, 군 생활 동안 겪은 일들이나 밖에서 사 먹었던 온갖 음식들을 나는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전부 예사라의 ‘상상’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인격이 거짓이라거나 기억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의 정체성이 너무나 선명했기에 생겨난 다른 걱정도 있었다.

        

       내가 다른 곳에서부터 넘어온 인격이라면, 이 몸에 있던 예사라의 원래 인격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넘어온 순간에 죽은 것이 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최나경을 봤을 때 이 몸이, 심장이 보인 반응은 대체 뭔지, 만약 몸에 기억이 있다면 단순히 ‘기억’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아주 깊은 곳에 예사라의 의식이 잠들어 있는 것인지.

        

       나는 지금까지 하나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하늘이의 말에는 나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우리 둘은 옥상 난간에 기대서 있었다.

        

       참 부주의하게도 여기에는 높다란 펜스 하나 서 있지 않았다. 만약 누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너머로 뛰어내려도 될 만큼. 옥상이 잠겨있지도 않았고, 누가 관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럴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저 아래 운동장에서 체육수업 중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려오고, 외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 멀리서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가끔 경적을 울리는 소리도 들렸지만, 이상하게 여기서는 시끄럽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고작 수업 시간에 잠깐 나와 있을 뿐인데도, 마치 세상과 분리되어 뚝 떨어져 버린 것 같은 이질감.

        

       이런 이질감을,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느껴봤다.

        

       어린 시절 아파서 조퇴했을 때. 방학 오전에 집을 나왔을 때. 어쩌다가 회사 일을 쉬게 되었을 때.

        

       ……예사라의 저택에 있을 때.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니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리는 그 감각은, 내가 이 세상에 미처 속하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예사라에게 있어 세상과 이어졌다는 기분을 받을 수 있는 순간은, 오로지 최나경 회장을 만나는 순간뿐.

        

       ……그런데도, 최나경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지 않았다.

        

       예사라는 그 최나경에게 무엇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늘이가 나에게 물어왔다.

        

       조금 전에도 했던 질문이었다.

        

       그래, 하늘이는 예사라를 모른다. 하늘이뿐만이 아니라, 이 학교에 있는 내 ‘친구들’은 예사라를 알지 못했다. 모두 나와 대화했고, 나와 친해진 친구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질문은 ‘나’를 향한 질문이었다. ‘예사라’가 아니라.

        

       “기억을 되찾고 싶어. 아니, 그게 기억이 아니라고 해도 좋아. 다시 찾아내고 싶어.”

        

       그 유서에 적혀있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나는 예사라의 무엇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랬다. 나는 그저 예사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와 예사라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불청객일 뿐이었다.

        

       물론 그렇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다. 아무런 가능성도 없을 바에는 차라리 이렇게 희미한 희망이라도 있는 편이 나았으니까.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로서는 무조건 잘된 일이고.

        

       “만약 그렇게 해서, 지금의 네가, 스스로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니게 되더라도?”

        

       하늘이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 물었다.

        

       “…….”

        

       만약 예사라의 ‘기억’이 나의 기억과 합쳐지면, 그때 그것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일까?

        

       만약 예사라의 인격이 이 몸으로 돌아오면, 그때까지 이 몸을 차지하고 있던 나의 인격은 어떻게 될까?

        

       모두 상상만 해도 두려워지는 이야기였다.

        

       나는 내가 대단히 선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기부는 거의 해 본 기억이 없고, 가끔 공짜 영화표 때문에 헌혈하는 정도가 내가 평소에 행하는 최소한의 선행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굳이 남 좋은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히 타산적이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쪽 세상으로 와서 예사라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저런 좋은 일을 많이 겪어버렸다.

        

       평소에는 한 번도 갈 수 없는 수준의 고급 레스토랑을 가보기도 했고, 삼시세끼 모두 훌륭한 식사를 하고 있고, 내가 평생 살아본 집보다도 넓은 방에서 살아봤고, 지금은 대놓고 ‘미소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수많은 여자아이와 친구가 되었다. 모두 전생에는 겪어본 적이 없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원래라면 그대로 죽었어야 했을 내가 예사라의 희생 때문에 삶을 연장해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돈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설령 돈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내가 그런 빚을 청산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평생 새장에 갇혀 살던 불행한 소녀가, 새장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준다면—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빚을 상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 만약 그렇게 되어서 내가 스스로 알던 내가 아니게 되더라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남의 몸을 차지하고 오래 지내려고 발악해봐야 추해지기만 할 뿐이다.

        

       지금 당장이야 방법을 찾는 중이지만, 원래의 주인이 돌아온다면 돌려주는 게 상식이지.

        

       “…….”

        

       내 대답을 들은 하늘이는 말없이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약속해줬으면 좋겠어.”

        

       내 말에, 하늘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만약 내가 사라지고, 이 몸에 원래의 ‘예사라’가 돌아오면, 그때도 나를 대하던 것과 똑같이, 친구로 지내줄 수 있을까?”

        

       “…….”

        

       하늘이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

        

       “만약 내가 사라지고, 이 몸에 원래의 ‘예사라’가 돌아오면, 그때도 나를 대하던 것과 똑같이, 친구로 지내줄 수 있을까?”

        

       그런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부터, 그러니까 사라가 말한 ‘원하는 일’을 들은 순간부터, 유하늘은 사라가 그런 말을 할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가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만약 내가 사라지고—

        

       왜, 왜, 그런 생각을 해?

        

       싫어. 너랑 헤어지는 건, 죽어도 싫어.

        

       이 몸에 원래의 ‘예사라’가 돌아온다면—

        

       그러면, 그건 이미 ‘너’가 아닌걸.

        

       똑같이, 친구로 지내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렇게는 하지 못할 거야.

        

       친구가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너와 똑같을 수는 없어. 그때 너의 몸에 있는 그 아이는, 내가 알던 ‘너’가 아닐 테니까.

        

       2주.

        

       고작 2주를 사귄 친구였다.

        

       누가 듣는다면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고작 2주일 동안 사귄 친구를 무슨 평생의 친구라고 생각하냐고.

        

       어쩌면 과거의 자신이 들었어도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사라는 달랐다.

        

       고립되어가는 자신이 내민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표정으로 잡아준 유일한 사람. 무슨 행동을 해도 그저 받아들여 주고, 곁에 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옆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그런 사라가 좋았다.

        

       그렇게 좋았기에, 싫다.

        

       하지만, 유하늘은 이미, 결심을 마친 뒤였다.

        

       자신이 그 결과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사라를 억지로 붙잡고 늘어져 봐야 사라만 고통스러워질 뿐이었다.

        

       그렇기에, 좋아하기에, 사라가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

        

       이미 그렇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하늘은 대답했다.

        

       “그래, 꼭. 그렇게 해 줄게.”

        

       그 말을 들은 사라는, 정말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사라의 머리가 흩날렸다. 쏟아지는 햇빛에 피부가 반짝이듯 빛났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랬기에 하늘은 웃었다.

        

       “반드시.”

        

       그렇게 다짐하면서.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라’를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디 자신이 지은 그 웃음이, 진짜로 환한 웃음으로 보일 수 있기를, 하늘은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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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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