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3

     원정을 나감에 있어, 모든 병서에서 하는 공통된 말이 있다.

     -출정 전에 후방의 안전을 단단히 하라.

     집을 비우는 사이 집에 도둑이 들지 않게 하는 것처럼, 본거지의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 저택은 그런 의미에서 옛 백작성 다음으로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아버지가 항상 곁에 있어주겠지만, 유사시에는 어머니가 혼자서 침실에 자신을 가두고 몇 달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나는 이렇게 안심하고 영지를 떠나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만한 실력도 실력이기는 하지만-

     “도련님.”

     “그래, 로버트 경.”

     “항상 이렇게 영지 사람들 몰래 이 구성으로 나오는 거, 끝까지 알리지 않을 겁니까?”

     “물론.”

     동행 인원으로는 나의 호위, 로버트.

     “겉으로 보면 모난 돌 그 자체인 그레이 지브롤터를 밖으로 자꾸 내보내서 일이나 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

     “안 그래도 영지민들이 하는 소리가 그겁니다. 도련님은 밖에서 뺑이치게 하고, 누아르 도련님을 편안한 장소에서 키우려고 하는 거라고.”

     “완벽하군.”

     누아르를 향해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도록 만드는 과정은 순항 중이다.

     “내가 꼭 지금 원정을 나가는 게 일개 기사와 같이 느껴져서 그런 거겠지? 멘테 경은 혹시 들은 바가 있습니까?”

     “백작령의 소중한 예산과 세금으로 이웃 영지 여행을 나가는 횡령범?”

     “그 또한 바라던 이미지로군요.”

     멘테 경이 들은 소문 또한 나의 대중적 입지를 약화시키기에 적당하다.

     “기사단 전력의 핵심인 ‘흑기사단’…누아르를 위한 기사단에서는 그 누구도 데려가지 않은 채, 오직 로버트 경만을 호위로 데려가는 원정. 그 누구도 이게 원정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죠.”

     따라오는 기사는 로버트와 멘테, 단둘뿐.

     “심지어 그 뒤에 따라붙는 시종들도 보육원 메이드, 그것도 제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 고아 출신이니.”

     그 뒤로 36번부터 81번까지, 총 6명의 화이트가 우리 뒤에 보좌로 따라붙었다.

     “36. 누아르가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던가? 요즘 너에게 부쩍 관심을 준다고 하던데.”

     “괜찮습니다. 글ㄹ…27번이 대신 유혹하고 있을 테니까요.”

     “걔들은 위험한 거 아닌가?”

     “흑기사단의 카를로스 경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카를로스 경이라면 믿을 수 있지.”

     지브롤터의 인재는 모두 누아르에게로 모이고 있다.

     “모르가니아에서 호되게 당하고 온 것도 벌써 2년 전이니, 또 정신 못 차리고 사고 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해야겠어.”

     “제가 전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내가 직접 전하도록 하지. 원정 끝나고 나서.”

     물론 그중에서도 카를로스 경과 같이 ‘이쪽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아르의 곁을 지키는 이들도 있다.

     “도련님. 카를로스 경에게 그런 이야기 자꾸 하면 안 됩니다.”

     “왜. 경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할까봐?”

     “농담 아닙니다. 그거, 진짜라고요.”

     “그건 맞지.”

     “……?”

     기사들 사이에서 뭔가 암묵적인 이야기가 오고 간 게 있던 걸까.

     “무슨 말인가?”

     “지브롤터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오탁을 뒤집어쓰기로 한 그레이 지브롤터를 위하여! 나 카를로스, 진정한 충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오탁에 발을 들이밀 것이니!”

     “…혹시 그 말을 그대로 한 거라면, 그런 소리조차 하지 못하게 확실히 경고해야겠군.”

     “그래서 더 이쪽에 오지 못하는 기사지. 흐흐, 도련님.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모아뒀을까. 응?”

     “그래서 그림자 기사단 아니겠습니까, 멘테 경.”

     카를로스처럼 밝게 빛나는 자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

     “이곳은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 지대. 지브롤터의 그림자. 이런 일에 어울리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여기에 오기 딱 적당하죠.”

     로버트 경도 원래는 아니었지만, 지난 5년 동안 내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 결과 이 그림자에 물들고 말았다.

     “다들 모르는 건 상관없습니다. 영지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지브롤터의 모든 이들이 좋아하는 이것.”

     나는 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대외적으로는 ‘마력초 가루’라고 알려진 마력 강화제의 원료를 저희가 수급하고 있다는 것.”

     “[캐롤라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크림슨 지브롤터 백작도 애용하는 마력 보조제 겸 저혈압 치료제.

     “로버트 경. 이 기사단에 있는 유일한 성인 남성으로서, 캐롤라인을 사용해 본 경험은 어떠한가?”

     “저는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는 것보다, 도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향초로 피우는 쪽입니다만!”

     “그럴 것 같았어.”

     소문이 무성하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저 ‘건강보조제’이거나 ‘마나 증진제’일 뿐이다.

     현재.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조차도 그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엄청난 웃돈을 주고 구매하고 있다는 물건.

     ‘졸지에 탈러보다 금화를 모으게 생겼네.’

     뒤에서 장사를 하는 건 현재 모르가니아에 맡겨둔 상태지만,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는 덕분에 딱히 중개 수수료는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

     “45번. 제국에서는 혹시 캐롤라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나?”

     “존재는 알고 있으나, 모르가니아에서 개발한 그….”

     “정해진 용도 외의 방법으로 쓰는 건 상관없지만, 원료만 들키지 않으면 돼.”

     제국에서도 캐롤라인의 정체를 알아내기는 알아냈으나, 아직 그것이 어디에서 생산되는지는 전혀 모른다.

     “우리가 원정을 통해 얻은 재료로 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지브롤터 보육원, 지하 연금 공방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유통, 모르가니아.

     생산, 지브롤터.

     청렴결백한 지브롤터 백작령, 협곡의 보육원 지하에서 ‘유사백은’이 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생산지는.

     “무능왕이 참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또한.

     “예. 정말이지, 의외로. 그…나리아 공주께 나중에 한 번 편지라도 보내시는 게?”

     “편지는 중간에 걸릴 일이 있으니, 나중에 직접 만나면 감사를 전하도록 하지.”

     왕도에서는 나와 비밀 협약을 맺은 누군가에 의해, 위장 공작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

     “나리아가 어그로를 끄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그림자에서 움직이자고.”

     * * *

     제국, 황태자궁.

     “이게 왕국에서 개발한 백은이라는 건가.”

     “어. 그래. 어때?”

     “…….”

     합스베르크 황태자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하얀 가루에 검지를 쿡 찔렀다.

     할짝.

     혀로 직접 맛을 보고, 일부 남은 가루를 코로 냄새를 맡는다.

     “…아니. 이건 백은이 아니다. 그냥 마력초 이것저것 섞은 것에 불과해.”

     “그렇지? 그런데 이거 빨고 막 불끈불끈해졌다고 하는 이들은 뭘까?”

     “…위약(僞藥)효과를 노린 건가?”

     황태자는 계속 가루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샘플을 잘못 가져온 거 아닌가?”

     “무슨 소리야? 이거, 왕궁으로 직접 들어가는 걸 내가 몰래 빼돌린 거라고.”

     회색 머리칼의 여인, 바토리는 볼을 부풀리며 성질을 냈다.

     “내가 그 먼 왕도까지 걸리지 않고 숨어서 이걸 찾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한 줄 알아? 왕국에는 뭐 마스터 없는 줄 아냐고. 그 모든 감각과 결계를 피해서, 심지어 피부까지 불타면서 기껏 간신히 샘플 구해왔더니!!”

     “너 말고 이 샘플을 구해온 이가 없으니까 아쉬워서 하는 소리다. 아직 매수는 온전히 진행되지 않았으니.”

     황태자는 아쉬움에 가루를 계속 손가락으로 비볐다.

     “위장용 연막으로 섞은 걸 얻어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노력해다오.”

     “으으, 이거 그냥 그런 거 아냐? 전하께서 노스트럼에 흘린 거, 세인트 지오가 양산해낸 거 아니냐고.”

     “흐음….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

     황태자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무능왕이?”

     “하반신은 절륜왕이라고 하던데, 이쪽으로는 유능하시겠지.”

     “…번식 기능은 일단 빼더라도, 수컷으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왕이라는 건가.”

     황태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판단 보류. 근거가 부족하다. 좀 더 정보를 모아야겠어.”

     “찌라시는 괜찮아?”

     “무슨 찌라시.”

     “무능왕에게 깔린 귀부인 집의 메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이거 관리하는 게 왕국의 공주라고 하던데?”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

     황태자가 눈을 반짝였다.

     “흐음. 과연. 그런 건가…? 아니, 그쪽은 오히려 더 가능성이 낮긴 한데.”

     “저기요. 나는 그냥 이야기를 전한 건데, 그런 식으로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하면 나는 모르거든?”

     “이것일 가능성.”

     황태자는 엄지를 치켜든 뒤, 자신의 손목시계 위를 꾹 눌렀다.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

     그리고 엄지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

     “주변을 조사해봐라. 수상한 이들과 접촉하는 걸 찾아. 그리고 혹시 뭔가 공주와 접점이 없는데도 사람을 영입하려고 한다면….”

     황태자는 시계알을 문지른 엄지로 하얀 가루를 문질렀다.

     “영웅이 될 인간인지 아닌지 한 번 파악해보고. 쓰읍, 후. 만일 알고 있다고 한다면….”

     황태자는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옅게 웃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백은 또한,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거겠지.”

     “애초에 이미 오래전부터 백은을 무능왕에게 찔러넣었잖아. 그걸로 복제 시도한 거 아니야?”

     “누가 시도했느냐가 중요하고, 누가 이 짝퉁을 만들어 냈느냐도 중요해. 아니면….”

     사라락.

     “이런 가짜를 마치 진짜처럼 효능이 있다는 식으로 위장하려고 한 ‘발상 자체’를 한 인간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한둘이 아니네.”

     “하지만 찾아낸다면, 대응은 더 쉬워진다.”

     황태자는 가루와 함께, 종이봉투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미래를 얼마나 보고 있든, 그건 미래지 현재가 아니니까.”

     사르르.

     “아직은 가능성이라면.”

     가루와 종이봉투가 불에 타들어 가는 것처럼 소멸하며, 황태자의 손안으로 흡수되었다.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 * *

     세빌리야 남작령.

     지브롤터가 협곡의 비호를 받는다면, 이곳은 마수 오염지대의 비호를 받는다.

     비호라고 하는 게 맞을까?

     심심하면 마수나 마족들이 오염지대를 벗어나 숲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곳인데.

     ‘비호지.’

     마수는 일종의 야생동물이다.

     짐승과 다를 바 없고, 사냥꾼만 넉넉하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제국의 병사들은 다르다.

     

     마수에게 당하는 건 일격에 살해당하거나 잡아먹히는 걸로 끝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면 비참한 노예가 되어 살해당하기 마련이다.

     ‘왕국을 향한 증오가 500년 동안 쌓였는데, 그게 그리 쉽게 사라질까봐.’

     전쟁이 생각보다 쉽게 끝나기도 했고, 매국노 크림슨 지브롤터가 그래도 건재해서 눈치를 봐서 그 정도였지-

     ‘괜히 2등 시민이 아니었지.’

     제국민들은 왕국인들을 불가촉천민과도 같이 취급했다.

     2등 시민으로 인정받는 이들은 왕국 내에서도 일찍 제국에 합류한 기득권세력이거나 수도, 혹은 대도시에 사는 중산층이었을 뿐.

     제국에 있어 쓸모없는 농민, 하류층, 빈민층을 상대로 일어난 ‘인간 서커스’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제국이 수많은 국가를 지배하며 그 나라를 다스린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지배한 국가를 반으로 갈라치기 하는 거지.

     황제가 그랬다.

     -제국을 따르는 자들에게 법의 집행권을 준다거나 권력을 줘서, 그들이 하류층을 제어하고 억제하도록 만드는 것이야.

     제국의 2등 시민이 된 이들은 왕국의 국기를 스스로 찢고 불태웠고, 자신이 제국민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다소 과장된 행동까지 하고 나섰다.

     왕국에 충성하는 이들을 잡아다가 거리에서 돌팔매질한다거나.

     그저 왕국에서 태어났을 뿐인 일반인을 ‘혁명군’ 소속이라며 고발한다거나.

     혹은 자경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제국 입장에서는 배신자인 이들을 고발하고 나선다거나.

     공포와 철혈에 의한 지배.

     황태자는 본인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지만, 굳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막후에서 조종만 할 뿐이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이곳.

     “제 고향에 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련님. 그리고 여러분.”

     노스트럼 왕국 서북부, 마수 오염지대의 최전선.

     “세빌리야, 언제봐도 평화로운 곳이죠?”

     지금처럼 완전히 오염지대가 마수로 점령되어 길이 끊기기 전, 제국의 일부 난민들이 기어이 오염지대를 뚫고 넘어와 왕국에 정착한 옛 난민촌.

     “그냥 보기에도 평범한 농촌 마을이랑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만…하하.”

     이곳은 약 6년 뒤.

     “마수들 날뛸 때를 제외하면 평화로운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조용한 동네입니다.”

     매국노 그레이, 21세.

     -도시 하나를 불태워 왕국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면, 수만 명의 목숨 정도는 싸게 먹히는 셈이지.

     

     제국의 2등 시민들에 의해 ‘대숙청’이 일어나, 평야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수만 명이 불에 타 죽게 된다.

     “제일 유명한 건 역시-”

     “소.”

     농촌.

     소는 가축이며, 농기구로써 활용되는 생물.

     “로버트 경. 여기 사람들 말이야, 마수 오염지대에서 자란 풀을 먹고 자란 소를 잡아먹고 그러지는 않겠지?”

     “도련님. 그건 이 동네 사람들에 대한 혐오입니다. 아무리 저희가 배고프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그래도, 설마 마수화 되어 미쳐버린 소까지 잡아먹고 그럴까봐요?”

     “…….”

     “농담도 참.”

     “그래. 농담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 그런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잖습니까.”

     “그러게.”

     지금은, 그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단계일 뿐.

     “부디.”

     푸드득.

     “그런 일이 있어서, 지브롤터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푸른 하늘의 위, 검은 날개의 까마귀들이 떼 지어 제국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

     이번에는.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