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움을 멈춘 두 여자의 대화는 간결했다.
불필요한 수사나 불쾌한 과장 따위는 한 마디도 들어있지 않은 채, 그저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을 짧게 나열했을 뿐이다.
앨리스는 마리아의 최후와 실비아가 용사의 의무를 제 의지로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실비아는 자신이 그 사악한 마왕을 죽이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로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멍청하게 되묻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 빌어먹을,”
“씨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욕설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 뿐,
두 사람 사이엔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앨리스였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용사 실비아.”
“…”
“네가 실패한 그 과업 때문에 이 세상이 실시간으로 멸망하고 있어.”
“…”
“마리아까지 희생시킨 주제에 실패한 네년을 용사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이 더러워지는 것 같지만, 네 그 괴물 같은 힘은 아직 건재한 모양이니”
앨리스는 바닥에 주저앉은 실비아를 천천히 지나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을 주워들었다.
검 손잡이는 손아귀 모양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실비아가 복부에 박힌 검을 뽑아낼 때 세게 쥐었던 탓이었다.
“…칫,”
앨리스는 표정을 구기며 혀를 찼다.
분하게도 실비아의 힘과 무력은 과연 용사라 부를 만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방금까지의 싸움에서 상대를 더욱 압도했던 사람은 분명 실비아였다.
금기를 넘나드는 끔찍한 실험과 종교적 주술을 엮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용사 앨리스의 힘은 끝내 그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그녀는 검도 들고 있지 않았다.
앨리스는 차분히 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성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곤 검 끝을 검집에 넣기 위해 허리춤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나를 따라와,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네 역할을 완수해.”
“…”
“실비아.”
실비아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은커녕,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리아의 희생을 곱씹고 있기라도 하는 걸까?
그렇다면 더더욱 저렇게 멍청하게 앉아있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내 소중한 친구를 죽게 했으면, 그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녀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응당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게 도리일 텐데!
앨리스는 울화가 치밀어, 집어넣으려던 검을 다시 빼 들어 실비아의 뒤통수에 겨누며 말했다.
“뭘 멍청하게 앉아있어, 병신같은 년아. 설마 마리아의 희생을 의미 없게 만들…”
실비아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앨리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 즉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표정은 기겁할 만큼 무표정했다.
도저히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저 부자연스러운 눈빛과 표정은 언뜻 징그러워 보일 정도였다.
또다시 앨리스의 눈구멍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신성력이 그녀의 몸을 자동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임은 알지만, 도저히 두 눈을 질끈 감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눈알이 이글거렸다.
“읏,”
눈알을 모조리 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열기에 안구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이 통증 때문일까.
아니면 저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시커멓고 불길한 붉은 눈깔과 표정 때문일까.
앨리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턱 끝에 맻혔다.
그 순간, 실비아의 뒤틀린 목소리가 앨리스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싫어.”
*
앨리스는 한 손으로 한쪽 눈을 꾹 짓누르며 반대쪽 눈을 부릅떠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이성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잘 못 들었나 싶을 만큼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앨리스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안 할 거야.”
“그게 무슨… 개 병신같은 소리야, 너 이 씨발!”
실비아의 주먹이 순식간에 앨리스의 얼굴로 꽂혀 들어왔다.
앨리스의 몸이 한순간 뒤로 쭉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가 이내 허리부터 찢어졌다.
분리된 그녀의 상 하체는 내장을 흩뿌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붙으며 뒤로 크게 날아갔다.
실비아는 고개를 연신 저으며 천천히 앨리스를 향해 걸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바이올린의 얇은 현을 마구 할퀴는 듯한 뒤틀린 목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로 기이하게 퍼져나갔다
“싫어… 용사 따위, 너나 해… 나는… 애쉬랑 여기서 살 거야.”
“너… 이 쌍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앨리스의 경멸어린 욕지거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실비아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싫어, 용사… 그딴 거, 나는 단 한 번도 하고 싶었던 적 없었어, 너나 해. 너나 싸워. 난 이제 싫어, 싫어, 싫어, 그만, 싫어, 안 할 거야. 싫어, 안 할래, 못해.”
평생을 투쟁 속에 살아왔다.
아니, 투쟁 속에 갇혀 지냈다.
철이 들 무렵…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아마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도 그녀는 늘 싸우고, 늘 경쟁하며, 늘 죽여왔다.
용사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이유 역시도 그래서였다.
어차피 평생 휘둘러온 검이고, 평생 누군가를 베어온 삶이기에, 기왕이면 인류의 도움이 되는 게 나으리라는 안일한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용사랍시고 떠받들어지는 것이 쑥스러우면서도 은근히 마음을 고양시켰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기야, 그 정도의 달콤함조차 없었다면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숲에 자신을 가둬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는, 그 고통스러운 고독을 끌어안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투쟁의 삶을, 용사의 숙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인생에 그 외의 다른 아름다운 순간들을 알아차릴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투쟁 외의 또 다른 세상을 맛보았다.
한 번도 경험이 없었기에 자신이 그걸 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황홀한 단맛.
애쉬 덕분에 알게 된 이 새로운 삶의 향기는 너무나 향긋해서, 실비아의 뇌를 마구 주물러놓았다.
“왜, 나는 언제까지 싸워야 해? 왜 그래야 해?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돼? 다른 놈들은 놀아? 왜 나만? 왜 나만 해야 하는 거냐고!”
실비아는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생떼에 대한 대답은 말이 아닌, 검으로 다가왔다.
앨리스가 휘두른 검이 실비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네가 마리아를 죽게 만들었으니까지 이 씨발년아!”
앨리스는 소리를 지르며 실비아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거칠게 당겨 뽑았다.
뜨거운 핏줄기가 쭉 솟아올라 앨리스의 얼굴에 튀었지만, 그녀는 닦아내지도 않은 채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 무책임한 년아.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으냐? 마리아를 죽게 둔 네가 애쉬의 옆에서 안식을 취하겠다고? 진짜 양심도 없지!”
어찌나 분노했는지 고함을 지르는 앨리스의 목소리가 거칠게 쩍쩍 갈라졌다.
앨리스의 검은 그녀의 분노를 닮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실비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오히려 감격의 안쪽으로 뛰어들어 양팔을 교차해 위로 치켜들었다.
실비아의 팔은 검이 아닌, 앨리스의 팔을 받쳐 그녀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익!”
앨리스는 빠르게 검을 거두려 했으나, 뒤틀린 손잡이가 불편했던 덕문에 잠시 주춤거렸다.
그 사이 실비아의 억센 손아귀는 앨리스의 손목을 꽉 틀어쥐었다.
앨리스는 붙잡히지 않은 쪽의 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실비아의 뺨을 내리갈겼다.
단단한 건틀릿에 신성력을 가득 담아 내려친 일격에 실비아는 고개를 휘청거리면서도 앨리스의 손목을 꽉 붙들어 매며 입을 열었다.
“그놈의 마리아.”
앨리스는 크게 숨을 삼켰다.
이 미친년,
설마 마리아를 모욕하려는 건가.
마리아는 앨리스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였으나, 분명 실비아에게도 그럴 터였다.
앨리스의 핏줄과 힘줄이 온몸의 피부를 뚫고 올라올 기세로 크게 부풀며 꿈틀거렸다.
“신중히 입을 열어라, 죽여버린다.”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
“이 년이…”
앨리스는 실비아의 그 간악한 주둥이를 틀어막으려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녀의 주먹을 이마로 받아내며 붙잡은 앨리스의 손목을 으스러뜨렸다.
마른 나무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를 내며 손목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였지만, 앨리스는 이빨을 꽉 깨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이 빌어먹을 년에겐 결코 나약한 비명을 들려줄 수 없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런 앨리스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제 할 말만 연신 중얼거렸다.
“마리아가 죽은 후, 평생을 괴롭힘당해왔어, 악몽 속에서, 평생… 은 아니겠지만, 내 체감으로는 그랬어.”
“…뭐라는, 크윽, 뭐라는 거야, 이 씨… 브아악,”
“너무 힘들어, 너무 괴로워, 그만하고 싶어 이젠,”
실비아는 이미 부러진 앨리스의 손목을 다시 한번 쥐어짜듯 틀어쥐었다.
꽉 깨문 앨리스의 잇새 사이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비명은 참아냈지만, 부러진 손목에서 힘이 빠지는 것마저 견뎌낼 수는 없었다.
스르륵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떨어진 검을 실비아는 낚아채듯 잡아 쥐었다.
앨리스는 순간 크게 숨을 삼켰다.
실비아는 마치 권총을 들이대는 것처럼 앨리스의 배에 칼 끝을 들이밀며 말했다.
“난 이제 애쉬만 생각할 거야. 용사 같은 건 너나 해.”
“… 하, 남의 약혼자에게 집착이 심하시네, 걸레 같은 년,”
“솔직히, 이젠 쉬어도 되잖아. 나. 이만하면 됐잖아. 응? 네가 하라고.”
“애쉬는 내 약혼자야. 내 가족이라고 이 미친년아!”
앨리스는 있는 힘껏 자기 이마를 실비아의 얼굴에 갖다 박았다.
뜨거운 철퇴에 얻어맞은 듯한 통증과 함께 실비아는 코피를 흘리며 표정을 구겼다.
“그래, 그랬지, 잊을 뻔했네,”
실비아는 앨리스의 손목을 붙잡아 당기며 그대로 그녀의 뱃속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칼날의 끝이 뱃가죽을 뚫고, 뱃속을 휘젓다 앨리스의 등으로 빠져나오기까지, 그 짧은 찰나 동안, 실비아의 손목은 유연하게 움직이며 앨리스의 속을 다 갈아버릴 기세로 칼끝을 휘저었다.
확실하게 적을 죽이기 위한 훈련을 오랜 기간 해왔기에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기술이었다.
앨리스는 입으로 양손 가득 찰 만큼의 피를 한 번에 토해냈다.
실비아는 자신의 어깨 위에 힘없이 머리를 떨어트린 앨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귓가에 천천히 속삭였다.
“그랬지, 너는 애쉬의 약혼자였지.”
실비아의 말이 들리는지, 앨리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신성력으로 몸을 회복하고는 있었지만, 실비아는 자신의 힘과 재능을 악마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붙잡고 있는 손목이 조금 단단해지는 것 같을 때마다 한 번씩 힘을 주어 다시 부수었고, 뱃속을 휘젓는 칼날에 저항감이 느껴질 때마다 새로이 배 속을 쑤셨다.
앨리스는 울컥울컥 차오르는 핏덩이를 연신 실비아의 어깨에 쏟아내며 계속 경련할 수밖에 없었다.
“… 그거 알아?”
“…”
“나 이미 애쉬랑 섹스한 거.”
“…이, 이익,”
“애쉬가 나보고 사랑한다고 한 거”
“키익, 윽”
“내 안이 너어무 기분 좋다고 말해준 거. 그리고 나도 엄청 기분 좋았다? 넌 애쉬가 얼마나 섹스 잘하는지 모르지?”
“크으이익, 씹,”
실비아는 얕게 웃었다.
앨리스를 비웃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애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행복한 미소를 막을 수 없던 것이었다.
“애쉬는 내 거야.”
실비아는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만 넘기면,
“날이 밝아오면, 나는 또 애쉬랑 섹스 할거야. 매일매일.”
앨리스만 어떻게든 처치한다면, 애쉬와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애쉬는 절대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실…비아아아!”
“네가 이해할 때까지 몇번이고 죽여 줄게.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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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삼일 님 50코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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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화 요약
앨리스 : 개새끼야
실비아 : 시발새끼야
앨리스 : 존나 개새끼야
실비아 : 존나 시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