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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4

       다음날.

         

       파스텔은 서로 어색하게 된 소녀 둘 사이에서 끼인 처지가 됐다.

         

       으이잉.

         

       오른쪽을 보면 멜리사가 괜히 양피지의 지도를 확인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깃펜을 까딱이는 게 엄청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태 걷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걸 보면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그냥 어색해서 괜히 딴짓하는 중이었다.

         

       왼쪽을 보면 짐가방 세 개를 짊어진 앨시어가 멍하게 걸음을 옮겼다. 친구 0명 인식에 살짝 영혼이 나간 표정이다.

         

       허윽.

         

       나쁜 멜리사.

         

       평소엔 융통성 있게 상냥하면서 앨시어한테만 딱딱해. 이것이 부모님 말 잘 듣는 모범생의 유감스러운 면모?

         

       반응을 보고 굉장히 미안해지긴 했는지 멜리사가 힐끔힐끔 눈치를 봤다. 막상 사과의 말은 못 했지만.

         

       너희 생각보다 굉장히 심각한 상태구나. 서로 사이가 좋아지고는 싶어 하는데 둘 다 서툴러.

         

       파스텔은 절찬리 고민했다.

         

       어떡해야 사이가 좋아질까.

         

       멜리사 성격상 먼저 사과는 할 테니…….

         

       “멜리사! 지도 보여줘!”

       “아, 여기요.”

         

       파스텔은 지도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잉오잉.”

         

       엄청난 문제.

         

       “무슨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나요?”

       “우리 지금 조사 속도가 느린 거 같아!”

       “그래서 곧장 2층으로 이동하려던 거 아닌가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고오. 인원 분배를 좀 하는 게 어떨까 싶어. 다 같이 다니니까 조사가 느리네.”

         

       멜리사가 의아해했다.

         

       “그러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희 홀수잖아요.”

         

       푸푸 푸푸.

         

       틀렸다는 양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파스텔은 2인분이니까 2명이야!”

         

       그런 것이었다.

         

       “파스텔 당신은 2인분이 맞긴 하죠.”

         

       멜리사가 말하다가 멈췄다. 그 논리면 자신과 앨시어가 팀으로 다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움찔했다.

         

       “그래도 혼자 다니는 건 좋지 않아요. 이건 주의력의 문제거든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혼자라면 치명적인 오판을 할 수 있죠.”

         

       으에.

         

       너무 타당한 걱정.

         

       “앨시어가 짐만 들고 다닐 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인원을 나눠 역할을 효율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효율화 때문에 저희가 여기 침입할 수 있던 거 아닌가요? 기사단도 그런 생각으로 유적의 감시를 소홀히 했겠죠. 하지만 예비 인력은 언제나 중요해요.”

         

       파스텔은 깨달았다.

         

       우등생과 논리로 맞붙으면 안 되는구나.

         

       체감되는 예시가 즉석에서 나오니 반박하기 곤란해.

         

       크래프트 각하로서 교단에 대한 조사 속도를 올리고 싶기도 했던 파스텔은 잠시 고민했다.

         

       그냥 진지하게 요구할까.

         

       그런데 성격이 이중적이라는 오해를 받는 걸 생각하면 괜히 이상한 확신만 줄 거 같고.

         

       으이이.

         

       “저거 신성어 아니야?”

         

       앨시어가 통로 한편을 가리켰다.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앗! 맞아!”

         

       파스텔은 후다닥 달려갔다.

         

       “오잉오잉.”

         

       이것은 이것은.

         

       “전방에 추락 함정 있음!”

         

       전방을 살펴봤다. 텅 빈 통로가 보였다. 평화로운 광경이다. 신성어를 몰랐다면 무조건 당했을 환경이었다.

         

       파스텔은 앞으로 나서며 주의를 줬다.

         

       “얘들아 조심해! 특히 멜리사!”

         

       뒤돌며 친구를 가리켰다.

         

       “대마법사가 되고서야 비행할 수 있다며! 연약한 마법사의 신체는 이런 함정에 매우매우 취약하니까 아주아주 조심해!”

         

       어디선가 달칵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헛.

         

       이것은 함정의 소리.

         

       “모두 조심해!”

         

       파스텔은 양팔을 펼쳤다. 일단 멜리사와 앨시어의 안위부터 살폈다. 뒤쫓아 오던 건 아닌지 멀쩡했다.

         

       대신 둘은 벙찐 표정으로 쳐다봤다.

         

       다들 괜찮잖아?

         

       어디서 들린 소리였던 거지?

         

       파스텔은 문득 부유감이 느껴졌다. 활짝 열린 바닥으로 몸이 추락했다.

         

       “우아아앙!”

         

       빈 공간이 끝없이 이어졌다.

         

       파스텔 살려어어!

         

         

         

       #

         

         

         

       “우아아아앙!”

         

       분홍 머리카락이 정신 없이 나풀거렸다.

         

       『진정하고 나이프를 꺼내라.』

         

       파스텔은 허둥지둥 나이프를 꺼냈다.

         

       “연착륙! 연착륙!”

         

       나이프가 비행하더니 발아래에 닿았다. 몸무게가 실리고 출렁이다가 점점 멈췄다.

         

       파스텔은 추락하는 구덩이 어딘가에서 부유했다.

         

       “흐아! 흐아!”

         

       품에서 떨어진 마비 포션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광경이 내려 보였다. 잠시 뒤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완전 깊어!

         

       죽을 뻐언!

         

       “악마님 저 진짜 죽을 뻔!”

         

       납작납작 파스텔이 될 뻔했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바로 아래 창살 함정이 있었을지라도 잘 대처했겠지.』

         

       으아아.

         

       호르몬 친구가 잘했을 거 같긴 한데 보호자로서 조금 더 극렬한 관심을 보여주세요오.

         

       식은땀을 훔치며 위를 올려봤다. 얼마나 떨어진 건지 본래 입구가 작게 보였다.

         

       “파스텔! 괜찮나요?!”

         

       상반신을 내민 멜리사가 엄청 걱정스럽게 내려봤다.

         

       양팔을 휘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멀쩡해!”

       “다행이에요!”

         

       멜리사가 안도했다.

         

       『그런데 방금 소리 들었나?』

       “네? 뭐가요?”

       『유리병이 깨지며 울리는 소리 말이다. 울리는 파장을 듣자 하니 아래에 열린 통로가 있는 거 같군.』

         

       오잉.

         

       파스텔은 다시 내려봤다. 끝도 없이 깊은 구덩이가 보였다.

         

       평범한 방식으론 찾기 어려운 숨겨진 공간?

         

       남들 앞에 떳떳할 수 없는 사람들이 딱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멜리사를 올려봤다.

         

       “일단 인원을 나누자! 난 여기를 조사하고 갈게! 내일 밤 기존 거점에서 만나도록 해!”

       “파스텔?!”

         

       경악하는 외침을 무시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나이프 친구! 오랜만에 힘을 내! 빗자루 친구보다 선배라는 사실을 증명하라구!”

         

       슝슝.

         

       계속 내려갔다.

         

       잠시 뒤 마비 가스가 터져버린 새하얀 지면에 닿았다. 어쩐지 신성해 보이는 하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우왕?”

         

       나이프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봤다. 신비로운 횃불이 벽면마다 설치돼 일렁였다. 소리에 집중하자 경건한 차분함이 느껴졌다.

         

       『호오? 이 존재감은. 여긴 정말 성지군. 신이 신경 써 만든 곳인가.』

         

       “정말 성지요?”

         

       기존 구역과 어떤 차이가 생긴 거지? 외견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마검을 봐봐라. 신성 때문에 마검의 봉인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군.』

         

       오잉.

         

       파스텔은 검을 들어 올렸다. 자세히 살펴보자 굉장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봐도 전혀 모르겠어!

         

       “악마님 이건 비밀이지만 파스텔은 바보바보라 모르겠는, 우와악!”

         

       파스텔은 어느새 앞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악마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아직 손에 들린 마검을 보곤 두 번 놀랐다.

         

       “악마님이 둘!”

         

       악마가 손을 쥐었다 폈다.

         

       『둘이 아니라 봉인이 느슨해진 거다. 마검과 강제로 일치됐던 신체가 분리된 것이지.』

         

       분홍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봉인된 대악마에서 봉인이 느슨해진 대악마로 진화하신 거예요?”

         

       위기감이 두근두근.

         

       대악마를 풀어버렸다는 배덕감이 오싹오싹.

         

       분홍분홍 파스텔에서 보라보라 파스텔로 타락할 거 같아.

         

       『반응이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악마가 어이없어했다. 손을 뻗더니 분홍 머리를 헤집었다.

         

       “으아아! 헤어 망가져요!”

         

       악마님이 아니었다면 정색할 행동!

         

       『내가 만들어 준 거니 내 마음대로다.』

         

       완전 악마!

         

       파스텔은 도망쳐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마검도 고장 날 성지면 악마님 여기 계속 있으시면 안 좋고 막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다. 오히려 근원이 같으니 이곳에서라면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겠지.』

         

       악마가 다가와 헤어스타일을 재정리해 줬다. 파스텔은 머리카락이 정리되는 간질거림을 느꼈다.

         

       『이러면 한시름 덜었군. 기사급과 마주치면 잘 도망칠지 걱정이 되긴 했었는데 말이다.』

         

       허억.

         

       그런 말을 하시면.

         

       “저 이제 인맥 믿고 까불대는 파스텔이 되면 되는 거예요?”

         

       우와.

         

       완전 즐겁겠다!

         

       『왜 그런 마인드가 먼저 나오는 거냐.』

         

       악마가 헤어스타일을 다시 헤집었다.

         

       “우아앙!”

         

       나쁜 악마!

         

         

         

       #

         

         

         

       “도서관일까요?”

         

       악마가 책을 꺼내 살펴봤다.

         

       『그것보다는 기록 보관소 같군. 신전이 좋아하겠어.』

         

       파스텔은 성지를 돌아다녔다.

         

       성지는 기존 유적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넓었다. 인기척 하나 발견하지 못한 게 공간이 넓어서인지 사람이 없어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이 정도로 넓으면 도시 규모가 아닐까.

         

       교단이 숨어 있더라도 넓은 도시에서 약속 없이 마주치는 정도의 난이도.

         

       “신전은 좋아해도 전 책 안 좋아해요!”

       『자랑이 아니다.』

         

       도서관 구역에 잘못 발을 디뎠다가 하얀 책장만 계속 나오자 슬슬 정신이 지쳤다.

         

       “라즈베리, 애플파이, 체다치즈, 슈크림롤, 후라이드 치킨.”

         

       파스텔은 말하다가 혼자 깜짝 놀랐다.

         

       “후라이드 치킨?!”

         

       갑자기 그렇게 튀어나오면 곤란곤란해.

         

       『흠?』

         

       악마가 턱을 문질렀다.

         

       『치킨이 먹고 싶은 건가?』

         

       듣고 보니 그럴지도.

         

       출출한지 저 너머에 환각 같은 게 보였다.

         

       하얀 책장 사이로 사람만 한 아기새가 걸어 다녔다.

         

       삐약 삐약.

         

       “허억! 치킨이 걸어 다녀요!”

         

       얼마나 배고픈 거야!

         

       ―삐약?

         

       아기새가 돌아봤다.

         

       오잉.

         

       환상이 아니었던 거임.

         

       ―삐야악?

         

       아기새가 머리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오이잉.

         

       파스텔도 덩달아 머리를 갸웃했다. 치킨 친구가 어쩐지 초면 같지 않았다.

         

       “우리 혹시 아는 사이?”

         

       식탁에서 마주쳤다거나.

         

       ―삐약?

         

       아기새가 더 머리를 갸웃했다.

         

       『방학 때 하늘고래의 등 위에서 만났던 새군.』

       “아아아앗! 기억 났어!”

         

       파스텔은 아기새를 가리켰다.

         

       “방학 때 하늘고래의 등 위에서 만났던 아기새!”

       ―삐야악?!

         

       아기새가 부리를 벌리며 경악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라는 외침이었다.

         

       파스텔은 덩달아 경악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나쁜 교단에 납치됐다가 구출되고 어미새와 떠나며 해피엔딩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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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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