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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4

     

    리비오 신관은 제도의 길거리를 걸으며 새로운 땅의 향기를 음미했다.

     

    그가 자라고 공부한 법국과는 확연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화려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길과 건물들. 제국민의 얼굴은 대체로 화목했다.

     

    이제는 법국 지방의 작은 신전이 아니라 제국 내의원이 그가 활약할 무대였다.

     

    하지만 리비오에게 큰 감흥은 없었다. 성공, 부, 명예 같은 것들은 그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을 걷던 리비오는 도중, 공원에서 나뭇가지로 범선 모형을 만들던 소년을 발견했다.

     

    “호오.”

     

    목수의 아들이라도 되는지 소년이 만들던 모형은 상당한 완성도가 있었다.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자르고 깎아 엮어내 예술품으로 보일 지경이다.

     

    완성을 눈앞에 둔 모형에 이끌려 리비오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훌륭하군요.”

     

    “네? 아, 감사합니다!”

     

    소년이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다섯 달이나 걸려 만들었어요. 이제 배꼬리만 붙이면 완성이에요.”

     

    뿌듯해하는 소년을 보고 리비오도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사겠습니다.”

     

    “네?”

     

    “그 모형을 사고 싶습니다.”

     

    “어…”

     

    소년이 당혹감을 내비쳤다.

     

    한참 정성을 담아 만든 모형이다. 그것을 다짜고짜 팔라고 하니 기쁨보다는 당황이 먼저 찾아왔다.

     

    “금화 세 닢을 드리죠.”

     

    그것도 잠시, 리비오의 제안에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닢이면 가족의 두 달 생활비는 될 것이었다.

     

    “부족합니까? 그럼 다섯 닢으로 합시다.”

     

    “추, 충분해요! 팔게요.”

     

    소년의 손바닥에 금화 다섯 닢이 떨어졌다.

    리비오가 소중하게 범선 모형을 품에 안아 들었다.

     

    “잘 장식해 주세요! 수분이 마르면 뒤틀리니까 기름칠 잊지 마시고요!”

     

    자기 실력을 인정받아 기뻤던 소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리비오를 배웅했다.

     

     

    그 길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리비오는 지하실로 내려가 범선 모형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볼수록 훌륭하군. 섬세하게 나뭇가지를 깎아 조립했어. 애정이 느껴진다.”

     

    리비오는 흐뭇하게 모형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감상하던 리비오는 이내 벽걸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흉악한 해머가 들려 있었다.

     

    ―콰앙!!

     

    단 한 번 팔을 휘두르니 장인정신이 담긴 모형은 산산조각이 났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나뭇가지 조각의 쓰레기 더미만이 남았다.

     

    “오오.”

     

    지금껏 아무 감정을 보이지 않던 리비오가 쾌감에 절어 양손을 꽉 쥐었다.

     

    완성되기 직전의 명품을 흔적도 없이 파괴하는 것.

     

    그것이 그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해괴한 성향 때문에 그는 법국에서도 사고를 낸 적이 있었다.

     

    고의적인 의료사고로 사람을 죽였다.

     

    환자는 평민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평생 검술을 연습한 끝에 실력을 인정받아 곧 성기사단에 입단할 예정인 자였다.

     

    장차 영웅이 될지도 모르는 검사의 서사가 ‘완성’되기 전에, 리비오는 참지 못하고 그것을 부쉈다.

     

    치유술의 부작용을 이용했다.

     

    ‘치유주문은 신체를 본래의 형태로 되돌릴 뿐, 과정은 신경 쓰지 않는다.’

     

    리비오는 마치 기적처럼 보이는 치유술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했다.

     

    치유술은 신체의 망가진 부분을 지우고 부상당하기 직전의 형태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종의 시간 역행 마법에 가깝다.

     

    이를테면 내장이 망가진 경우, 치유주문은 새로운 내장을 자라게 해 대체한다.

     

    망가진 내장은 더 이상 신체가 아니므로 폭력적으로 뜯어내 소멸시킨다.

     

    부러진 뼈가 뒤틀리거나 내부에 이물질이 들어간 경우엔, 치유사의 실력이 부족하면 밀어내는 힘이 충분하지 않아 신체에 남은 채로 기괴하게 복구되고 만다.

     

    치유 과정은 밝은 신성력에 싸여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세세한 연구는 신성모독으로 취급되어 금지됐다.

     

    여신이 내린 기적이라 믿을 뿐, 치유주문의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치유사는 거의 없다.

     

     

    리비오는 이 점을 이용해 훈련 중 자상을 입은 환자에게 추가로 상처를 냈다.

     

    치유 과정에서 생긴 막대한 통증을 환자는 견디지 못하고 쇼크사했다.

     

    그때 그는 인생에서 제일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10대 때이기도 했고, 리비오는 재능과 실력 덕분에 지방으로 좌천되는 정도의 처분만 받았다.

     

    사건은 어둠 속에 묻혔다.

     

    그로부터 10년 넘게 조용히 지역을 발전시킨 결과, 다시 실력과 공로를 인정받았다.

     

    과거의 일은 지금 와선 별 것 아닌 사고로 처리됐다. 이제는 제국 내의원에 주치의급 치유사로 법국의 추천을 받을 위치까지 올라왔다.

     

     

    리비오가 쾌감에 절어 머리를 위로 꺾었다.

     

    “겨우 소년이 다섯 달 걸려 만든 모형으로도 이 정도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궁극의 쾌락을 위한 계획이 완성되어 있었다.

     

    “수백 년에 걸쳐 마침내 완성될 제국의 전성기를 이 손으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쾌감이 찾아올 것인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촛불에 흔들린 리비오의 그림자가 그와 함께 웃었다.

     

     

     

    ***

     

     

     

    “최근 1황자파의 기세가 상당하군요.”

     

    내의원에서 일반인 진료를 보고 있으니 휴고가 내게 눈짓했다.

     

    리비오는 내의원에 온 지 한 달 만에 벌써 상당한 치유사를 파벌에 들였다.

     

    그의 치유사로서의 실력은 확실하다. 사실상 대륙 최고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리비오는 조곤조곤하면서도 사람을 끌어모을 정치력도 갖췄다.

     

    “불편해지시면 언제든 다시 찾아오십시오. 여신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고맙습니다, 신관님.”

     

    리비오는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반인 진료를 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손이 빠르다.

     

    ‘어떻게 대응할까.’

     

    리비오는 증거를 남기지 않을 타입이다.

     

    겉으로는 멀쩡하니 다짜고짜 시비를 틀 수도 없다.

     

    ‘암살은 더더욱 말이 안 돼.’

     

    법국의 사절이기도 한 그가 암살당하면 국제 문제로 번지게 되고, 행여나 내가 사주했다고 들키면 나도 모든 걸 잃게 된다.

     

    ‘리비오의 목표는 황제 한 명뿐이야.’

     

    그가 황제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황제는 주치의를 셋이나 데리고 있어도 또 치유사를 원한다.

     

    건강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지.

    나이가 들면 특히나.

     

    ‘황제가 리비오를 눈여겨봐서 부주치의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해.’

     

    그렇게만 해도 그가 황제를 암살할 루트는 대부분 차단할 수 있다.

     

    원래 역사에서는 황제의 건강 자문이 되어 음식 등 이것저것을 관리했으니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손발을 묶어놓으면 억지로 사건을 일으키려 할 테니, 그때 현장을 잡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됐다.

     

    ‘황제가 리비오의 치유술을 신용하지 않는 게 좋은데.’

     

    생각해보니 방법은 간단했다.

     

    황제가 치유술이 아니라 의학을 더 좋아하게 만들면 된다.

     

     

     

    방향성을 정하니 며칠 후 마침 기회가 생겼다.

     

    “폐하께서 내의원 전 주치의의 의견을 들어보겠다 하셨소. 폐하의 건강을 치유할 방향성에 대해서요. 본 알현에서 있었던 일은 외부로 새어나가선 안 될 것이오.”

     

    앰브로시아가 내의원의 모든 주치의를 소집했다.

     

    현 주치의는 아니지만 팔켄하인도 자격은 충분하므로 동행했다.

     

    우리는 일제히 천황궁으로 향해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 대령했나이다.”

     

    앰브로시아의 진언에 황제가 우리를 쭉 둘러보았다.

     

    “제국 최고의 치유사들에게 묻겠다. 최근 짐의 거동이 편치 않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올해부터 비무대회도 개최하지 않는다고 했나.

     

    이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인가.

     

    “적절한 대응법이 무엇이겠는가?”

     

    어전이기에 누구도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은 자리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연식이 오래된 알베리치였다.

     

    “폐하, 제국의 태평성대를 오랫동안 널리 대륙에 알리기 위하여 폐하의 건강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 지켜져야 할 재보일 것입니다. 치유술의 감응력이 높아지도록 신앙심을 높이는 일이 양방이라 아룁니다.”

     

    “의미는 있겠으나 짐은 여태 여신보다 자신을 믿어 제국을 이루었다. 마음가짐이 아니라 실효한 방법을 제시하여 보아라.”

     

    알베리치가 반박당하자 다시 조용해진다.

     

    그때 리비오가 앞으로 나섰다.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리비오로군. 이야기는 들었다. 권터를 쌩쌩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난 치유사라지.”

     

    “과찬에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리비오가 꾸벅 반절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권터 전하께 드린 처방은 지금까지 평범하게 알려진 치유술과는 조금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는가?”

     

    “소인은 계시를 받을 수 있사옵니다.”

     

    계시. 일종의 예언이다.

    특이점이라면 신앙심이 높은 성직자가 사용할 수 있으며, 세상보다 개인에 치중된 일부 미래를 본다는 점이다.

     

    “권터 전하의 계시를 받아 옥체가 상하실 곳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진 다음에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빠질 육체에 적절한 신성력을 감아 미리 나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흐음. 처음 듣는 방식이로군.”

     

    “예. 이 치유법은 저만이 할 수 있습니다. ‘보호술’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보호술.

    계시를 쓸 수 있는 리비오에게만 가능한 유니크 스킬이다.

     

    “그것이 짐을 회복시킬 수 있는가?”

     

    “노화에 따른 신체의 불편함은 만물의 이치입니다. 이전처럼 회복할 순 없겠으나 현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아뢰옵니다.”

     

    “흠. 앰브로시아,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리비오 신관의 보호술은 법국에서도 오랜 기간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권터 전하의 경우에서 검증도 되었다 판단하옵니다.”

     

    과연.

     

    리비오가 황제를 구워삶아 자문으로 들어가게 된 방법은 이거였다.

     

    대단한 놈이다. 속에 음모를 품고 있다고 몰랐더라면 나도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로 성실하다.

     

    ‘이 모든 게 연기라 이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고 생각됐다.

     

    그럼 내가 막아야지.

     

    “폐하, 추가적으로 의견을 올리는 걸 허락해 주시겠나이까.”

     

    “고트베르크. 언제 입을 여나 했군.”

     

    이미 점수를 꽤 따놓은 덕분일까.

     

    황제는 처음부터 내게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 화색을 지었다.

     

    “그대가 고안한 식탁을 받고 머릿속이 깨끗해진 기분이다. 약제도 효과를 크게 보고 있다.”

     

    “하하, 미약하나마 폐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기쁜 마음뿐입니다.”

     

    “그래, 이야기해 보아라.”

     

    나는 황제에게 미소를 보이며 진단 스킬을 사용했다.

     

    ‘고혈압과 골다공증은 약제를 꾸준히 써서 꽤 좋아졌어. 새롭게 발병한 부상이 있네.’

     

     

    [부상 : 퇴행성 관절염]

    [위치 : 무릎]

     

     

    “폐하, 한 가지 보여드리고 싶은 문서가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의료기구의 카탈로그입니다.”

     

    나는 수첩에 그려놓은 다양한 장치의 설계도를 꺼내 들었다.

     

    황제가 무릎에 착용하는 관절염 보조기를 보고는 흥미가 돋은 듯 시선을 집중했다.

    “고트베르크, 이 장치는 무엇인가?”

    “역시 폐하의 혜안이십니다. 지금 폐하께 가장 필요한 물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거동을 불편하게 만든 무릎의 퇴행성 관절염.

     

    노화에 의해 연골이 닳아 없어져 발생한 질병이다.

     

    치유술은 신체의 부상을 고칠 뿐 늙은 몸을 젊게 만들 순 없다.

     

    “간단히 그림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팔켄하인이 금방 칠판을 준비해왔다. 나는 마나를 살짝 흘려 넣어 그림을 그렸다.

     

    다리뼈와 연골 구조였다.

     

    “폐하께서는 이곳의 부드러운 뼈가 닳아 없어지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것입니다. 움직이실 때마다 쿡쿡 찌르는 통증이나 오한이 드실 겁니다.”

     

    “음, 정확하다.”

     

    “이 물렁뼈는 재생할 순 없지만 근처 근육을 키우고 물리치료를 병행해 퇴행 효과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릎과 다리 사이에 슥슥 추가로 직선을 그렸다.

     

    “물어보셨던 보조장치는 이러한 구조로 가해지는 힘을 분산합니다. 착용하시면 무릎에 부담이 덜해져 다시 이전처럼 걸으실 수 있을 겁니다.”

     

    “증상 악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호전할 수 있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통증을 완화하는 약제도 함께 처방하겠습니다. 황궁의 정원도 마음 가시는 만큼 거닐 수 있겠지요.”

     

    “호오.”

     

    황제가 그 모습을 상상했는지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그가 턱을 쓰다듬고는 내게 명했다.

     

    “고트베르크, 제작해 와라.”

     

    “황공합니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리비오가 입가에 미소가 가신 채 입을 일자로 길게 다물고 나를 귀신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좀 소름 돋네.

     

    ‘리비오는 치유주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

     

    아까 황제에게 증상을 고치는 게 아니라 악화를 막을 수 있다고만 대답했다.

     

    실력은 있는 자다.

     

    “고트베르크, 그 외에도 짐에게 추천해줄 의료장치가 있는가?”

     

    “말씀드리지 않으면 섭하지요.”

     

    VIP 고객님이 납시었다.

     

    “여기 양압기는 코골이를 없애고 숙면을 보장합니다. 파스, 근육통에 대비해 구비해 놓으시면 좋습니다. 마우스피스, 이갈이를 방지해주지요.”

     

    “음. 전부 만들어보아라.”

     

    “전부 말입니까? 옥체를 위해서라니 당장에라도 명을 받들겠습니다만, 예산이 조금…”

     

    내가 슬쩍 망설이니 황제가 즉단했다.

     

    “앰브로시아. 고트베르크에게 필요한 만큼 주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제의 돈으로 만들고 싶은 장비를 전부 만들어도 된다고?

     

    좋은 기회였다.

     

    ‘이 참에 앰뷸런스도 갖춰야겠다.’

     

    페가수스 같은 건 어디서 못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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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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