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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4

       카자르는 사흘이 지나서야 헝클어졌던 마력이 회복됨과 동시에 전신의 마비가 풀리며 기운을 차렸다.

         

       “간호해주셔서 감사했어요, 공녀님.”

       “아니야, 내가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이니까.”

         

       카자르와 프란체가 서로 흐뭇하게 웃으며 덕담을 나누던 사이. 나는 라데아, 라이아 자매에게 말했다.

         

       “저 사람 말 잘 듣고, 사고 치지 마라.”

       “…저희를 뭐로 보시는 거예요?”

       “맞아요. 저도 곧 있으면 어엿한 성인인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하긴, 그런 척박한 로아크 남작령에서도 마수를 잡으면서 잘 살아왔는데 알아서 잘 하겠지.

         

       “그래,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나는 피식 웃으며 라데아와 라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이아는 밝게 받아주었지만…….

         

       “저번부터 자꾸 머리를 쓰다듬으시네?”

         

       라데아는 가시 돋친 것처럼 까칠한 반응이었다.

         

       “…미안하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니 됐어요. 오빠가 생긴 기분이라 좋네요.”

         

       대체 이게 무슨 반응이지? 얘도 좀 오락가락 하는 거 같다.

         

       “그래, 아무튼. 곧 일이 생겨서 부를 테니 기다리고 있어.”

         

       라데아는 “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라이아와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잠깐, 라데아라고 했니?”

         

       프란체가 라데아를 멈춰세웠다.

         

       “네, 공녀님.”

       “너는 따라오렴.”

       “…네?”

       “못 들었니? 공작저까지 따라오렴.”

         

       라데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예상치도 못한 프란체의 행동. 솔직히 나도 좀 당혹스럽다.

         

       “일단 오렴.”

         

       얼떨떨하게 먼저 마차에 탑승하게 된 라데아.

         

       “그럼 이만 가볼게. 몸 관리 잘 하렴.”

       “네, 공녀님. 다음에 뵈어요.”

       “언니, 나중에 봐!”

         

       이 인사를 마지막으로 프란체와 헬레나도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우리 네 사람…….

         

       “…….”

       “…….”

       “…….”

       “…….”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프란체는 어째서 라데아를 아니꼽게 보는 것인가.

         

       이 분위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쪽이 앞으로 공녀님의 밀착 호위를 하게 된 라데아입니다. 라데아?”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특기는 검술입니다. 북부의 끝에서 마수를 사냥했습니다.”

       “…….”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무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프란체.

         

       “왜 둘이 같이 앉니?”

       “…네?”

       “헬레나, 네가 저쪽으로 가고 라데아가 이쪽으로 오렴.”

       “아, 네…….”

         

       라데아는 조심스레 일어나 헬레나와 자리를 바꿔 프란체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그래, 이제 얘기를 해보자꾸나.”

         

       뭐지. 뭐가 불편했던 거지…….

         

       “검을 잘 쓴다고 했지? 오러는 사용할 수 있니?”

       “아, 네. 미약하지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흐응…….”

         

       현재 라데아는 아직 미숙한 상태다. 오러를 사용할 순 있지만, 장시간 활성화를 못한다.

         

       그래도 검술 자체는 출중하니 시간만 지나면 해결될 문제다.

         

       “진. 케일과 비교하면 라데아는 어느 정도니?”

         

       케일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냐, 라.

         

       “케일은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입니다. 당연히 라데아가 부족하죠.”

         

       프란체는 “흐응.” 하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기사들과는 비교하는 게 실례입니다. 실전 경험도 많고, 검술 자체도 뛰어나니까요.”

         

       얼마가 되었든, 오러만 활성화해도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세상이다. 당연히 일반 기사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라데아를 내 호위로 정한 이유는?”

       “잠재력이 뛰어나서입니다.”

       “외모가 훌륭해서 그런 게 아니고?”

       “…예?”

         

       이 공녀님은 가끔 헛소리를 내뱉는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예…….”

         

       프란체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공작저에 도착하면 라데아는 혼자서 내 방으로 찾아오렴.”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데아.

         

       “혼자서요?”

       “그래. 할 이야기가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뭐지. 소외감이 느껴지는데.

         

       “여기서 말할 순 없는 겁니까?”

       “그래. 둘만의 비밀스러운 얘기라서.”

       “그렇습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길래.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으렴.”

         

       그리 말하곤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는 프란체. 라데아는 바짝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분위기가 묘한데.’

         

       내가 프란체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라도 했나? 라데아가 연관된 일이면 저런 태도다.

         

       ‘프란체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 * *

         

         

       공작저에 도착하고, 모두가 마차에서 내렸다.

         

       “헬레나와 라데아는 나를 따라오고, 진은 숙소로 가서 쉬고 있으렴.”

         

       진은 “예, 알겠습니다.”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숙소로 이동했다.

         

       “이제 가자꾸나.”

         

       라데아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프란체의 뒤를 따라 걸었다. 헬레나가 옆에서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뭐지?’

         

       앞에 무슨 일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 사용인은 아까부터 동정의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그렇게 저택에 들어오자 사용인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프란체에게 인사를 건넸다. 집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공녀님.”

       “그래.”

       “식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먹고 왔으니 됐어.”

         

       허리를 숙이곤 물러가는 집사장. 라데아는 얼음과도 같이 차가운 프란체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공녀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무겁게 삼켜버렸다.

         

       그렇게 프란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오고, 덜컥. 문이 닫혔다.

         

       “헬레나? 다기를 준비해주렴.”

       “네, 네!”

         

       허겁지겁 도망치듯이 나가는 헬레나. 이 날카로운 분위기에 라데아는 더욱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뭐하니? 앉으렴.”

       “네? 네.”

         

       중앙에 테이블을 두고 프란체와 마주 보고 앉은 라데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

         

       “라데아.”

       “네?”

       “내가 지금부터 말할 건 한 가지야.”

         

       프란체는 싸늘한 눈빛으로 테이블에 팔을 걸었다. 그늘진 시선. 라데아의 등줄기에 오한이 깃들었다.

         

       “진에게 쓸데없는 감정은 갖지 말렴.”

       “…네?”

       “진과 많이 대화하지도 말고.”

       “네…?”

       “같이 일을 하게 되더라도 거리를 두도록.”

         

       이 공녀님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라데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를 데려오신 분이신데, 교육은 직접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프란체는 눈을 부릅뜬 채 라데아를 쏘아봤다.

         

       “라데아.”

       “네…?”

       “내가 한 말이 어려웠니?”

       “…….”

         

       어렵다기보다는 저런 말을 하는 이유와 이 상황 자체가 이해 가지 않았다.

         

       “저기, 그,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후우, 프란체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휘저었다.

         

       “진을 남자로 보지 말라는 소리야.”

       “남자로 보지 말라고요?”

       “그래. 어디까지나 공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

       “그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만, 진과 사적인 관계가 되지 말라고 했던 거였나? 무슨 이유로? 라데아는 이 공녀님을 더욱더 모르게 되었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계속 그런 마음을 유지하렴.”

         

       라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그리고 진이 다가와도 거부해야 해.”

       “그 사람이 다가올 것 같진 않은데요…?”

       “혹시 모르는 법이지.”

         

       일순 눈가에 그늘이 진 프란체. 아까부터 주변 그림자가 일렁이고 주변 공기가 서늘한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라데아는 소드 마스터. 그중에서도 직감이 강화된 타입이다. 사소한 변화라도 눈치채는 법.

         

       ‘뭔가 이상한데…….’

         

       묘하게 살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라데아는 계속해서 오한이 들었다.

         

       “아무튼. 내가 한 말 명심하렴. 알겠니?”

       “네. 명심할게요…….”

       “그래. 오늘은 공작저의 손님방에서 자고. 내일 돌아가렴.”

       “네…….”

         

       라데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프란체의 방을 나갔다.

         

       “…….”

         

       프란체는 라데아를 본 순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진의 곁에 있게 된 새로운 여자. 심지어 엄청나게 예쁘다.

         

       윤기가 흐르는 짧은 흑발. 루비를 박아넣은 듯한 새빨간 눈동자. 작으면서도 예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코. 매혹스러운 분홍색의 입술.

         

       꿈틀. 그림자가 일렁였다.

         

       “헬레나에 이어서 라데아까지…….”

         

       프란체의 중얼거림을 들은 헬레나가 화들짝 놀랐다. 달그락! 손에 들린 다기들이 흔들려 소리를 내었다.

         

       “아, 헬레나. 언제 들어왔니?”

       “방금이요…….”

       “홍차를 준비했니?”

       “네, 네!”

       “그래. 오랜만에 홍차구나.”

         

       프란체는 헬레나가 따라주는 홍차를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이럴 때일수록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

         

       ‘조급해지면 안 돼.’

         

       헬레나도 경고를 듣고 진과 아예 대화도 안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라데아는 똑 부러진 인상이었다. 선을 넘진 않을 터.

         

       “후우…….”

         

       홍차의 향을 음미하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은 프란체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흥분으로 인해 쉴 틈 없이 두근거리던 심장 또한 잦아들었다.

         

       “헬레나.”

       “네, 넷?”

       “너는 어떻게 보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프란체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헬레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라데아 말이야. 진이 사심 있는 거로 보이더니?”

         

       헬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금방 입을 열었다.

         

       “어… 제 눈에는 그렇겐 안 보이던데요?”

       “그러니?”

       “네. 완전 관심 없는 눈빛…….”

         

       순간 눈이 동그래진 헬레나.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프란체가 물었다.

         

       “뭔데? 뭔가 있던 거지?”

       “네, 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진 님이 친근하게 레데아 님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웃으셨어요.”

         

       우뚝. 프란체가 돌처럼 굳었다.

         

       “그랬단 말이지?”

       “네…….”

         

       당장이라도 얼굴이 구겨지려던 프란체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봐줬구나. 이만 돌아가도 좋단다.”

       “네, 네!”

         

       분위기를 읽은 헬레나는 재빠르게 프란체의 방을 나갔다.

         

       “…….”

         

       프란체는 그늘진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진도 엄연히 남자다. 주변에 헬레나, 라데아와 같이 예쁜 여성과 있으면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프란체에게 진을 통제할 수 있는 노예 각인이 있다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얻을 수는 없는 법. 각인으로 인해 강제로 만든 마음을 본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아니지.’

         

       프란체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고대 마법서를 바라봤다.

         

       “역시 방법은 영혼 결속밖에 없어.”

         

       카자르의 집에서 던지듯이 말해본 영혼 결속의 마법. 진과 카자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반응을 프란체는 놓치지 않았다. 분명 여기에 영혼 결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해독하기가 어렵긴 한데.’

         

       지금은 할 수밖에 없다. 카자르에게 해독 안경도 받아왔겠다, 더 늦기 전에 영혼을 결속해야 한다.

       

       영혼만 결속된다면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 누가 끼어들 틈새도 없이 둘이서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으니.

         

       ‘진은 내 시작이자 마지막인 전부야. 아무도 못 건드려.’

         

       프란체는 곧장 룬어 해독에 들어갔다.

         

         

       * * *

         

         

       사하라의 수도, 스콜에 위치한 모옥의 본거지.

         

       이곳은 지금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그 망할 마법사가 준 의뢰를 실패한 것도 모자라서, 칠성 여섯 명이 사망하고 팔까지 잃은 거냐?”

         

       카아락은 이젠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결과가 나올 건 알고 있었잖아? 상대는 진 바렌베르크라고.”

       “그래도 칠성이 다 죽고 네가 팔을 잃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모옥의 마스터, 말렉은 왕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카아락을 굽어봤다.

         

       “피해는 얼마나 줬지?”

       “죽은 사람은 없어.”

       “…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아니, 내 얘길 들어보라고.”

         

       카아락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말렉에게 설명했다. 엑시드의 마스터와 제국의 백귀가 방해했다는 정보였다.

         

       “…제국의 백귀와 엑시드의 마스터가 데카르트 공녀를 지켜?”

       “그래, 그렇다니까! 진 바렌베르크 혼자였으면 이미 끝내고도 남았다고!”

         

       한껏 인상을 찡그린 채 관자를 짓누르는 말렉.

         

       ‘생각보다 일이 심각해졌군.’

         

       진 바렌베르크를 건드린 것도 문제인데 엑시드의 마스터와 그 백귀 케일까지 건드렸다.

         

       ‘이는 쉽게 넘어갈 수 없겠어.’

         

       말렉이 물었다.

         

       “백귀의 솜씨는 어땠지?”

       “에스투피나랑 아즈라엘이 걔한테 당했어.”

         

       카아락은 “그래도 나한테는 안 됐지만.”하고 코웃음 쳤다.

         

       “흐음…….”

         

       초월자인 자신과 칠성이 다 같이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진 바렌베르크와 칠성의 전력과 맞붙는 케일.

         

       그리고 엑시드의 어쌔신들까지.

         

       “허허.”

         

       말렉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망할 초월 마법사가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이딴 의뢰는 받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겠군. 우리가 죽든지, 상대가 죽든지 둘 중 하나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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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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