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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5

       교황청에서도 가장 깊숙한 내부.

         

       낮의 무녀와 일부 대주교, 교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금기의 영역으로 티엘라가 발을 내디뎠다.

         

       질질 끌려가던 나 또한 얼떨결에 같이 발을 내디뎠다.

         

       예쁜 정원이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 마냥, 주변이 온통 푸르다. 그중에서도 유독 붉은색 꽃이 많은 건 라를 기리기 위해서겠지.

         

       한적한 복도. 아무도 없는 곳에는 붉은 조명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단순한 복도일 뿐인데, 빛을 쪼개는 스테인드글라스 덕분에 더없이 성스러웠다.

         

       "소인이 이곳에 발을 내디뎌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투냐."

         

       티엘라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내가 직접 끌고 온 거다. 말을 얹을 자는 달리 없겠지."

         

       역시 천생천하 유아독존답다!

         

       딱 봐도 뭐 시킬지 뻔해서 딱히 안 가고 싶은데 말이지!

         

       똑똑.

         

       티엘라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한참 뒤에 들려왔다.

         

       "…누구시죠?"

       "문 열어라. 아르피나."

       "티엘라."

         

       한숨 섞인 목소리가 문을 열었다.

         

       "내가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눈이 마주쳤다.

         

       ['태양신의 기도'가 발동합니다.]

         

       멋대로 떠오르는 상태창 봐라.

         

       여전히 예쁘네. 은발은 나풀거리고, 입고 있는 단아한 듯 우아했다. 그뿐이냐. 저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한순간 주변의 상황도 전부 잊고 올인할 거 같았다.

         

       정신 차리자. 자하드. 빠지면 안 되지.

         

       "안녕하세요?"

       "……."

         

       쾅!

         

       문이 도로 닫혔다.

         

       "티티티티엘라?!"

       "왜."

       "다, 다른 손님을 데리고 온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애초에 찾아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만."

       "그것도 맞지만! 다, 다른 사제라니요! 이건 계획에는 없던 일…!"

       "계획이고 자시고."

         

       티엘라가 손을 뻗었다. 문을 통째로 뜯어냈다.

         

       "친우를 만나는데 일일이 눈치 볼 필요는 없지."

         

       휙 내던진 문이 복도에 나가떨어졌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화끈하네. 티엘라 수장. 낮의 무녀 대가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

         

       "똑바로 서라."

       "넵."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인사했다.

         

       "제5 이단심문소 소속 이단심문관 자하드라고 합니다."

       "아, 아르피나 추기경이에요. 보잘것없지만, 교단의 목소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이 일단 마주 인사했다. 티엘라의 옆구리를 다급하게 찔렀다.

         

       "제가 막무가내로 굴지 말라고 이야기했잖아요…!"

       "문 하나 가지고 무슨. 다시 달면 되는 거 아니냐?"

       "그게 달아질 리가…!"

         

       콰직.

         

       문이 벽에 일부 박혔다. 티엘라가 손을 탁탁 털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완벽하군.,"

       "완벽하지 않아요! 전혀 완벽하지 않다고요!"

         

       아르피나가 익숙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티엘라에게 물었다.

         

       "…티엘라. 자하드 이단심문관은 왜 데리고 온 거예요?"

       "이 녀석에 대한 설명은 들었겠지?"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죠. 교단 내부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듣지 않으려 해도 제 귀에 들어오니까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티엘라가 망가진 문을 다시 열었다.

         

       "둘이서 대화해라. 이상이다."

       "예?! 티, 티엘라?!"

       "문이 문제가 많군. 아르피나. 다음에는 제대로 된 걸로 갈아 끼우도록."

       "당신이 항상 부셔서 그렇잖아요?!"

         

       티엘라가 성큼거리며 걸어나갔다. 벽에 박힌 문이 삐걱거렸다.

       아르피나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왜…온거에요?"

       "저도 따라오라고 해서 온 건데요?"

       "…설마."

         

       아르피나가 내 몸 여기저기를 뜯어 보았다. 상태를 확인한 표정이 경직됐다.

         

       "…흘러내리는 기도만 해도 대주교급 이상…! 자, 자하드 이단심문관. 열여섯의 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죠?"

       "혹시 라의 선택을 받으셨나요? 비공식 사도…쯤 되는 건가요?"

         

       역시 날카롭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지.

         

       "라님께서 절 특히 애정 하시죠."

       -…흥.

         

       라가 코웃음 쳤다. 하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앙탈 부리기는.

         

       "여,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수면에 떠오르지 않은 숨겨진 인재…"

         

       아르피나가 다급히 의자를 탁탁 털었다. 다시 보니 방안이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책들. 구석에 놓여있는 과자 봉지. 빵가루가 잔뜩 흐른 침대.

         

       아르피나가 다소 움츠러들었다.

         

       "마, 많이 누추하죠? 이, 일단 여기 앉으세요! 차를 내올게요!"

         

       뭐 이 정도는 예상했다만…

         

       나중에 더 늦게 왔으면 아예 쓰레기장이었겠군.

         

       우울증 걸린 사람의 공통문제지.

         

         

         

       . . .

         

         

         

         

       아르피나는 심호흡했다.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다시 짓기 위해 다분히 노력했다.

       진정해야 한다. 기껏 찾아온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진정해.

         

       나쁜 생각 말고 좋은 생각…나쁜 생각 말고 좋은 생각…

         

       "차를 내왔…!"

         

       문지방에 걸렸다. 그대로 넘어졌다.

       기껏 타온 차가 화끈하게 자하드의 머리에 적중했다.

         

       촤아아악!

         

       뚝뚝.

         

       "……"

         

       자하드 이단심문관이 손을 올렸다. 가볍게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잘 마셨습니다?"

       "죄, 죄송해요…죄송해요…이, 이걸 어떻게…"

         

       다급히 닦았다. 왜 또 실수한 거야. 정말.

       문제다. 나는 문제 덩어리야. 다급히 닦는 손수건이 연신 허튼 데를 닦았다.

         

       자하드가 손수건을 탁 빼앗았다.

         

       "제가 닦을게요."

       "…아."

         

       나는 닦는 거 하나 잘 못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주눅이 든다. 모르는 사람 앞일수록 더욱 그렇다. 눈치를 보고 전전긍긍해진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오히려 당찼다.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 기반은 자신이 선택받은 이였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힘 하나 없는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빈약했고, 다른 사람을 속여넘기기 위해 애써 의연한 척해야 했다.

         

       매 순간순간이 고통인 상황. 담담한 척할수록 부서지는 건 내면이었다.

         

       지금처럼 또 한 번 금이 가면…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마음 속에 쌓여 있던 우울이 터져 나온다.

         

       "제가멍청해서죄송합니다나같은건죽어야하는데왜살아있지."

       "잠…"

       "민폐끼쳐서죄송합니다옷은빨아들일게요어떻게든해드릴게요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무슨…"

       "기분나쁘셨다면어떻게든보상해드릴게요정말죄송합니다화내지말아주세요."

         

       속사포처럼 말이 튀어나온다. 애써 참으려 했던 눈물이 계속 눈가를 헤집고 밖으로 흘러내린다.

       참아야 한다. 모르는 사람의 앞이야. 참아야 해.

         

       하지만 티엘라가 데려왔으니까…괜찮지 않을까.

         

       뭐가 괜찮아. 그냥 좀 참아. 약하게 좀 행동하지 말고.

         

       하지만…하지만….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가 서로 엮인다. 아르피나가 망가졌다.

         

       "…죄송합니다."

         

       끝에는 결국 죄송합니다로 끝났다. 티엘라와 대화할 때처럼 똑같이.

         

         

         

       . . .

         

         

         

       왠일로 멀쩡하나 했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우울증 걸린 아르피나 추기경. 가진 힘을 다 잃고 언제 내쫓길까 전전긍긍하는 여자.

         

       우울증 걸린, 뱀파이어화가 진행 중인 망가진 사제.

         

       옷이 축축했다. 나는 성력을 끌어올렸다.

         

       화아아앗…

         

       뿌연 연기와 함께 라의 사제복은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르피나 추기경 전하. 자. 보세요. 저 금방 뽀송뽀송해졌어요."

         

       질질 짜던 아르피나가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하, 하지만 저 같은 쓰레기가…"

       "만져보실래요?"

         

       아르피나의 손을 잡고 내 옷에 올렸다.

         

       "뽀송뽀송하죠? 하나도 안 젖었죠?"

       "…흐윽…네…"

       "전 괜찮으니까 하던 이야기부터 할래요? 일단 좀 앉고. 바닥이 차니까 올라오셔야죠."

         

       방에 딸린 간단한 부엌으로 향했다. 찻주전자를 가볍게 헹구고, 새 차를 끓여왔다.

       간단한 과자를 세팅하는 건 덤. 그녀의 잔에 한 잔 따라주고, 조심스레 컵 받침까지 해주었다.

         

       어깨에 널브러져 있던 담요를 툭툭 털어서 씌워주는 건 덤. 검은 커튼은 열지 않았다. 피부에 나쁠 게 분명하니까.

         

       "좀 괜찮아요?"

         

       아르피나가 훌쩍였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죄, 죄송합니다. 이상한 모습을 보여서."

       "아뇨. 뭐. 저도 자주 우울해지는데요. 가끔 새끼발가락 책상다리에 부딪히면 자주 욕하거든요. 누구나 그렇죠. 안 좋은 일이 터지면 무너지는 것도."

         

       쓱 떡밥을 깔았다. 아르피나는 의심도 없이 덥석 물었다.

         

       "…맞아요. 안 좋은 일이 있으면…사람은 무너지기 마련이죠."

       "최근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최근이 아니에요. 몇 년 정도 지났어요. 한 4년 정도…지난 거 같네요."

         

       아르피나가 차를 홀짝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손을 들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자하드 이단심문관. 티엘라는 분명 생각이 있어, 당신을 데려왔다고 생각해요. 혹시…제 생각이 틀리나요?"

       "그건 티엘라님이 아시겠죠?"

       "지금 내뱉는 말은 이곳을 제외하고 나가면 안 돼요. 그러니…"

         

       아르피나가 조심스레 날 쳐다보았다.

         

       "태양신에 대고…서약을 해주실 수 있나요?"

         

       작은 손이 꼼지락거렸다. 아르피나가 다급히 말했다.

         

       "무, 물론 굉장히 무례한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일은 무척이나 중요…"

       "라가 지켜보는 앞에서 맹세하기를, 이곳에서 나눈 이야기를 밖에서 떠들지 않겠습니다."

         

       뭐 어려운 게 있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됐나요?"

       "…자하드 이단심문관은 무척이나 거침이 없네요."

         

       아르피나가 우물쭈물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주춤거리던 눈빛에 처음으로 활기가 돌았다.

         

       "티엘라가 당신을 이곳에 부른 건, 저와 관련된 일 때문이에요. 정확히 말하면…제 몸의 문제 때문이에요."

       "불치병이라도 앓고 계신 건가요?"

       "그, 그걸 어떻게…"

       "아뇨, 뭐…들어오실 때부터 너무 굳어 있고, 힘도 제대로 못 쓰시는 거 같아서."

       "…티, 티가 나나요?"

       "신성재판 때에는 티가 안 났어요."

       "…휴우우."

         

       아르피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요. 자하드 이단심문관. 전 지금 불치병을 앓고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저주에 가깝죠."

         

       그녀가 머리에 쓴 베일을 걷었다.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쇄골의 안쪽. 그 깊은 곳에 정확히 두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아물지 않는 상처. 뱀파이어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녀석이 남긴 저주.

         

       "…모든 뱀파이어의 원형. 진조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어요."

         

       나는 다 알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

         

       "…설마!"

       "네. 맞아요."

         

       아르피나가 꾸욱 옷을 잡았다.

         

       "제 몸은 지금…뱀파이어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조의 수족으로 바뀔 운명이에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티엘라랑 그리모어 일러스트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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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성기사가 성물을 독차지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 world where magic reigns supreme and the influence of gods wanes, a young boy finds himself unexpectedly thrust into the role of an acolyte in the declining Sun God’s Temple. Blessed with the divine stigma of the Sun God, he must navigate the temple’s internal politics, the hostility of his fellow acolytes, and the challenges that come with his newfound powers.

As he delves deeper into the mysteries of the temple, he discovers hidden secrets and powerful artifacts that could change the course of his destiny. With the guidance of an enigmatic senior acolyte and the unwavering faith in his own abilities, he sets out to prove his worth and carve his own path in a world that has all but forgotten the true power of the div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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