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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5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요즘 들어 계속 느낀다.

        

       당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건너뛰겠답시고 다른 것을 전부 무시하고 건너가려고 해도, 착실한 캐릭터들은 자기 생각대로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까.

        

       원작에서 클레어와 앨리스가 엮이는 바람에 자극받은 앨리스가 바니걸 차림으로 카지노에 잠입하게 되었듯, 이번에도 앨리스는 벨라에게 자극받아 카지노에 잠입하게 되었다.

        

       아마 어제 대화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겠지. 벨라의 모습은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연 있는 여자’ 그 자체였으니까. 꿈이 있었지만 가혹한 현실 때문에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아마 나에게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나도 똑같이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벨라가 그때 굳이 우리에게 접근했던 이유는, 아마 도발하려는 목적도 있을 거다. 나를 확실하게 끌어들이는 김에 앨리스도 겸사겸사 놀릴 생각이었겠지.

        

       실제로 내가 중간 단계를 무시하고 곧장 튀어 나갔고, 앨리스는 앨리스대로 스스로 바니걸 옷을 입고 잠입했다. 앨리스에게 그 옷을 구해다 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벨라밖에 없으니까.

        

       벌컥!

        

       “허억!”

        

       내가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파란 천 조각을 들고 있던 앨리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스타킹도 신지 않은 상태이긴 했지만.

        

       “여기서부터 입고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뭐, 뭐어!?”

        

       내가 곧바로 물어보자, 앨리스는 순간 부정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내 시선이 향한 자기 손을 본 뒤에 들고 있던 걸 등 뒤로 숨겼다.

        

       나는 앨리스의 방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여기서부터 입고 가면 지나치게 눈에 띕니다.”

        

       “나, 나도 알고 있거든?”

        

       결국 내가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앨리스는 체념한 듯 말했다.

        

       앨리스가 손을 축 늘어뜨리자 손에 쥐고 있던 천 조각과 스타킹도 바닥을 향해 늘어졌다. 시선을 돌려보니 책상 위에도 가면과 토끼 귀 머리띠가 있었다.

        

       “나도……. 옷 안에 입고 가서 겉옷만 벗으려고 했다고…….”

        

       “…….”

        

       하지만 내가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을 버티기 힘들었는지, 앨리스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처량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꾸준히 주입한 자신감 덕분에 원작보다 훨씬 자신감 넘치는 앨리스가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숨을 쉬려다가 참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앨리스를 보면 앞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앨리스 자존심이 땅에 더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일단, 앉아서 이야기부터 나누도록 하죠. 지금 하시려던 일은 그 이후에 할지 하지 않을지 결정해도 될 겁니다.”

        

       “……응.”

        

       내가 침대를 가리키며 말하자, 앨리스는 두말없이 침대에 앉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하려던 일이 황녀가 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겠지.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앨리스를 보고 의자 쪽으로 향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서 나도 앨리스 옆에 앉았다.

        

       물론 몸이 붙을 정도로 가깝게 앉은 건 아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대신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지는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우선, 이 복장으로 밖에 나가려고 했던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오.”

        

       내가 앨리스의 손을 보면서 말하자,

        

       “아니, 그러니까 이걸 입고 나갈 생각은—”

        

       뭔가 변명을 하려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앨리스는 나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게…….”

        

       그리고, 한동안 입 안에서 말을 웅얼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다니요?”

        

       “윈터필드에 파견 실습 나갔을 때도, 나는 친구들이랑 속 편하게 의뢰나 수행하고 있었잖아.”

        

       “학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너는 그사이에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는걸. 당장 그 자리에서 훈장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

        

       그건…… 그랬다. 엄밀히 따지면 의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으니 점수로서는 낙제점을 받아야 했겠지만, 그 시간에 내가 세운 공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니퍼는 나에게 만점을 주고 넘어갔다. 그것과 별개로 훈장 같은 것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제가 했던 일은 제가 해야 할 일이었기에—”

        

       “……네가 해야 하는 일?”

        

       앨리스가 나의 말을 끊었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뭔데?”

        

       “그것은—”

        

       “나랑 같은 황녀인 네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뭐야?”

        

       “…….”

        

       앨리스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옆으로 나란히 앉아있었지만, 앨리스는 내 쪽으로 몸을 살짝 틀고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는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이런 분위기는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때. 황제가 나를 아카데미가 아니라 북부 전장으로 내보내려고 했던 그때, 앨리스는 분개해서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내 방에서 모르핀을 찾았고, 그대로 황제에게 찾아가 담판을 지어 나를 아카데미로 데리고 가버렸다.

        

       지금 나를 보는 앨리스의 얼굴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아. 벨라와 나도, 루카스나 제이든도. 그건 알고 있을 거 아냐.”

        

       앨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천 조각이 앨리스의 주먹 안에서 구겨졌다.

        

       “하지만, 네가 나를 차기 황제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아버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 그 말은, 내 능력을 믿어서가 아니라 너의 의지를 더 믿기 때문이잖아. 아니야?”

        

       그때 황제와 만나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였던가.

        

       ……확실히, 황제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앨리스의 의지보다는 나의 판단을 더 중심에 두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도 하나 물어볼게. 작년에는 그저 너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너는 왜 내가 차기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

        

       “내 어디를 보고 차기 황제라고 생각한 거야? 능력? 성품? 아니면 그저 내 혈통만 보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이용 가치? 내가 미래에 너에게 뭔가 이득이 되는 일이라도 해?”

        

       나는 앨리스의 어디를 보고 ‘황제로 만들겠다’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앨리스에게 무르게 굴었던 이유.

        

       사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간단했다.

        

       나는 앨리스가 좋았다.

        

       앨리스뿐만이 아니라, 아제르나 전기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던 모든 캐릭터가 좋았다.

        

       내가 앨리스에게 잘해준 것은 클레어에게 잘해준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저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이전부터 좋아하던 캐릭터들이었으니까.

        

       솔직히,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이 뛰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만큼 급한 일이 있었고, 상대해야 할 적이 있었고, 고려해야 할 것도 많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묻혔을 뿐이지,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래. ‘기쁘다’였다.

        

       클레어를 만났을 때는 무서웠다. 그곳에 계속 있으면 결국 원작에서 클레어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당했을 테니까. 앨리스를 만났을 때도 앨리스를 만나 느꼈던 기쁨 외에 황제에 대한 두려움과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루카스에 대한 성가심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게임의 스토리 안에 들어가 있다는 즐거움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그 안에서 그렇게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것은, 결국 그 캐릭터들이 무사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니까.

        

       “…….”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냥 ‘좋으니까’라는 말은 이상하게 하기 힘들었다. 하고 나서 되돌리면 부끄러움을 느낄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일단 질러놓고 부끄러우면 되돌리면 되는데도—

        

       이상하게, 그것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봐.”

        

       하지만 나의 그 침묵을 앨리스는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나의 그 태도에, 앨리스는 실망했다는 표정도, 슬픈 표정도 짓지 않았다.

        

       뭔가, 어딘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만큼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증명하게 해줘.”

        

       앨리스는 힘 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그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너에게 보호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

        

       “그냥 언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언니로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기회를 줬으면 해.”

        

       “……저는,”

        

       “그래, 네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이게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 언니라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앨리스가 말아쥐고 있는 주먹에 힘이 꾹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

        

       그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깊게 파고들면 그저 억지 부리고 있는 것이고, 별다른 논리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자기만족일 뿐인 부탁.

        

       하지만—

        

       “……알겠습니다.”

        

       결국, 그런 사고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대신, 제가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황녀……아니, 앨리스는 내키는 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저는 따라다니면서 필요할 때는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황제는 혼자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한 사람 정도는 부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왕 할 거면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해줬으면 좋겠다.

        

       중요 이벤트잖아?

        

       “…….”

        

       그런 말을 하는 나를, 앨리스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소처럼 내 표정을 열심히 컨트롤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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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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