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5

    시루드의 집은 정원딸린 3층짜리 단독주택이었고, 그 넓은 거실은 현재 루크의 무대가 되었다.

    루크는 크게 심호흡하고 첼로를 쥐었다.

    현을 긁기 시작하자, 싱긋거리던 세레나의 표정이 점차 충격으로 굳어갔다.

    생각보다 루크의 연주가 더욱 높은 수준에 이르러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기초적인 연습곡을 좀 듣게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이미 훌륭한 단독연주가 아닌가?

    단 하나의 첼로로 연주되기에 대중을 압도하진 않지만 마치 흘러들어오듯 가슴을 적셔나가는 그리움이나 염려 같은것이 느껴지는 음율이었다.

    마침내 루크의 연주가 끝났을때조차 세레나는 멍한 표정을 풀어내지 못하다가 같이 듣고있던 메리와 시루드의 박수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와, 전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나, 왠지 울컥했어.”

    “……역시 잘하네. 뭐, 이젠 너무 당연한 것 같아서 놀랍지도 않아.”

    루크의 포션을 받아먹고 살짝 몸이 나아진 시루드는 뭔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여태껏 루크가 뭘 못하는걸 본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예전에 PC방을 처음 가봤을 때 말고는 그냥 한번도 없었다.

    사실, 시루드의 머릿속에 루크의 이미지는 어린 여자애의 탈을 쓴 다른 무언가였으니까.

    가끔은 ‘루크라면 손발을 묶고 철장에 가둔 채 바닷 속에 빠트려도 아무렇지 않게 올라오지 않을까.’같은 생각도 할 정도다.

    ‘어라? 그러고보니 그거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상상하는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허허, 옷이 다 젖어버렸잖은가.’따위의 말을 하면서 바다 위를 특유의 느긋한 뒷짐걸음으로 걸어올라오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루크라면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러겠어.’

    시루드가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을 무렵, 세레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잘하네. 예르나가 악기를 배울만한 곳이 없냐고 물어본것이 이제 한달정도 된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나.’

    어린아이의 연주로 이토록이나 아련한 감정을 받았다니. 취미로 음악회를 꽤 많이 다녀본 경험자로서, 루크의 연주는 사실 단독으로 연주되기엔 어울리지 않는 곡이기는 했다. 

    시종일관 조용하고 나긋한 분위기를 자아냈기에, 단독연주라기보단 반주같은 분위기였으며, 그 탓에 갑작스럽게 연주가 끝났을때 어딘가 밋밋한 마무리라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루크는 그것마저 자신의 연주에 녹였다.

    마치 기분좋은 일상대화를 나눈 것처럼 여운이 남는다.

    그 탓에 연주가 끝났는줄도 모르고 정신을 놓은 것이다.

    세레나는 그런 루크에게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음악에 재능이 보이는걸, 곡은 혹시 자작곡이야?”

    “뭐, 그렇다만…….”

    “정말이니? 나중엔 훌륭한 첼리스트가 되겠어. 미리 사인을 받아둬야할까.”

    “하하…….”

    딱히 음악가가 될 생각은 없지만.

    방금 그 연주도 사실은 파이와 대화한 것이었을 뿐이다.

    루크가 파이와 첼로로 나눈 대화를 풀어보면 사실, 식사도중에 사라졌던데, 그동안 어딜 갔었느냐? 세계수에 좀 갔다왔어. 세계수를? 무슨 이유로? 거긴 마나도 많고, 친구도 많거든! 음, 친구라. 정령을 말하는건가? 그건 조금 애매하네! 난 모두의 친구니까. 그럼 거기선 뭘 했는가? 그냥 놀다가 왔어. 

    같은 느낌이다.

    어딜 갔다왔냐, 뭐하다 왔느냐, 같은 느낌의 대화였기에 그리움과 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서정적인 연주가 된 것 같지만.

    따라서 루크에겐 그 연주가 세레나가 느낀것과는 달리 일상적인 대화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정령어를 알고나니 음악이 이전같은 음악으로 들리질 않는군.’

    이건 조금 불편하다.

    마치 가사를 모른채 기분좋게 듣던 노래가 사실은 불쾌한 욕설이나 음담패설로 가득한 미묘한 가사를 가지고 있다는걸 알게된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

    루크는 지금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뭐, 정령과의 대화가 그런 유형의 기분나쁜 경험은 아니고, 나름대로 재미있기에 음악을 즐기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일 뿐이지만.

    루크는 그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첼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자 또 다른 박수소리가 들려온다.

    짝, 짝, 짝. 느긋한 박수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한 중년의 엘프.

    그는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가르마를 태운 모습이었다.

    당당한 몸짓으로 다가온 그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뒷짐을 지며 입을 열었다.

    “좋은 연주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좋은 연주를 들으니 기분이 참 좋군.”

    그의 모습을 확인한 시루드가 살짝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뜬다.

    세레나는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그리 놀란 표정은 아니었지마는.

    “아버지, 오셨네요.”

    “할아버지?”

    메리는 눈치를 보다가 시루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시루드네 할아버지야?”

    시루드는 메리에게 고개를 슬쩍 끄덕여준 뒤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웬일이야?”

    “시루드, 네가 몸살로 못 일어난다길래 걱정이 되어서 와봤다. 그래, 몸은 좀 괜찮느냐? 잘 움직이는 걸 보니 내가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이는구나.”

    “응. 그렇긴 한데…….”

    “운동회 못가서 미안하다. 도저히 오전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대신, 영상은 잘 받았단다. 저 아가씨가 널 들고 뛴 그 아가씨로구나.”

    “그……. 맞아.”

    시루드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중년인은 피식 웃으며 루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루드와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구나, 루크 이루시…… 라고 했던가? 세레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

    “음, 그렇군.”

    루크는 살짝 아리송한 표정으로 남자의 악수를 받았다. 그리고 오호, 하는 음성을 냈다.

    ‘3서클이로군. 굉장히 안정적이고.’

    악수를 함과 동시에 마력을 흘려 살짝 서클의 정보를 훑어보고 알아낸 정보.

    아까부터 느껴지던 이 차분한 마력의 흐름은 이 남자가 내뿜던 기운이었던가.

    이시대에서 이토록 안정적인 3서클의 유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니, 어렵다기보다는 아예 처음이라고 해야할까.

    루크는 악수를 마치곤 반가움을 담아 말했다.

    “그대, 3서클인가?”

    “하하, 날 알아보는구나?”

    남자는 루크의 말에 살짝 기고만장해져서 약간 뽐내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하하, 내가 조금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런 아이까지 알아볼 줄은 몰랐군. 그래, 내가 바로 삼중서클의 소리드, 소리드 트리핀드라고 한다.”

    소리드 트리핀드.

    다이애나 애스턴연방 ‘원로원’의 일원이자 ‘서클 복지법’의 창안자이고, 그 자신 스스로 삼중서클을 이뤄낼 정도로 깊은 마법학적 소양을 갖춘데다, 스스로의 사례에서 배운 적합한 복지로 ‘마나심축적증후군’ 환자들의 초기의 사망률을 감소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남자.

    루크가 받는 지원금은 사실 이 남자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루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린나이에 벌써부터 내 이름을 알다니, 꽤나 정치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전혀 몰랐다. 

    그냥 3서클인걸 알아챘을 뿐이지, 소리드가 누군지는 전혀 몰랐으니까.

    “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나는 정치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다. 지금은 그저 마법에만 관심을 두고있지.”

    소리드의 기대와는 달리, 루크는 정치가 질색이었다.

    ——–

    “그대가 3서클을 운용하는 방식은 꽤나 특이하군.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도 그토록 안정적일 수 있는건가?”

    “흐음, 뭐라고 할까. 억누르지 않는게 아니라, 상태를 기억하는 거란다. 추억을 떠올려보면 언제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서클에 필요한것은 ‘항상성’이지, ‘무감정’이 아니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항상 같은 감정을 품는게 쉽지는 않을텐데. 감정을 한가지로 고정시킨다는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하,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부끄럽지만, 그게바로 ‘사랑’의 힘이란다.”

    “서클을 가슴에 지니고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나는 그대가 참 놀랍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겠구나.”

    “나야말로, 네가 그 어린 나이에 삼중서클에 도달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굉장한 소질이로구나. 과거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대마법사가 되었겠어.”

    “하하! 소리드, 꽤 훌륭한 통찰력이로군. 과거였다면……. 그래, 분명 그랬겠지.”

    시루드는 왠지 죽이 잘 맞는 듯 한 분위기의 둘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어쩐지 맨날 할아버지가 떠오르더니…….’

    할아버지가 아마 올해로 120살쯤 되셨을텐데. 나이차이로 따지면 무려 110살 차이가 아닌가.

    그런데 무슨 동년배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말에 막힘이 없다.

    자신과 얘기할때보다 오히려 더 잘 맞는 느낌이라고 할까.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것으로 놀란것은 소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이 조그만 아이가 꽤 영리하다.

    시간만 된다면 더 오랫동안 대화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더이상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시루드쪽에 앉아있는 또래아이가 꾸벅꾸벅 졸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아이들은 이미 잘 시간에 가까웠다.

    “내가 너무 붙잡아두고 있었구나. 피곤하겠지. 세레나, 아이들에게 방을 내주겠니?”

    “후훗, 네. 아버지.”

    ——

    안내받은 방에는 일단 커다란 침대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파이는 넓직한 방이 맘에 들었는지 방 이곳 저곳을 날아다녔다.

    루크는 신난 아이처럼 방을 쏘다니는 파이를 뒤로하고 방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침대 외에는 기본적으로 바닥엔 카펫, 테이블과 소파 등이 있었고, 벽에는 액자속에 담겨진 그림과 거울등이 걸려있었다.

    현대식으로 필수적인 가구만 놓아 깔끔하게 꾸며진 방이다.

    그러나 딱히 누군가 쓰는중인 방 같지는 않다.

    손님에게 내어지는 용도의 방인가, 루크는 그 또한 있을 법 하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레 귀족의 집에는 그러한 방이 한둘쯤은 있게 마련이니까.

    메리는 뭔가 신기하다는 듯이 방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친구네 집에서 자는건 처음이야. 그것도 남자애 집에서.”

    메리의 중얼거림을 들은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루드를 ‘남자애’로 생각하는건 좋은 징조인가 해서.

    그리고 문득 메리가 떠올랐다는 듯이 묻는다.

    “루크는 어때?”

    “나 말인가? 음…….”

    루크는 곰곰히 생각해봤다.

    생각해보니 남자인 친구의 집에서 잔 적이 없다는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남자인 친구’라고 할만한 녀석은 전생을 통틀어 케일 프롭슨 뿐인데, 그는 날때부터 자신의 시종이었고, 애초에 같은 저택에서 자랐기에 ‘서로 다른 집’이라는걸 가진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처음이로구나.”

    “그래? 으, 왠지 두근두근거리네.”

    “그렇느냐?”

    루크는 메리의 귀여운 반응을 보며 미소지었다.

    “하암, 졸려.”

    메리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면서 루크에게 안겨왔다. 루크는 그런 메리를 가볍게 받아들고는 말했다.

    “메리, 잘거라면 이제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꾸나.”

    “응…….”

    여전히 졸음기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는 메리를 뒤로하고, 루크는 예르나가 사주었던 이상한 모양의 잠옷을 들어올렸다.

    상하의가 일체형으로 이뤄진 특이한 잠옷이었다.

    후드도 달려있긴 했지만, 루크가 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좌우로 난 뿔이 걸리는 탓에 후드는 입을 수 없으니까.

    특수제작을 한다면야 가능할지 모르지만, 루크에게 그정도로 후드를 입고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후드라면 과거 정체를 숨겨야 할 때 지긋지긋하게 쓰고 다녔으니 말이다.

    물론 당연히 필요하다면야 다시 쓰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그나저나, 이런 형태의 잠옷은 생소하군…….’

    뭐, 상하의 일체형인 내의가 과거에도 없던게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는 이런 디자인이 유행인가? 조금 이상한 모양이다만.

    ‘그래도 예르나가 보통이라고 했으니까 별 문제 없겠지.’ 

    루크는 대수롭지않게 넘기며 그것을 입었다.

    마침 메리도 복장을 갈아입는것을 마쳤는지 눈가를 비비며 침대로 다가왔다.

    “자, 이제 자자꾸나.”

    “그래, 그러자……. 응?”

    메리는 문득 비비던 눈을 반쩍 뜨고는 한동안 루크의 잠옷을 보았다.

    “루크, 너 평소엔 그런거 입어?”

    “음……. 그건 아니다만……. 설마 이상한건가?”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아! 귀여워, 귀여워!”

    “귀, 귀엽…….”

    어쩐지 파이도 메리의 옆에서 하늘하늘 움직이면서 시선을 끄는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살랑거리는 파이를 쳐다보고 있자니 메리쪽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파이는 해냈다는 듯이 꺄르르 웃으며 루크의 머리 위로 올라와 그 몸을 툭, 얹는다.

    그 모습은 마치 ‘시선끌기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루크는 그런 메리를 향해 곤란한 목소리로 묻는다.

    “메리. 사진은 대체 왜 찍은게지?”

    “그냥 너무 잘 어울려서!”

    “그, 그렇느냐……? 고, 고맙군.”

    잘 어울린다니 칭찬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사진도 그냥 두었다. 루크에게는 적어도 사진을 찍힌다는 것에 큰 거부감은 없었으니까.

    메리는 싱긋이 웃으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잘때 진짜 동물잠옷을 입는 수인은 처음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예르나가 사온 잠옷 세가지,
    하나는 원래 입던거랑 비슷한 잠옷.
    하나는 원피스형 잠옷.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무려 동물잠옷이었다는 이야기.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