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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5

    황제의 관절염 진료로부터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동안 지원금을 빵빵하게 받은 덕분에 싱글벙글하게 지냈다.

     

    “정상 혈압이시네요. 활동하셔도 좋습니다.”

     

    간단하게 아셀라의 오전 진료를 끝내고 내의원으로 나가려 하니 그녀가 나를 멈춰 세웠다.

     

    “공자, 날짜를 착각하진 않았지?”

     

    아셀라가 의미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이 제 성인식이죠. 설마 잊어버렸으려고요.”

     

    “공자와 내 약혼식도 있잖아.”

     

    아셀라가 약간 긴장한 태도로 심호흡을 내쉬었다.

     

    “여느 때와 다르게 젊은 귀족들이 주로 모이는 행사야. 주로 공자와 내 나이대.”

     

    “곧 가주 자리를 물려받을 귀족들이죠.”

     

    “맞아. 그 아이들을 월광궁의 지지자로 만들 자리야.”

     

    아셀라의 노림수는 그것이었다.

     

    어느 정도 파벌이 자리 잡은 현 사교계에 월광궁이 끼어들기는 쉽지 않다.

     

    아셀라는 지금까지도 주로 젊고 어린 귀족들을 포섭하곤 했는데, 어차피 그들이 가주가 되어 지금 늙은이들이 은퇴하면 새 판이 짜이리란 계산이었다.

     

    실제로 초대한 명부를 보면 미래에서 요직을 꿰찬 주요인물이 많았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우리가 약혼식을 올리고 귀족 포섭을 위한 연설회도 할 예정이야.”

     

    “훌륭한 생각이시군요. 얼마나 강렬한 연설로 귀족을 휘어잡으실지 궁금한데요.”

     

    “승계 쟁탈전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하려고.”

     

    “예?”

     

    상당한 폭탄발언이었다.

     

    차기 황제를 목표로 하는 승계권자는 현재 권터, 헤이케, 게오르크 셋이다.

     

    라우가야 원래 관심이 없고, 게오르크 파벌은 머리가 부재중이라 대기 상태가 되면서 약해졌다.

     

    아셀라가 그 레이스에 본격적으로 참가한다고 표명한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미리 서놓을 줄의 선택지가 늘어난다.

     

    여기서 어느 파벌을 지지했는지에 따라 그 귀족가는 다음 세대 동안 흥망이 정해진다.

     

    그들에게 아셀라의 선언은 상당한 이슈가 될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알음알음 지지율을 올려가던 인물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며 신당을 창당하는 격이다.

     

    열두 시간도 안 남았는데 그런 중요한 사항은 좀 더 빨리 얘기해주지.

     

    “분명 황녀님의 연설에 감명받아 많은 귀족이 월광궁을 지지하게 될 겁니다.”

     

    나야 아셀라의 신하니 좋은 말만 해야지.

     

    원래 빨간약을 먹기 싫으면 전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다.

     

    아셀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씨익 미소짓고는 별안간 내 얼굴에 팔을 뻗어 앞머리를 슥 올렸다.

     

    “왜요?”

     

    “역시 이쪽이 더 어울리네. 공자, 일찍 퇴근하고 루시에게 머리 손질받고 와.”

     

    “예이. 분부대로 하지요.”

     

    나는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내의원으로 출근했다.

     

     

     

    일반인 진료를 시작하니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으, 응급환자 들어옵니다!”

     

    클로에가 보고했다. 마차에 실은 환자를 신성기사들이 들것에 실어 내렸다.

     

    마침 진료 사이에 시간이 비어있었기에 응급환자에게 진단을 사용했다.

     

    “어디. 공사장 인부인가? 낙상에 의한 골절과 출혈. 수술까진 필요 없겠어. 휴고 반이 맡아.”

     

    “예.”

     

    진단 내용을 근거해서 치유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마차를 끌고 복귀하는 신성기사들이 경례를 올려왔다. 가볍게 받아줬다.

     

    “잘 작동하는데, 앰뷸런스.”

     

    “제국민에게서 평가가 아주 좋습니다.”

     

    두 마리의 기운 좋은 숫말이 끄는 마차다. 내부는 들것을 고정할 수 있고, 외부 충격이나 진동도 줄일 수 있게 만들어졌다.

     

    기본적으로 내의원에 세 대, 제도 곳곳에 일곱 대 총 열 대를 시범운영하고 있다.

     

    구급요원으로는 월광궁을 지지하는 귀족가 하나에서 신성기사들을 차출해다 썼다.

     

    짐칸 한쪽에는 황실의 문양을, 반대쪽에는 대문짝만하게 월광궁 문양을 새겼다.

     

    나이트클럽 삐끼 차량처럼 광고 효과도 되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을 텐데, 괜찮습니까?”

     

    휴고가 괜한 걱정을 해왔다.

     

    “전부 천황궁에서 내줬어. 모처럼 무제한 예산을 받았으니 이럴 때 팍팍 써야지.”

     

    황제의 은덕을 널리 알리기 위한 용도라고 하니 앰브로시아도 납득해줬다.

     

    “실제로 보조기와 양압기도 잘 쓰고 계시고. 예비 부품은 충분하지?”

     

    “예. 준비해 뒀습니다.”

     

    둘 다 지난번 미스릴 메스를 만들었던 드워프 장인에게 의뢰했다.

     

    예산 제한을 안 두니 완벽하게 만들어왔다.

    전기를 써야 하는 부분은 고가의 마석으로 대체한다든지, 성능이 좋다.

     

    황제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한 덕에 리비오가 부주치의가 되는 일은 일단 막았다.

     

     

    생각난 김에 슬쩍 리비오가 뭐 하나 살펴보니 평소처럼 진료를 보고 있다.

     

    우연히 나와 눈이 맞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환자에게 보이던 인자한 미소를 거두고 무표정으로 돌아간다.

     

    제대로 원한을 샀네.

     

    ‘그냥 물러날 녀석은 아니야.’

     

    수상한 행동을 벌이는지 앞으로도 주시할 생각이다.

     

     

    그러고 있으니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또 들려왔다. 앰뷸런스였다.

     

    신성기사들이 먼저 환자의 부상을 체크하고 정도가 심할 때만 태우기에 응급환자가 그렇게 자주 발생하지는 않는다.

     

    평소 페이스에 비하면 빠른 주기였다.

     

     

    다만 이번 마차는 좀 더 움직임이 급했다.

     

    “긴급 환자입니다! 여기 도움 좀…!”

     

    들것에 환자를 실어오는 신성기사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내의원의 시선이 집중된다.

     

    “휴고.”

     

    “예.”

     

    나 역시 환자에게 급히 달려갔다.

    진단을 쓰려는데 문제가 있었다.

     

    들것이 두 개였다.

     

    “환자가 둘이야?”

     

    “예, 예…! 그, 그게!”

     

    신성기사의 팔은 환자를 옮기다가 벌써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두 명 모두 상태가 안 좋았다. 양쪽 다 60대 여성. 체격이나 복장,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 비슷하다.

     

    쌍둥이다.

     

    고급 옷을 입은 걸로 보아 최소 귀족이다.

     

    “우선 안으로 옮겨. 상태가 안 좋으니 조심하고. 어이, 클로에 반! 전원 하던 일 멈추고 여기 도와!”

     

    월광궁 치유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진단을 사용한다.

     

    ‘한쪽은 뇌진탕, 두개골 골절, 열상, 염좌. 다른 쪽은 폐타박상, 팔과 다리 골절, 이쪽도 심각한데.’

     

    “사고야?”

     

    “교통사고입니다! 좁은 산길에서 마차끼리 충돌해서 산지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얼마나 됐지?”

     

    “30분입니다!”

     

    기사가 들것을 카트에 올렸다. 우리 치유사들이 인계에 들어간다.

     

    안쪽으로 환자를 옮기는 동안 치유사들은 옆에 붙어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생명 유지가 되도록 현상유지를 할 정도의 신성력을 불어넣는다.

     

    도중 클로에가 특이점을 눈치챘다.

     

    “어? 환자분들께서 착용하신 반지…”

     

    “화, 황실 인장입니다! 지금 보니 설마…!”

     

    황족이다.

     

    쌍둥이라고 하니 나도 두 사람이 누군지 눈치챘다.

     

    ‘황제의 여동생인 완다와 게사 자매잖아.’

     

    환자의 신분은 공주들이었다.

     

    ‘그래서 신성기사들이 유난히 난리가 났었구나.’

     

    행여나 황족을 죽게 했다간 책임이 막중해지니까.

     

    ‘누가 됐든 죽어가고 있다는 게 중요해.’

     

    내게는 상관없이 살려야 할 환자다.

     

    ‘둘 다 즉시 수술이 필요해. 하지만.’

     

    내 손은 두 개뿐이다.

     

    나는 즉시 진료구역으로 돌아가 외쳤다.

     

    “알베리치 주교님! 손이 필요합니다!”

     

    시선이 쏠리자 알베리치는 꿍시렁대면서도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환자의 상태를 본 그가 질겁을 했다.

     

    “윽, 심각하군. 귀족인가?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있든 없든 살려야 합니다. 완다 전하와 게다 전하입니다.”

     

    “뭐, 뭐라고?!”

     

    알베리치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그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됐다.

     

    “한 분은 제가 맡습니다. 주교님께서 다른 분을 맡아주시죠.”

     

    “그, 그게…”

     

    알베리치가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급해 죽겠는데 뭐 하는 거야.

     

    “어서요, 시간이 촉박합니다.”

     

    “이만한 부상은… 나, 난 못 하네.”

     

    알베리치가 손을 내저으며 한 발짝 뺐다.

     

    내가 도망치려는 그의 팔을 잡았다.

     

    “왜 못 한다는 겁니까?”

     

    알베리치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애당초 두 공주 전하도 주치의가 계시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이 먼저 치유하는 게 규정일세. 내게는 진료기록도 없다. 만일 다른 지병이 있다면 치유가 독이 될 수도 있단 말이다!”

     

    “전하의 주치의 두 분이라면 사고 때 함께 탑승하고 계셨습니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두 분 다 정신을 잃으셨기에 현장에서 치유 중입니다!”

     

    신성기사가 보고했다. 알베리치의 표정이 더욱 굳어갔다.

     

    “주교님, 상태를 보십쇼.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러니 더더욱 못 하지! 살려내면 천금을 얻겠지만 혹시 잘못되면 형벌이 떨어진다. 애초에 저래서야 가능성도 없어.”

     

    알베리치는 부담이 심하다 못해 패닉이 와버렸다.

     

    “자네 탓도 있다, 고트베르크.”

     

    “제 탓이라니요?”

     

    “자네는 맡은 한 분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내겠지. 행여나 반대쪽의 소생에 실패하면 자네보다 뒤떨어지는 치유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내의원에서 손가락질당하게 된단 말이다!”

     

    “대체 그게 무슨 변명입니까?”

     

    “아니, 그게…”

     

    어떻게든 책임을 피하고 싶어서 헛소리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패닉 상태에서 치유에 들어가봐야 환자에게 독이 될 뿐이다.

     

    알베리치는 못 써먹겠다고 판단했다.

     

    이럴 틈이 없거늘. 지금도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귓가에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흥미롭군요.”

     

    어느새 리비오가 나와 알베리치 사이에 끼어들어 있었다.

     

    암살자도 아니고, 기분 나쁘게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남자였다.

     

    그가 손을 들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알베리치는 그가 나설 줄 예상 못했는지 놀란 기색이었다.

     

    “자, 자네가 말인가?”

     

    “예. 주교님께서는 공주 전하를 살려내지 못하면 고트베르크 선생님께 패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리비오가 반안경을 고쳐 썼다.

     

    “반대로 제가 살려내고 선생님이 실패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뭐 이 자식아?”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갈 뻔했다.

     

    평소 가끔 보이는 표정 말고는 얌전하게 있길래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이놈은 환자를 사람이 아니라 수단으로 인식하는 건가.

     

    황제의 여동생인 환자다. 살려내면 분명 큰 감사와 관심을 받겠지.

     

    리비오의 목적은 황제에게 접근하는 것이니 좋은 기회라 여긴 모양이다.

     

    “어디, 어느 분으로 고를까요.”

     

    리비오가 구역을 넘어와 카트에 실린 두 공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시장에서 생선을 고르는 듯한 기분 나쁜 눈매였다.

     

    “시간 없다고, 자식아. 당장 수술실 들어가야 해!”

     

    “실례했습니다. 기왕이면 부상이 덜한 분을 고르고 싶기에.”

     

    미친 소리였다.

     

    리비오는 지금 나와 여유롭게 치료 대결이라도 펼치는 기분이다.

     

    더는 놈의 태도를 못 봐주겠어서 놈을 밀치고 즉시 카트를 이동시켰다.

     

    “당장 치유 시작하기나 해. 내가 더 심한 쪽을 맡겠어. 환자에 장난질 치지 마라.”

     

    어떻게든 나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하니 환자는 필사적으로 살려낼 터다.

     

    그도 일부러 치유를 대충 할 순 없다.

     

    “카트째로 수술 실로 들어가!”

     

    내 명령에 치유사들이 분주해졌다.

     

    여태 훈련해온 덕에 응급처치 중인 치유사들 전원은 한 몸처럼 팀워크를 발휘했다.

     

     

    월광궁 사무실의 수술실까지 들여보내 본격적인 처치를 시작한다.

     

    우리의 환자는 공주 쌍둥이 중 동생인 완다 쪽이었다.

     

    “후우.”

     

    클로에가 가져다준 물로 목을 축이고는 심호흡과 함께 준비했다.

     

    소독 후 수술복으로 갈아입는다.

     

    수술실로 들어온 환자에게는 클로에가 우선 수혈과 응급 마취를 준비했다.

     

    빠르게 엑스레이와 MRI를 찍어 세부 상태를 파악하고, 수정구로 띄워 팀과 공유한다.

     

    네 명의 치유사가 보조할 준비를 마쳤다.

     

    “좌측 폐에 타박, 장기가 다수 손상됐어. 복부에 열상. 바로 치유주문을 쓰면 내장이 전부 뜯어져서 순환계가 멈추고 심정지할 상황이야. 바이패스 연결하고 봉합한 후에 치유 들어간다. 클로에, 외부 순환 준비해. 산소 포화도와 혈압 계속 확인하고.”

     

    좌측 폐에 나뭇가지가 박혀 기능을 정지하기 직전이다.

     

    지금은 이물질이 틀어막았지만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 양쪽 폐가 다 쪼그라들면 사망하고 만다.

     

    우선 산소가 충분한 혈액을 공급받을 길을 만들어야 한다.

     

    “골절 부위에는 응급처치를. 흉부 다음에 치료하겠어.”

     

    “네!”

     

    나는 메스를 들었다.

     

    “수술을 시작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Y Kevin Bae 후원 감사해요! 저도 전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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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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