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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5

       졌구나.

       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난 2달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에 짙은 허탈감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안도감이 가슴 한구석에서 꾸물거렸다.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녀도 무엇이라고 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어릴 때 봤던 어떤 연극이 떠올랐다.

         

       무대 마무리 인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난입한 귀족 남성이 주연 남배우를 밀치고는 주연 여배우와 팔짱을 끼더니 관객들에게 손을 흔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용기 있고 멋진 남성으로 보였던 남배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밀려났고, 남배우와 천생연분으로 보였던 여배우는 그 귀족 앞에서 교태를 부렸다.

         

       나중에 머리가 좀 크고 나서는 그런 일이 공연계에서 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무대 위의 세상을 독립적인 것으로 여기던 어린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장면이었다.

         

       ‘나는 그래도 내 자리는 뺏기지는 않았어.’

         

       그녀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했다.

         

       “자작님의 변호가 안 먹혔던 거야?”

         

       그녀의 질문에 원더스타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작님은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뭐?”

         

       엘라의 표정에 떠오른 의문을 보고 그는 미소지었다.

         

       “바텔 씨께서 모두 말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변호는 필요 없었습니다.”

         

       지난밤에 있었던 황금 토마토 추첨.

       거기서 최고점을 얻은 사람은 다름 아닌 샛별 서커스단의 단장인 미노바였다.

         

       “우리가 번 돈은 당일 정산 전까지는 쓸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오늘 번 코인 대부분을 카드를 구매하는 데 썼지.”

         

       그의 선언에 홀 안에 있던 사람들 전원이 아연실색했다.

       원더스타인도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속으로 어처구니없어하긴 마찬가지였다.

         

       규칙상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매점에서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다.

         

       실제로 미노바의 딸인 루엘로는 우몬과 함께 초상화를 그려서 갔고, 스벤도 샛별 측에서 파는 안마용 방망이를 샀다가 단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쟁자도 구매할 정도로 매력적인 상품을 팔아보라는 취지에서 허용된 것이었다.

       이렇게 하루 치 코인을 몽땅 쏟아부어서 상품을 쓸어 담아가는 건 주최 측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관객들이 자기네 공연을 보는 동안 직원들을 시켜 카드를 모았음을 밝혀 그들에게 두 번의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황당한 상황에 분노했다.

         

       “이게 말이 되냐!”

       “우리가 공연 구경하는 동안 뒤에서 그런 수작을 부려?”

       “넌 자존심도 없냐, 이 닭대가리야!”

         

       사람들의 항의에 미노바는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어차피 질 거 몇 코인 차로 지든 무슨 상관이야! 아, 불만 있으면 내 앞에 직접 나와서 따지든가!”

         

       미노바의 뻔뻔한 대꾸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양쪽 어깨가 각각 30cm가 넘는 거한에게 덤빌 용기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았다.

       깐족거리는 것에 자신 있는 도스빌 남작조차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미노바는 그렇게 몇 번 더 소리를 치고 근육을 부풀려 보이는 것으로 사람들의 항의를 물리쳤다.

       그의 무례하고 막 나가는 진행 방식은 볼 때는 즐거웠는데, 이렇게 직접 당해보자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소문대로군. 소문대로야.”

       “개심했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깡패나 다름없군!”

         

       그러나 아무리 화나도 마지막 말은 그의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특히 딸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미노바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그는 방금 말을 꺼낸 남성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으아악, 곡예사가 사람 친다!”

       “아빠, 그만해!”

       “단장님, 참으세요!”

         

       루엘로와 부하 단원들이 달려들어서 흥분한 그를 겨우 진정시켰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나자 미노바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원더스타인에게 말했다.

         

       “후원자가 명령해서 어쩔 수 없었네. 승부에서 져도 상관없으니 이걸 손에 넣으라고 하더군.”

         

       후원자.

       그제야 그는 미노바가 이런 일을 벌이면서까지 칵테일을 손에 넣으려 한 이유가 이해가 갔다.

         

       “사람들에게 싸움은 왜 건 겁니까?”

         

       원더스타인은 돌연 차분하게 변한 그의 태도를 보고 아까 그가 막 나가는 행동을 했던 것이 연기임을 알게 되었다.

       미노바는 민망한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쩝, 후원자가 자기 이름으로 최대한 뒷말 안 나오게 하라고 하더군. 하하, 내가 악역을 자처해서 매를 대신 맞은 거지.”

         

       이건 그가 예전에 주먹을 써서 먹고 살던 시절에 자주 했던 일이었다.

       그가 싸움으로 상황을 해결하고 나면, 고급 정장을 입은 인간들이 나타나 과실을 주워가는 식이었다. 그는 그 대가로 돈을 받았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내 평판은 별로 안 좋으니까. 이 서커스단도 대회 끝나면 해체될 예정이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새 인생을 살겠다고 시작한 일인데 예전과 비슷한 일을 해버렸으니 개운할 리가 없었다.

         

       이것이 기획형 서커스단의 단점이었다.

       그는 물건을 팔 때도 후원자가 지시한 대로 해야 했고, 방금도 승부가 갈리는 타이밍이었는데 후원자의 욕심에 승리의 가능성을 포기해야 했다.

         

       “이렇게 승리를 차지해도 되나 싶습니다.”

       “왜? 후원자의 힘이 커서?”

       “그렇죠.”

         

       미노바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핫, 그러면 도박판 건달패들이 깽판을 벌인 덕에 우리가 이겼다면 나는 떳떳했겠나?”

         

       원더스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는 또 생각 못 했다.

         

       “이번 대결은 자네가 이긴 거야. 상대인 내가 보증함세.”

         

       그가 원더스타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 그럼 내기는…….”

       “내기?”

       “대결 전에 한 것 말입니다. 미노바 씨가 졌으니, 우리 엘라 양이 루엘로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그의 장난기 섞인 말에 미노바의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이 새끼가? 웃기지 마! 어이, 칵테일 가져와! 환불할 거다!”

       “1로티인데요?”

         

       일이 그렇게 마무리된 덕분에 아나이스는 굳이 황금 토마토에 대해 변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마지막에 올린 매출의 수익이 0이 됐지만, 샛별 역시 후원자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날 번 코인을 대부분 소모했기 때문이다.

         

       정산결과, 승리는 괴물 서커스 쪽으로 확정되었다.

         

       원더스타인은 품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동전보다 조금 큰 크기에 붉은 빛을 발했다.

         

       “별입니다.”

         

       엘라는 그가 내민 보석을 받아서 살폈다.

       그것은 장미꽃처럼 잎이 여러 층으로 겹치는 형태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 뒤에는 옷에 걸 수 있게 배지 클립 역시 달려 있었다.

         

       엘라는 가만히 앉아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것을 7개 모아야 원더 스테이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이지.

         

       그녀는 그렇게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결국에 그쪽이나 이쪽이나 마지막엔 후원자들에게 휘둘린 것처럼 되어버렸네.”

         

       엘라는 손에 든 별을 던졌다 받았다.

         

       “왜 다른 분들이 무료 공연에 학을 뗐는지 알겠어. 이거 완전 상인들의 돈놀이에 춤추는 곰이 된 기분이야. 정작 공연의 질을 올리려는 노력은 소홀히 하게 되고.”

       “소홀히요?”

       “마야의 환상 말이야.”

         

       그녀의 말에 원더스타인도 무슨 말인지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는 그림을 인쇄하는 데 마력의 상당수를 소모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환상을 상당히 간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말대로 공연 외적인 일 때문에 공연의 질이 떨어진 것이다.

         

       Free to Play, Pay to Win.

       그가 현실에서 즐겼던 게임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무료 플레이를 내걸고, 한정 아이템과 확률형 뽑기로 돈을 버는 데 치중하면서 정작 게임의 개발은 엉성하게 하는 것이다.

         

       장미 풍차에서 내건 주제는 필연적으로 공연의 품질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입장료가 무료이기에 공연을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2주 차 대결에서 이미 그런 전조가 있었다.

       우직하게 곡예를 펼친 파파엘 서커스는 반복적이고 중독적인 로고 송으로 상품 판매에 치중한 망고 극단에게 지고 말았다.

         

       제일 중요한 건 돈이라고 외치던 브왈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카바레를 경영해온 그가 이런 일이 터질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의도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브왈레 씨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야. 흥행은 중요하지. 우리가 쓰는 무대, 소품, 장치, 인건비 모두 돈에서 나오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

       “동의합니다.”

         

       비록 대결의 주제가 그것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게임 개발사들의 장사 방식을 빌려오긴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게임은 그런 게 아니었다.

         

       트릴 트릴로 시리즈처럼 수집, 파고들기 요소가 가득하고 자유도가 높은 게임을 선호했다.

         

       “좋아. 어쨌든 배지를 얻었으니까. 이제 다음 시험에 대해 연구해 볼까?”

         

       엘라는 노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원더스타인이 그녀의 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그를 노려봤다.

         

       “아, 뭔데. 책 읽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그게 아니라…….”

         

       그때, 그녀의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고개를 빼곰히 내밀었다.

       유라크네였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단장님, 아직 엘라가 옷을 안 갈아입었네요?”

       “잠시 이야기를 한다고 말이죠.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원더스타인은 손에 든 엘라의 노트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시험 통과 기념 파티를 해야죠.”

       “아, 맞다. 그렇지.”

         

       엘라는 옆방으로 달려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집사가 수선한다고 가져갔던 옷은 확실히 새것처럼 깔끔하게 다듬어져서 돌아왔다.

         

       엘라는 잠옷을 블라우스와 치마로 갈아입고 연미복을 걸친 후, 머리에 모자를 썼다.

       자연스럽게 비둘기는 그곳이 제집인 양 모자 속으로 들어갔고, 쥐는 그녀의 어깨 위에 올랐다.

         

       엘라는 방에 나와서 원더스타인에게 손에 든 보석을 내밀었다.

         

       “이거.”

       “아, 별이요?”

         

       원더스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엘라 양이 가지세요.”

       “뭐?”

       “그 배지는 엘라 양의 옷에 달면 보기 좋을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그녀는 당황했다.

         

       “저, 정말? 이, 이거 별이라고! 6대 극장의 시험을 통과한 증표!”

       “엘라 양은 충분히 달 자격이 됩니다.”

       “하, 하지만 단장은 당신인데…….”

       “다세요.”

         

       그의 단호한 한 마디에 엘라는 보석을 날름 낚아채 손에 꼭 쥐었다.

         

       “조, 좋아. 무르기 없기다?”

         

       그녀는 옷 어디에 달면 멋질까 고민하다가 연미복 칼라에 클립을 끼워 넣었다.

       그녀의 붉은 연미복 사이에서도 보석의 반짝거리는 붉은색은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둘은 그렇게 식당까지 함께 걸었다.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함께 무대에 며칠을 섰던 덕분일까.

       엘라는 예전보다 그 동행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뜩 그녀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예전부터 갖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있지. 당신은 왜 서커스 그랑프리 본선에 그렇게 오르려는 거야?”

        “후후, 원하는 게 그곳에 있어서요.”

       “원하는 거? 그냥 당신 힘으로 뺏어서 못 가져오는 거야?”

       “네. 그래요.”

       “그렇게 귀중한 거야?”

         

       그녀의 질문에 그는 엘라의 가슴에 달린 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보석보다 더 가치 있는 거라고 해두죠.”

         

       연회장 앞에 도착했다.

       다른 단원들은 이미 모두 와 있는지 안이 시끌벅적했다.

         

       들어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했다.

         

       “다음 도시로 떠나는 건 일단 엘라 양이 몸을 완전히 회복하고 나서입니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세요.”

         

       엘라는 괜찮다고 멀쩡하다고 허세를 피우려고 했지만 그만뒀다.

       이미 두 번이나 쓰러졌던 사람이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염치없는 말이었다.

         

       그래. 앞으로는 이제 이런 폐를 끼치면 안 되지.

       더 노력해서 더 강해질 거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대 밖으로 밀려나지 않게.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그녀를 반기는 단원들의 미소와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

         

         

         

       장미 풍차 카바레의 시험 (끝)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루즈 편이 끝났습니다!

    모험 하나가 끝났네요.
    물론 아직 여정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유료 연재는 처음이라 중간중간 미숙한 점도 아쉬운 선택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독자님들의 응원 덕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화에서 또 뵙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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