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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5

        

       엘라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토끼야아아아아아아!”

         

       식사하고 있던 이아린이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엘라를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껴안기에 불편했는지 엘라의 몸 위에 올려져 있는 엘라의 자칭 언니를 조심히 침대에 내려놓고, 엘라만을 다시 껴안았다.

         

       “아니, 잠! 잠깐! 놔요! 놔봐요! 나 지금! 나 지금!”

       “토끼야! 나 기억해?! 응? 응? 멀쩡하지? 이상한 곳 없지?! 다행이다!”

       “아니! 아니이이이! 놔봐요! 나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고! 놓으라고요!”

         

       엘라는 자신의 몸을 껴안는 이아린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다. 내심 레즈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이아린이 자신의 몸을 껴안자 위기감도 들고, 부끄럽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따져야 할 수많은 것들은 다 제쳐두고 이아린을 떼어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마녀가 무인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속절없이 수면 인형처럼 이아린에게 붙잡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휴.”

         

       뒤늦게 들어온 이세린은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침대 한쪽에 누워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뭐,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그…. 일단 이거부터 입혀줄게요….”

         

       이세린은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에게 구해온 티셔츠와 바지를 입히고는 엘라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이아린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퍼억!

         

       “악!”

       “그만 좀 떨, 떨어져! 이 멍청이 같으니!”

         

       그녀는 억지로 이아린을 엘라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져온 티셔츠와 반바지를 그녀에게 입히고는, 그대로 몸을 들어서 침대에 앉혀놓았다. 침대에 앉혀놓자 몸을 꾸물꾸물 움직일 힘은 있었는지 헤드 보드에 몸을 기댔고, 앞서 옷을 입혔던 아이 역시 꾸물꾸물 움직여서 엘라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편하네요~”

         

       엘라는 능청스럽게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아이에게 무언가 따지려는 듯 화난 얼굴로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때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안심감이 든다거나 친근감이 드는 것이 아닌, 무언가 도망치고 싶은 듯 꺼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침대 앞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보며 방긋 웃고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마치 아기에게 축복을 내리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손길을 느낀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소리쳤다.

         

       “데르 게 바터 토드!”

         

       그 말을 들은 진성은 슬쩍 표정을 굳혔다.

         

       “흠.”

         

       데르 게 바터 토드(Der Gevatter Tod).

       대부가 된 죽음(Godfather Death)이라는 이야기의 독일어 명칭이었다.

         

       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그것을 아는 것 자체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대부가 된 죽음’의 저자인 그림 형제는 독일 사람이었고, 엘라는 독일에서 지냈으니 그 이야기를 모를 수가 없었을 터. 그리고 엘라에게 정보를 얻는 담비 역시 당연히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말한 것은 이상하다.

       고맙다는 말이나 누구세요, 같은 질문도 아닌.

       만나자마자 저것을 내뱉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심지어 그가 잘 알고 있는 담비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초면에 저런 말을 하지 않을 텐데.

         

       진성은 의문을 품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신 겁니까?”

         

       그러자 담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꿈속에서 만난 어떤 할아버지가 은인을 만나면 이 말부터 하라고 했답니다~”

       “할아버지?”

       “넹! 묘수라면서 저한테 알려줬어요!”

         

       할아버지?

       꿈속에서 만났다?

         

       진성은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키가 크고, 불꽃을 다루지 않았습니까?”

       “네에~ 그랬답니다!”

       “몸도 비쩍 말랐고?”

       “네에~”

         

       커다란 키.

       비쩍 마른 몸.

       불꽃을 다루고, 정신의 깊은 곳을 탐구하는 주술사.

         

       아슈토쉬 싱(Ashutosh Singh).

         

       인도에서 불꽃의 현인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주술사였으며, 세계 3차 대전 당시 힘없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가 퍼지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위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성과 연이 닿지 않아 만날 일은 없었고, 내심 그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였는데….

         

       지금 담비의 입에서 그 주술사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진성은 그녀와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데르 게 바터 토드. 그 말만 했습니까?”

       “네에~ 그거만 말하면 될 거라고 했어용~”

         

       진성은 가만히 담비를 바라보았다.

         

       ‘대부가 된 죽음이라.’

         

         

        * * *

         

         

         

         

       먼 옛날, 한 아버지가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12명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고 있던 아버지는 13번째 아이를 얻게 되었고, 이 아이마저 키우다가는 전부 굶어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를 찾아서 아이를 부탁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렇게 한참을 대부가 될 사람을 찾아 나서던 도중 남자는 대부가 되어주겠다는 존재를 보았다.

         

       [ 내가 대부가 되어주겠다. ]

       [ 당신은 누구십니까? ]

       [ 나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이며, 곡식을 영글게 하는 존재이다. 또한, 하늘을 맴돌며 안식을 주는 빛이요, 모든 것이 자라나는 대지이기도 하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며, 드넓게 펼쳐진 바다로다. 작은 벼룩에서부터 커다란 맹수까지 나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나는 형체가 없되 너희들이 섬기는 것 자체이니라. 나는 신이요, 너희의 우상이다. ]

         

       남자는 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 거절하겠습니다. 당신은 부자에게는 베풀지만 가난한 사람은 굶주리게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강한 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호의적이지만, 저와 같은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할 수 있는 분입니다. 탐스럽게 열린 과실과 곡식은 부잣집에만 가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한 톨도 주지 않으려 하지요. 커다란 맹수는 창칼로 보호받는 부자 대신에 가난한 우리를 먹이로 삼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존재입니다. 당신을 제 아이의 대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

         

       그렇게 남자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또 다른 이를 만났는데, 그 행색이 참으로 기괴했다.

         

       [ 내가 네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겠다. 아이에게 위험할 만한 것을 해치워주고, 훗날 그 아이가 부와 명예를 얻도록 해주마. ]

       [ 당신은 누구십니까? ]

       [ 나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존재이며, 너희가 악귀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아이가 나를 섬기고 모시기만 한다면 나는 네 아이에게 부를 거머쥐게 할 것이고, 끝없는 명예를 줄 것이다. ]

         

       남자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 당신은 사람을 속이고, 괴롭히며 나쁜 일을 하지요. 당신이 대부가 된다면 제 아이 역시 사악하게 물들 것입니다. ]

         

       그렇게 길을 떠난 남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죽음.

         

       [ 죽음이시여, 제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따지지 않고 집행을 공평하게 행하며, 선하고 착한 것에 상관없이 끝을 공정하게 고하는 존재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제 아이의 대부가 되기에 알맞은 분이십니다. ]

         

       죽음은 남자의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은 대부가 되었고, 성심성의껏 아이를 후원해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성년이 되던 해.

       죽음은 대부의 선물로서 아이를 유명한 의사로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자신이 환자의 머리맡에 있으면 자신이 알려준 약초를 달여 마시게 하고, 발치에 서 있을 때에는 담담히 죽음을 고하라는 것이었다.

       아이가 대부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 나라에 이름을 떨치는 유명한 의사가 되는 것은 금방이었고, 아이는 대부의 선물로 부와 명예를 얻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자신의 병 때문에 아이를 왕성에 불렀다. 하지만 그의 대부는 왕의 발치에 서 있었고, 아이는 왕이 약속하는 어마어마한 보상과 대부와 한 약속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죽음과의 약속을 어기고 약초를 달여서 왕에게 마시게 했고, 왕은 죽을 운명이었음에도 살아나게 되었다.

         

       대부는 분노했다.

         

       [ 이놈! 감히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죽을 사람을 살려주다니! 당장이라도 네 목을 잘라서 데려가고 싶지만 한 번은 봐주겠다. 내 대부로서 너의 성장을 지켜보았으니, 오직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것이다. 네가 진정 나를 대부로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는 이런 일을 벌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어긴다면 너를 대자라 여기지 않고 그대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

         

       아이는 대부의 분노에 덜덜 떨면서 그러겠노라고 약속하고 또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을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 내 딸이 병에 걸렸네. 병이 낫게 해준다면 무엇이든지 해주겠네. 공주만 살려준다면 자네를 딸의 남편으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겠네! ]

         

       공주가 중병에 걸려서 드러눕게 되자 왕은 자신을 낫게 한 아이를 찾아 부탁했다.

         

       공주의 상태를 보기 위해 침실에 들어간 아이는 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아리따운 공주의 외모는 아직 제 짝을 찾지 못했던 아이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대부는 머리맡이 아닌 발치에 서 있었다.

       이는 공주가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아이는 고민했다.

       공주를 살릴 것이냐 말 것이냐.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아이는 저번에 대부가 했던 경고의 무게를 지워버리고, 이번에도 용서해 줄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앞서 왕에게 그러했듯 약초를 달여 공주에게 먹였고, 대부는 경고했음에도 약속을 또다시 어겨버린 아이를 그대로 끌고 가버렸다.

         

       그제야 자신이 행한 일의 무게를 깨달은 아이는 대부에게 애걸복걸했다.

         

       [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 대부이시지 않습니까? ]

         

       그러자 죽음은 아이를 끌고 초가 가득한 곳으로 끌고 갔다.

         

       [ 보아라. 저것이 사람의 수명이다. 초가 길면 수명이 많이 남은 것이고, 불꽃이 밝을수록 생명력이 강하다. ]

       [ 저 중에 제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

       [ 바로 이것이다. ]

         

       죽음이 가리킨 초는 볼품이 없었다.

       길이는 짧아 얼마 남지 않았고, 불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작았다.

         

       [ 아, 대부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

       [ 어떻게 말이냐? ]

       [ 이 불꽃을 다른 초에 옮겨주십시오! ]

         

       죽음은 애원하는 아이의 손에 초를 올려주었다.

       아이는 죽음이 제 청을 들어주었다고 생각해 반색했지만,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불꽃은 순식간에 남아있는 초를 모조리 녹여버리곤 그대로 꺼져버렸다.

         

         

         

        * * *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라는 것은 아이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당장 대부를 찾아 헤매던 아버지는 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앞선 둘의 요청을 거부하였고, 대부가 된 죽음은 선물이라면서 아이에게 의사의 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나 강조하던 ‘공평함’을 대자에도 내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했으니.

       이 이야기에서 ‘대부’는 아이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 존재였다.

         

       ‘영향력이라.’

         

       그리고 이는 진성이 하려고 했던 일을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기도 했다.

         

       진성은 담비가 함부로 목숨을 던질 수 없도록 자신에게 속박되는 이름을 내려서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이는 무형의 목줄이자 운명이라는 형체 없는 족쇄가 되어 담비를 구속할 테지만, 그 대가로 안전과 행복한 미래를 주었으리라.

         

       아슈토쉬 싱은 진성의 이러한 계획을 눈치채고 담비의 입을 통해 진성에게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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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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