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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6

        막사 밖을 나가지 못한 지 2주가 넘었다.

         

        꿉꿉한 공간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금안족의 몸이 되었더라도 습도 100퍼센트의 공간에서 여우들과 지내는 건 버티기 힘들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왜냐, 이것만 버티면 다 끝나니까. 이 정도 고통으로 고농축 우라늄을 얻을 수만 있다면야 상관없다. 오히려 값싼 대가라고 생각한다.

         

        버멜이 말한 3주가 다 되어가고 있다. 빗줄기가 점차 약해지는 중이다. 남서쪽으로 맹렬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그 세기가 한풀 꺾였다.

         

        -후우우웅

         

        “이 정도면 가도 될 것 같아.”

         

        오랜만에 우비를 벗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기지개를 켜며 숨을 한껏 들이마쉬자 신선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자, 모두 짐 싸!”

         

        요호들은 일사분란하게 텐트를 정리하고 남은 식량을 점검했다. 모두가 그동안 소식을 한 덕분에 보존식은 넉넉한 편이었다. 적어도 마을에 돌아갈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양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겠지.

         

        “그럼,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엄마는 이모 삼촌들이랑 천천히 따라와!”

         

        살리에르 영지까지 빠르게 도달하려면 금안족의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나는 프레이를 업고 최소한의 장비만을 챙긴 채 서쪽 숲을 가로질렀다.

         

        파스트렌드 마을에 도달하는 덴 하루면 충분했다. 

         

        “…심각하네.”

        “예상은 했는데… 이러면 여기서 생활할 수 없어.”

         

        쌓아놨던 둑이 무너진 건 확실하다.

         

        “어떡할래? 나랑 같이 영지에 가 있을까?”

        “가긴 어딜 가. 여기가 내 집인데. 나 혼자라도 복구하고 있을 테니까 넌 백작님에게 말이나 잘 전해줘.”

         

        프레이는 양 손을 펼쳐서 연성을 진행했다. 무너졌던 울타리를 다시 세우고, 바람에 날아가버린 솟대를 찾아 마을 입구에 꽂아넣었다. 땅과 나무를 끌어올려 임시방편용 막집을 여럿 지어내기도 했다.

         

        쟤 같은 실력자가 있으면 마을 재건은 금방 끝나겠지. 나는 프레이를 이곳에 내려둔 채 살리에르 영지로 향했다.

         

        그나마 온전한 도개교를 찾아 강을 건너니 마찬가지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서쪽 영지가 나타났다. 

         

        대로변에는 작업복을 입은 공무원들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비를 챙겨 수해복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가며 영주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 돌아오는 길이에요?”

         

        때마침 저택 입구에는 메이드 하나가 태풍으로 망가진 정원을 손질하던 중이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품에서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네. 꽤 오래 걸렸죠?”

        “아뇨, 친구분께서는 여전히 부지런하시네요. 그런데 이 편지는 뭔가요?”

        “살리에르 백작님을 만나 뵈고 싶어서요. 급한 일입니다.”

         

        친구 집이라고는 하나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남의 집이니 이런 식으로 예의를 차려야겠지.

         

        “굳이 편지로 하실 필요 없는데…. 일단은 알겠어요.”

         

        메이드는 편지를 받아들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머리 정말 잘 되셨네요. 역시 친구분께서는 검은 머리카락이 훨씬 잘 어울리세요.”

        “네?”

         

        갑자기 뭔 소리지. 내가 멍한 표정으로 있자, 대화의 핀트가 엇나간 걸 알아차린 메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카밀라네 미용실에 들러서 탈색하고 오신 거 아니셨나요?”

        “탈색이요? 제가요?”

         

        태어나서 염색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네. 조금 있으면 개학이니까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염색 푸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전 염색한 적도 없는데요.”

        “이상하다…. 아무튼 알겠어요. 가주님께 말씀드리고 올 테니까 집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주세요.”

         

        나는 정원 내 벤치 아무 곳에나 앉았다. 가주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저택 내부로 발을 들이는 건 무례하다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무엇보다도 여기 온 건 협상을 위해서다. 살리에르 백작이 어진 사람이라는 건 익히 보고 들어서 알지만 혹시 또 모르니까.

         

        제아무리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협상을 할 땐 손익을 따지기 마련이다. 프레이가 속한 요호족과 그 외 수인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다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우라늄 못 받는다고.

         

        [지구로 귀환하려면 마법부터 다 연구하는 게 어때요?]

         

        “겸사겸사 하는 거지 뭐. 왜 이리 보채?”

         

        [아뇨,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서요.]

         

        그 이유야 간단하지. 빙의자와 만난 뒤로 암울한 정보를 하나 입수했거든.

         

        ─ 마왕은 이르면 1년, 늦어도 2년 이내로 부활한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지금부터라도 빠르게 해 두지 않으면 지구로 돌아가기 전에 이 세상이 멸망한다. 그걸 막으려면 이쪽을 우선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이렇게 하나 만들고, 나머지는 시간 되면 플레어를 써서…….”

        “친구분!”

         

        잠시 수소탄을 만드는 트랙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자니 아까 전의 메이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백작님께선 친구분이 백작님 만나는 걸 거절하신다던데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저기, 알아듣게 설명을 좀….”

        “말 그대로에요. 제가 백작님께 편지를 드렸는데, 잠깐 고민하시다가 다른 메이드에게 당신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래서요?”

        “그 메이드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나요?”

        “아뇨?”

        “아무튼! 당신을 만났다고 말한 그 메이드가 백작님에게 편지가 잘못 왔다는 식으로 말한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뭐야. 누가 날 사칭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그 다른 메이드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 정확히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겠지. 뭐하러 그런 거짓말을 해 가며 해고당할 위험을 감수하겠어?

         

        그렇다고 해서 나 말고 또 다른 금안족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건 버멜에게 못 들었다. 기껏해야 있는 게 요르문간드인데, 걔는 산에서 안 나오잖아.

         

        “하는 수 없죠 뭐. 제가 직접 가 봐도 될까요.”

        “네! 절 따라와 주세요!”

         

        아, 불편하게시리.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다.

         

         

        **

         

         

        태풍이 지나간 직후.

         

        살리에르 백작은 여러 업무로 일손이 부족했다. 수해 복구 작업에 관한 문서를 꾸준히 작성해야 했고, 중앙 정부로부터 재난지원금을 받기 위한 청원서도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 루브아르 박물관 침수 건은 어떻게 할까요?”

        “끄응, 거기도 무너졌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박물관.

         

        살리에르 영지 내부에 위치한 루브아르 박물관은 제국에서도 꽤 큰 용적률을 자랑하는 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은 제국은 물론이요, 대륙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피해를 복구할 때까지는 봉인석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구나.”

         

        봉인석, 다른 말로는 로드스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여신 르퀴네스는 정령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마왕의 힘을 다섯 개의 거대한 마정석으로 나누어 봉인했다고 전해진다.

         

        정령왕을 시해한 마왕의 힘이 너무 강대했기에 봉인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봉인된 로드스톤들을 인간과 엘프가 나누어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적, 청, 녹, 흑, 금.

         

        그중 적색의 로드스톤은 제국 화계마도사들이 관리하는 봉인석이다. 제국 내에서 살리에르 가문이 적의 로드스톤을 관리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는데, 이는 마수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침수 피해로 로드스톤에 손상이 가게 둘 수는 없다.”

         

        살리에르 백작은 박물관 내 물건 일부를 다른 장소로 옮기겠다는 공문서를 재빨리 만들어 처리했다. 

         

        로드스톤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루브아르 박물관에 필적할 만한 용적량을 지닌 박물관은 틸레트 아카데미에 있는 것 하나뿐이었으니까.

         

        “됐다, 로르웰. 이걸 박물관 관장에게 가져가서 도장 좀 받아오렴.”

        “알겠습니다.”

         

        로르웰이 나가자 이번에는 메이드가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

        “로테 님의 친구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여기서 묵고 있는데 굳이 서면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나?”

        “글쎄요.”

         

        백작은 편지를 펼쳐보았다. 태풍 피해 및 수인족과 관련하여 급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가능한 시간을 찾아 자리를 마련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별일이군. 일단 이것만 재가하고 부르도록 하겠네.”

         

        급한 일감을 다 처리했을 땐 30분이 꼬박 흐른 뒤였다. 백작은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를 불렀다. 어리버리한 견습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나타났다.

         

        “우리 집에서 묵고 있는 금안족 소녀 좀 데려오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나타난 메이드는 우물쭈물해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담백하게 전했다.

         

        “그런 편지, 자기는 안 보냈다고….”

        “이상하군.”

         

        이런 걸로 장난칠 애로는 안 보였는데. 그가 턱을 짚으며 괴리감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 백작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그 소녀의 목소리다. 살리에르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가 집무실 문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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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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