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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6

       늪처럼 빠져드는 포근한 이불, 푹신하게 머리를 감싸는 베개, 잔잔히 몸을 데워주는 따스한 햇살까지.

         

         

       “허억…!”

         

       의식은 감각들과 함께 수면 위로 떠 오르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개를 휘휘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어느 고급 호텔의 객실과 같은 풍경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내가 누워있던 곳은 넓은 침대였고, 주위엔 고식적인 집기와 장식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장소는 내 기억에는 없다. 즉, 처음 오는 곳이라는 뜻인데.

         

       대체 여기가 어디지.

         

       그러다 문득 산들바람이 얼굴의 솜털을 간지럽히는 감각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얼굴을 더듬었다.

         

       말랑한 피부의 감촉, 그리고 왼쪽 눈 아래 가로로 길게 뻗은 우둘투둘한 흉터의 질감까지.

         

       기분 나쁠 정도로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촉감에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한다.

         

         

       “가면…내 가면은…”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휘 돌려가며 내 물건을 찾았다.

         

       머지않아 침대 옆의 협탁 위에 놓인 그것을 찾을 수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면은 오른쪽 눈가가 산산조각나 엉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그 옆에는 전에 쓰던 것과 똑같은 새 가면이 하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유를 따져볼 새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라도 집어 들어 허둥지둥 잠금쇠를 조였다.

         

       그렇게 약간의 안정을 찾으니 그제야 지난 기억들이 조금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멘토링 체험 학습을 빙자한 연민하의 초대, 기묘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던 적화의 본가, 마족과 내통한 것도 모자라 자기 딸까지 마법식 재료로 쓰려 한 정신 나간 적화의 가주, 갑자기 침공해 들어온 패천과 성산의 군세, 단장이 건네줬던 주소를 떠올린 뒤 연민하를 찾던 중 앞을 가로막은 성산의 최이레. 그녀를 쓰러뜨린 다음…그다음은…

         

         

       “…”

         

       아무리 끙끙거려도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이 없다. 마치 종이에 먹을 칠한 것처럼 깜깜하다.

         

       무리하게 예측안을 운용해서 잠깐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려 몸을 살폈다.

         

       약을 머금은 붕대가 팔다리 여기저기에 감겨 있는 게 보였다.

         

       욱씬거리는 통증이 아직 가득하긴 하지만, 당장 큰 문제가 있는 거 같지는 않다. 해독제라도 먹었는지 내내 머리를 어지럽히던 열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단장이 알려줬던 그 주소인가? 연민하는 어디 있는 거지? 내 가면은 난리통에 부서진 거고? 그런데 내 사정은 어떻게 알고 새 가면이 준비되어 있던 거지.

         

       엉킨 실타래처럼 생각은 뒤죽박죽.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던 찰나.

         

       예고도 없이 문손잡이가 돌아가더니, 벌컥-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적으로 경계의 시선을 보냈지만 그곳에서 나타난 건 사용인 복장의 어느 여자였다.

         

       그녀가 나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저…”

         

       “사모님…! 도련님이 눈을…!”

         

       말을 걸 새도 없이, 그녀는 순식간에 몸을 돌려 복도로 떠나간 뒤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곧이어 부산스러운 기색이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떠나갔던 사용인 여자가 다시 문을 열고 모습을 보였다.

         

       다소곳한 자세를 취한 그녀의 뒤로 곧장 따라 들어온 건 두 명의 남녀다.

         

       중년과 노년의 사이에 걸친 듯한, 누군가와 꼭 닮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한 명.

         

       그리고 단아하고 기품있는 외모의, 꼭 단장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연배로 보이는 여인이 한 명.

         

       작은 몸짓 하나에도 자연스러운 위엄과 예의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또한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했다.

         

       바로 나를 보는 눈동자에서는 그 어떠한 적대감이나 깔보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되려 따뜻하고 자애로운 시선만을 보내는 게, 경계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기품있는 외모의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다급하게 나를 만류했다.

         

         

       “아가. 괜찮단다. 그대로 있으렴.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그럴 필요 없단다…”

         

       “네? 네…”

         

       “옳지…”

         

       묘하게 어린아이 취급이었지만 어쩐지 거부할 수가 없는 어투였다.

         

       엉거주춤 다시 몸을 돌리니 여인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누가 봐도 이 저택의 주인인 듯한 그 행동거지에, 나는 가장 궁금했던 의문을 그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저랑 같이 여학생 한 명이 오지는 않았습니까. 키는 저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고, 새초롬한 인상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금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러나 여인이 염려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미소 지었다.

         

         

       “안심하려무나. 적화의 아이라면 이곳 별실의 다른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까. 정신을 차리려면 좀 시간이 걸리긴 해도,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구나.”

         

       “정말인가요…”

         

       “정말이고말고.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단다.”

         

       여인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마음이 좀 놓인다. 어쨌든 같이 빠져나오는 건 성공했구나.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그 난장판에서 당장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큰 성과다.

         

         

       “네가 오는 걸 쭉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렇긴 해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이어 뒤에 서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인상과 달리 친절한 어투는 여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를…기다리고 계셨다고요…?”

         

       “그럼. 글쎄, 이이가 너를 기다리다 못해 직접 요람에 행차하시겠다고 하질 않니. 내가 그걸 말리느라 얼마나…”

         

       여인이 한탄하듯 갑자기 한숨을 푹-내쉬었다. 그를 본 남자가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흠, 흠. 부인. 애 앞에서 위엄이…”

         

       “흥. 위엄은 무슨 위엄이에요. 그것만큼 세상 쓸모없는 게 어디…”

         

       “…”

       

       나를 두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게, 어쩐지 자연스럽게 그 풍경에 녹아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대체 이들은 누구길래 이리도 친근한 태도로 나를 대해주는 거지.

         

       더구나 자연스레 기품이 배어 나오는 그 태도, 연민하를 적화의 아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칭하는 어투.

         

       어떻게 봐도 범상한 사람들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남성의 생김은, 아무리 뜯어봐도 내가 아는 누군가와 똑 닮아 있었다.

         

       그가 30년 정도 더 나이를 먹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더구나 여인의 눈동자 색은 빼도 박도 못하게 그의 색과 똑같지 않나.

         

       단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기는 해도, 성취가 깊은 어떤 마법사들은 노화를 억제해 젊었을 적 외모를 유지한다고 했다.

         

       당장 단장이 요람에 다니던 시절부터 있었다던 해월화도 도저히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고.

         

       그런 사실들을 종합하니, 내 결론은 어느새 하나를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설마…

         

         

       “저, 혹시 두 분은…?”

       

       “아…흠, 흠.”

         

       가볍게 말다툼 비슷한 걸 주고받던 둘이 그제야 시선을 나에게 돌린다.

         

       무안한 얼굴로 살짝 헛기침을 한 남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개가 늦었구나. 나는 사대룡이라고 한단다.”

         

       그리고 남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내 추측은 확신이 되어 그대로 머릿속에 박힌다.

         

         

       “그리고 이쪽은 우리 안사람이고.”

         

       남자의 손짓에 여인이 푸근한 웃음을 내게 지어 보인다.

         

       애써 잊고 살았던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그 미소를 통해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후후, 예지은이라고 한단다.”

         

       “저…그러면 단장이랑은…”

         

       그러나 내 물음을 듣는 순간.

         

       그 얼굴들에 떠오르는 건 아련한 슬픔과 후회.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 여인의 얼굴에는 또한 묘한 서글픔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 아들이지.”

         

         

       ***

         

         

       나는 그들의 입을 통해 그간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흑련의 저택에 당도한 건 이틀 전의 새벽녘. 나를 발견한 이들은 흑련의 사병들이었다.

         

       적화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수도 전체에 최고 의회 명의의 경계령이 선포되었고, 그들 역시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부근을 순찰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나는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흑련의 저택 앞에 비틀거리는 발로 서 있었다고 했다.

         

       내 품에는 연민하가 안겨 있었고, 그들이 나를 발견한 순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고.

         

         

       “하마터면 마수인 줄 알고 쏠 뻔했다지 뭐냐. 참으로 다행이지…”

         

       “이 아이가 내내 너를 맴돌며 경계했던 덕분에 수습에 조금 애를 먹었단다. 다행히 지금은 괜찮은 거 같지만…”

         

       -뺙!

       

       안주인의 손바닥에는 이제는 익숙한 생김의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부리가 뭉뚝해 꼭 참새처럼 생긴 연민하의 까마귀.

         

       어쩌면 저 새가 우리를 살렸을 지도 모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락용 까마귀라면 수도의 지리를 나보다는 훨씬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미리 저놈에게 주소를 읊어준 게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었던 거 같다.

         

       놈은 나를 보며 두어 번 지저귀고는 열린 창문을 통해 파닥거리며 날아갔다.

         

       아마 제 주인을 살피러 간 게 아닐까.

         

       단장의 부친은 이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물었다.

         

       안주인이 조금 만류하기는 했지만, 굳이 말해주지 않을 이유도 없다.

         

       단장의 부모님인 건 둘째치고, 어차피 지금 우리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들밖에 없다.

         

       나는 내가 보고 들었던 모든 걸 그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단, 연민하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만은 제외하고.

         

       그 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허, 그럼 그 결의안이 패천의 모함이 아니라 사실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표정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정에 한편더 올라갈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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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아카데미 악당영애 교정하기
Score 3.8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reunited with the girl who left me when I lost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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