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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6

       *

         

         원장실 전체를 통틀어 그가 챙길 짐은 가방 하나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였다. 무장이야 사령부에도 있으니 결국 생필품 위주인데, 그나마도 사령부 보급품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이반은 오랜만에 원장실 데스크 아래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

         

         

         처음 이 세상이 아카데미물 프롤로그라고 생각하고 휘갈겨 쓴 낙서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름대로 급박하게 썼던, 아카데미의 ‘상식’들.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어떤 아련함마저 느끼며, 이반은 수첩을 슥슥 넘겼다. 놀랍게도 그때 적었던 ‘상식’ 중 많은 부분이 이미 해결된 상태였다.

         

         잠깐.

         

         해결?

         

         이반은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막연한 기억을 애써 끄집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수첩을 가만히 노려보며, 어디서 들었던 말인데. 대체 뭐였지. 되게 인상 깊었던… 그러니까.

         

         아.

         

         

        -제목 : 아카데미물 역겨운 점 ㄹㅇ

         

        -아니 주인공 성장 이벤트 다 채가고 퀘스트 보상, 히든피스 다 가져가고, 히로인 구원서사 다 지가 독점해 놓고 뭔 문제만 생기면 ‘결국 내가 나서야 하는가’ ㅇㅈㄹ.

        ㄴ맞긴해ㅋㅋㅋ

         

         

         “오….”

         

         

         이반은 마침내 떠오른 생각을 갈무리하며 조용히 수첩을 내려보았다.

         

         아카데미 첫 튜토리얼. 열차 습격. 내가 해결했고.

         

         현장 실습 습격, 내가… 해결했고.

         

         아카데미 비밀의 방. 내가 해결했군.

         

         아카데미물의 꽃이라는 토너먼트. 내가… 아니, 이건 애초에 아카데미랑 관련이 없었는데.

         

         왕녀(교장)를 대상으로 음모를 작당모의하는 귀족들을 처리. 이건 거시적 관점에선 아카데미물 클리셰에 가까우니까(죽음을 먹는 자), 그렇군. 내가 해결했군.

         

         이 시점에서 이반은 잠시 수첩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이거, 주인공 파티가 너무 약해진 것 아닌가?

         

         소소하게 훈련 정도야 봐주고는 있는데, 애초에 아카데미물에서 훈련이란 그냥 지나가며 언급되는 일상 서술에 불과하다. 애초에 주인공은 훈련으로 강해지지 않는 것이 상식이니까.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아카데미물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아카데미란 자고로 무언가를 가르치는 공간이 아니라, 학생들을 끔찍한 역경 앞에 던져두고 키우는 어미사자 식 교수법을 추구해야 한다.

         

         주인공이라면 무릇 실전, 고난, 역경과 우정, 사랑으로 각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체력단련과 기술 훈련을 통해 강해지는 주인공 따윈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성실하고 말랑말랑한 세상이 아니다. 아카데미물이란 그렇다. 하다못해 나루토도 훈련으론 강해지지 못했다. 감히 노력으로 강해지려 했던 무투가 소년의 말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그 마을은 초등학생을 소년병으로 사용할 정도로 실전에 진심이다.)

         

         그럼, 이거. 지금 좀 큰일이 아닌가.

         

         이대로라면 최종장의 보스, 아마도 마왕이거나 그에 준할 녀석을 그 혼자 잡아야 될 위기였다. 그것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그렇게 해도 엔딩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지도 문제였다.

         

         엔리케는 자신의 페이지를 스스로 넘기라 말했다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 이 이야기의 장르는 아카데미인 것이 너무나 명징하지 않은가.

         

         

         “훈련이 아닌 실전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이반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용사파티의 자제들을 이대로 멀쩡히 학업에 전념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는 어떤 위기감마저 들었다.

         

         심지어 순문학에서도 학교에선 공부를 하지 않는다. 순문학은 오히려 살인이 일어나거나 남성간 치정극이 일어나기까지 하니까. 학교는 결코 공부를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아니다.)

         

         실전, 실전이라.

         

         이반은 메마른 눈으로 원장실의 한쪽 벽면을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정교하게 관리한 수많은 병장기들이 깨끗한 상태로 거치되어 있는 모습을.

         

         저것들을 들고 전력을 다해 활용하며 날뛰어야 했던 그 시절의 모습을.

         

         눈이 내리던 북방전선을.

         

         아, 그렇지.

         

         

         “이제 곧 방학이로군.”

         

         

         아카데미 방학엔 학생들이 훈련의 일환으로 일종의 수련회를 하는 것은 상식이니까. 이반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빛 한 점 없는 늦은 밤, 원장실 테이블에 깍지를 낀 채 앉아있는 이반의 두 눈이 홀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주인공들에겐 실전이 필요하며,

         

         그에게 실전이란 살인이다.

         

         

       

       

       

       

        Ep 15. 아카데미 여름방학 이벤트는 실전이 상식

       

       

        

       

       

         

         성 얀스크 대학은 언제나 활기차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 대학의 막대한 학비를 고려할 때, 이를 감당할 수 있는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대학 학점과 졸업 후의 삶 따위를 고민하지 않을 테니까.

         

         이는 지구의 예술 대학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수월하다. 자식을 예대에 보내 4년간 예술을 가르칠 수 있는 부모들은 기본적으로 부유하다. 그런 풍조 아래에서, 예대는 거의 대부분 활기찰 수 있었다.

         

         귀족 자제가 졸업해서 아무리 못해봐야 가문 계승을 할텐데, 그럼 이미 대농장의 지주는 확정 사안이란 소리다. 공장주 자식에게 공부는 필수덕목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좋다.

         

         그러므로, 기말 시험이 이제 막 종료된 시점에서 얀스크 대학은 하루하루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벨라! 학교 끝나고 뭐해? 같이 카페나 갈래?”

         “아니, 바빠.”

         

         

         이자벨은 울적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물론 학생들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다. 벌써 며칠째 실종된 상태인 한 사내를 찾기 위함이었다.

         

         또 다친 걸까. 분명 쓰러지는 것까진 봤는데, 왕녀가 직접 간호한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곧장 병원이 봉쇄된 탓에 찾아가보지 못했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고아원은 아직도 보수 중이고, 방첩사령부는 무슨 일인지 지금 외부와 단절된 채 분주하기만 하다. (원래 첩보기관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저씨, 결혼 실패했다면서요! 아, 슬퍼서 어쩌나. 이러면 진짜 누가 데려가줘야 하는 거 아냐? 주위에 아는 여자가 하나라도 있어요?

         

        -흐으응. 어쩔 수 없네. 뭐어. 그럼 2년만 기다려봐요. 졸업할 때까지도 혼자면 내가 뭐, 봉사하는 마음으로 데려가야지.

         

        -그렇게 감동 받진 말구요. 히힣, 저두 한창 때잖아요? 혹시 알아? 내가 그 사이에 다른 사람 만날지.

         

        -아냐아냐아냐, 그렇게 상처 받지 말아요! 없어! 없다구! 그럴 생각도 없고!

         

         

         같은, 뭐. 있잖아.

         

         그런 상황들. 그런 상황을 기대하며 매일같이 훈련장에도 나가보고, 밤에 멍하니 마당에 앉아 기다려도 보고, 점심시간에 괜히 교정을 걸어다니면서 수상한 정원사도 찾아보고.

         

         그랬는데도 없었다. 어디에서도 이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문득 불안감이 치밀어 오른다.

         

         아저씨는 첩보 요원이고, 심지어 되게 유능한 첩보원이고, 왕녀가 직접 작전을 지시할 정도로 높은 직급의 요원이니까.

         

         거기다가, 왕녀의 결혼 토너먼트에 직접 참가해서 엘프 최강자라는 노인(아니다.)까지 전력을 다해 상대할 정도로 결혼에 진심이니까.

         

         왕녀도 어쩌면, 아저씨한테 관심이 있을 수도 있나?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암, 눈이 좀 예쁘다고 해도 그 수염을 보라. 항상 치렁치렁하고, 기분 나쁘게 결이 좋고, 거기에 머리는 언제나 까치집. 맨날 입고 다니는 옷이 후줄근한 작업복인 남자를 누가.

         

         그래, 그렇지. 내가 아니면 데려갈 사람 없는 불쌍한 노인(아니다.)이니까.

         

         그럼 진짜 많이 다친 건가. 어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이자벨은 한참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그 삭힌 야채 스튜를 시도하고, 이번엔 아저씨가 좋아하는 염장육에 절여볼 생각이었다.

         

         만일 이반이 그 광경을 봤다면 눈물 흘리며 ‘스팸을 김치에 싸서 먹는 날이 오다니.’라고 감탄할 메뉴였다.

         

         

        *

         

         

         “에이날스도티르 양, 혹시 오늘 학교 끝나고 별 일 없으시면 함께….”

         “아 죄송해요. 약혼자가 싫어해서.”

         “약…?! 약혼을 하셨습니까…?”

         “네에, 후후. 아버님이 성화셔서요. 졸업 후에 바로 혼인할 예정이랍니다.”

         

         

         에시디스는 지휘과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는 이 예비 백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예대 중에서 가장 사교적인 이들에 속했다. 예술가 특유의 날카로움이 대단히 무뎌진 학문적 특성 탓이다.

         

         상대의 악기가 얼마나 저렴하니 비싸니, 그걸 어떻게 해먹었느니 마니 하는 문제는 지휘과엔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지휘봉도 비싼 물건이야 넘치고 남았지만, 설령 황금으로 깎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귀족 입장에선 비싼 막대 하나에 불과하므로. 고가의 악기와는 천장 자체가 다르다.

         

         거기에다가, 에시디스의 지휘봉은 철제 막대였다. 분노를 노래하는 여신, 쾅쾅이(2세 : 2개월)는 사실 지휘봉보단 메이스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기도 했다.

         

         이국의 왕녀, 용모단정, 온화한 성격, 검소한 행동까지. 대학 1학년생의 들끓는 청춘 앞에서 에시디스는 결코 외로워질 수 없었다.

         

         

         “에이날스도티르 양이 약혼…?”

         “말도… 말도 안 돼…!”

         “이런 건 현실이 아니야.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이 대학을….”

         

         

         따라서 지휘과 남학생들은 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절규하며 오합지졸처럼 흩어졌다. (납득은 했다. 약혼은 평범한 혼례 방식이었던 탓이다.)

         

         

         “에시! 그, 약혼자가 누구야? 잘 생겼어?”

         “음. 최근에 알았는데 어디 지방 귀족이라고… 잘 생겼어. 아버님 친구분이시고….”

         “엑.”

         

         

         아빠 친구랑 약혼…? 그럼 몇 살이야.

         

         에시디스의 곁에서 이 세기의 로맨스에 설레이던 학생들의 얼굴에 금이 쩌적 갔다.

         

         에시 아빠라면 그, 드로안의 학살자, 에이나르 대왕이고….

         

         어어, 그 ‘학살자’가 마음에 들어했다면… 나이도 비슷한 친구라면… 아마도 취향도 비슷할 테니까….

         

         학생들의 머릿속에 맥주거품을 수염에 잔뜩 묻히며 웃음을 터트리는 근육질 중년 사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에이날스도티르 양! 겨, 결혼은 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아무리 정치적 현안이 소중해도, 에이날스도티르 양의 삶보다 더 소중하진 않아요! 아시겠습니까? 제가, 제가 반드시 에이날스도티르 양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어디 틸레스 백작가 아들이란 놈이 울부짖으며 달려나갔다. 에시디스는 그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어디 계셔? 프리첸카야에 있으시면 한번 꼭 보고 싶은데!”

         

         

         제법 친해진 동기의 말에 에시디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게, 어디 있을까.

         

         약혼까지 한 주제에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토너먼트에 나가더니 실신할 때까지 싸우고 실려나가선 소식이 없다.

         

         기본적으로 드로안에선 인정받을 수 없는 행태다. 드로안은 일부일처제가 전통으로 굳어진 문명 사회. 이런 야만적인 축첩은 ‘전통놀이’ 당해야 하는 일이다. 보통 그런 경우 거세한다.

         

         아직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약혼만 해둔 상태였으므로, 그런 일까지 일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추후 결혼 생활을 생각한다면 기강을 잡아둘 필요가 있다.

         

         에시디스는 조용히 쾅쾅이(지휘봉 : 강철)를 쓰다듬으며 시름에 잠겼다.

         

         

        *

         

         

         그 시점, 이반은 사령부의 작전상황실에 앉아 크라실로프 군사지도를 펼쳐 보고 있었다.

         

         

         “보급선은?”

         “인근 영지에서 확보 가능합니다. 마침 그 근처에 옐라빈스크가 있지 않습니까. 새로 즉위한 셰레티프 공작은 본청 작전에 반드시 호의적일 겁니다.”

         “훌륭하군. 전개 가능한 병력은 어느정도지?”

         “프리첸카야 내부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을 제외하고, 북부, 서부에 파견된 인원들을 다시 제외한다면… 남부 크라실로프 권역 내에 있는 인원 총원이 63인 가량 됩니다.”

         “대내첩보부 필수인원을 제외한 무장인력은?”

         “그럴 경우 47인이 남습니다.”

         “충분하군.”

         

         

         지금 시점에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은 건드릴 수 없으니 빼두고, 작전 대기중인 인력을 훈련으로 차출한다면 50인이 조금 되지 못한다라.

         

         그 정도라면 소규모 전역에서 후방 교란조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타격팀 구성이 가능하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인원을 통제하기엔 차고 넘친다는 의미다.

         

         이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장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훈련 공시를 하려 하는데, 혹시 작전계획서를 상신하시겠습니까?”

         “내가 직접 하지. 작전명은….”

         

         

         피서.

         

         아카데미 여름방학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 요소 중 하나니까.

         

         바다와 산을 아우르는 작전 권역을 잡고, 그 안에서 그의 모든 실전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낸 ‘실전’ 훈련을 실시한다.

         

         그러니까, 작전명은 피서. 그것이면 되었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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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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