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6

    별안간 내의원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긴박한 분위기에 복도를 지나가던 치유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그럴 틈도 없이 예를 표해야 했다.

     

    천황궁의 친위대. 제국 최고의 기사들이 선행하는 가운데 걸어 들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성큼성큼 걸어 복도를 돌았다.

     

    월광궁 파벌의 구역이다.

     

    그 입구에서 황제가 직접 오리라 미리 예상하고 기다리던 팔켄하인이 공손하게 그를 맞이했다.

     

    “존안을 뵙습니다, 폐하.”

     

    “팔켄하인. 완다와 게다가 중상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유감스럽지만 사실이옵니다.”

     

    팔켄하인의 대답에 황제가 눈을 부라렸다.

     

    “살아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전장의 극한 상황을 여러 번 헤쳐나온 사람이기에 경험에서 잘 알고 있었다.

     

    치유사들을 닦달한다고 죽을 사람이 살아 돌아올 일은 없다. 차라리 그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이롭다.

     

    “얼마나 걸리겠나.”

     

    “완다 전하는 고트베르크 선생이, 게다 전하는 리비오 신관이 치료 중입니다. 완다 전하의 치료는 다섯 시간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기다리겠다.”

     

    “자리를 준비하겠사옵니다.”

     

    팔켄하인의 안내를 받아 황제가 고트베르크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시종들이 바로 환경을 준비했다.

     

    “후우.”

     

    제국의 황제로서 가벼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황제는 걱정과 불안에 초조했지만 얌전히 시종이 따르는 차를 받았다.

     

    “와서 앉게, 팔켄하인.”

     

    “예.”

     

    라스가 집도하는 동안 황제의 상대는 팔켄하인의 몫이 됐다.

     

    그러고 보면 이 찻잎을 추천했던 것도 고트베르크였나.

     

    따뜻한 액체에 입을 적시고 조금 침착해진 황제가 팔켄하인에게 말을 걸었다.

     

    “완다와 게다는 어릴 적부터 짐을 많이 따랐다. 정치는 몰라도 늘 황실에 미소를 가져오는 아이들이었지.”

     

    “그랬군요.”

     

    “짐은 옥좌에 오르며 많은 형제의 목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반대로 짐의 편은 확실하게 지켜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황실에는 황제의 직계를 빼도 황족이 열 명 넘게 더 있다.

     

    황제의 사촌 형제와 남매, 그 직계들이다.

     

    정치적인 안정성 때문에 황제의 형제나 가족은 즉위 후 별개 가문으로 독립하는 게 보통이다.

     

    그들이 지금도 황실에서 지내는 건 순전히 황제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다락방을 내어주는 가벼운 느낌이다.

     

    그가 선별한 가족들은 모두 반역 따위는 일으킬 리 없는 온전한 그의 편이다.

     

    황제는 개인적인 시간에는 그들과 취미를 즐기거나 사담을 나누곤 한다.

     

    그는 적에게는 무자비하지만, 아군에게는 더없이 정이 많은 남자였다.

     

     

    오랫동안 황실에 몸담아온 팔켄하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대가 내의원에 온 지 몇 년인가?”

     

    “아아, 오십이 년 차입니다.”

     

    “벌써 그리 되었나. 그대는 짐이 옥좌에 오르기 전부터 내의원에 있었지.”

     

    “그렇사옵니다.”

     

    “그런 그대가 주치의 직을 그만두고 가르칠 정도로 고트베르크가 유능한가?”

     

    “음, 제가 고트베르크 선생에게 가르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팔켄하인의 덤덤한 대답에 황제가 조금 놀랐다.

     

    “그대가 스스로 다른 주치의의 휘하에 들어갔단 말인가?”

     

    “사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는 은퇴하려 했습니다만.”

     

    팔켄하인이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조금만 길을 닦아놓고자 생각했습니다.”

     

    “다음 세대라.”

     

    황제 역시 공감이 갔다.

     

    당장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역시 차기 황제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짐도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했던 게 아니다. 이미 업적은 충분히 이루었어. 지금은 형제자매들과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게 만족스럽군. 하지만.”

     

    황제가 고개를 슬쩍 저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황제라는 자리에는 은퇴가 없다네. 황제관을 내려놓을 때는 이 목숨이 다했을 때뿐이야. 젊을 땐 그렇게나 쓰고 싶었던 이 관이 지금은 짐을 꽁꽁 묶어 짓누르고 있다네.”

     

    팔켄하인 역시 황제에게 동의했다.

    성공은 편안한 삶을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자유를 빼앗아갔다.

     

    “짐의 일대기는 완벽해야만 하네. 후계자는 짐에 버금가는 성군이어야 해. 그 선택을 틀리면 짐의 업적은 빛이 바래고 만다.”

     

    “아주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대는 그 어려운 선택을 단숨에 해냈군. 그 자세가 옳아. 짐의 시대가 끝나면 지금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자리를 대처한다.”

     

    “그 말씀대로이십니다.”

     

    “팔켄하인.”

     

    황제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가 선택한 고트베르크는 믿을 수 있겠는가?”

     

    팔켄하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사옵니다.”

     

    그의 확신에 차 답해주니 황제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로 무심코 시선을 돌린다.

     

    황제는 양손을 꽉 쥐었다.

     

    여신에게 기도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트베르크를 응원했다.

     

     

     

    ***

     

     

     

    “어찌 되어가고 있나?”

     

    알베리치가 닦달하자 소속 치유사가 소식을 전해줬다.

     

    “신관께서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고…”

     

    “이놈아, 그런 한심한 말을 전할 수 있겠냐! 무려 폐하시다. 황제 폐하께서 아래층에 와 계시단 말이다.”

     

    알베리치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치유는 정말로 중요하다. 토벌전의 활약 정도로 비견할 정도가 아니다.

     

    “폐하께서 완다 전하와 게다 전하는 특별히 아끼시거늘.”

     

    살려낸다면 부와 명예를 얻겠지만, 실패한다면 형벌이 떨어질 것이었다.

     

    “고트베르크가 성공하고 리비오 신관만 실패한다면 최악이다.”

     

    안 그래도 요즘 의학을 마음에 들어하는 황제가 아예 치유술을 등한시하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알베리치의 입장에서 이번 사건은 치유술과 의학의 정면대결이기도 했다.

     

    “절대 져서는 안 된다, 리비오.”

     

    아까 잠깐 보기로는 두 공주 모두 부상이 심각했다.

     

    경험이 많은 알베리치는 바로 파악했다.

     

    평범하게 치유술을 써서는 치유 도중 환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부상이다.

     

    기적이 과하면 작은 인간의 몸으로는 차마 여신의 은총을 버티지 못한다.

     

    일정 정도 이상의 부상을 치유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알베리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트베르크라도 이번만큼은 힘들 게야. 심지어 부상이 더 심한 완다 전하를 맡았다.”

     

    월광궁의 기세를 누르려면 지금이다.

     

    위기인 만큼 기회라고 알베리치가 생각하던 때였다.

     

    “주교님!”

     

    헐레벌떡 달려온 신성기사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응급환자가 한 명 더 도착했습니다!”

     

    “지금 상황에 또 말인가?”

     

    “실은 아까 공주 전하들과 충돌한 또 한 대의 마차에 타고 계시던 분입니다만…”

     

    “그러고 보니 두 대가 충돌해서 일어난 사고라고 했었지. 왜 이렇게 늦었나?”

     

    “추락한 지형이 산지라 구조가 늦었습니다. 그, 그보다!”

     

    다음으로 신성기사가 전한 말에 알베리치가 귀를 의심했다.

     

    그가 눈동자를 크게 뜨고는 손을 벌벌 떨며 바로 달려나갔다.

     

     

    신성기사들이 환자를 실은 들것을 카트에 옮겼다.

     

    알베리치는 그 환자에게 뛰어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사색이 됐다.

     

    “여, 여보…!”

     

    알베리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왜 자신의 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내의원으로 실려 왔는가.

     

    “여보, 일어나시오!”

     

    기절했다. 대답이 없다. 눈을 뜨지 않는다.

     

    간신히 숨은 붙어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옮겨, 옮겨라! 당장!”

     

    집중 치유실로 들여보낸다.

     

    알베리치는 아내의 상태를 바로 판단했다.

     

    ‘치유주문으로는 못 고친다.’

     

    구조가 늦어 이미 한계를 넘었다.

     

    ‘제발.’

     

    패닉에 빠진 알베리치가 손을 벌벌 떨며 아내에게 치유주문을 시전했다.

     

    “쿨럭!”

     

    내장을 밀어내는 압력 때문에 토혈이 더욱 짙어졌다.

     

    먼저 실려온 공주들과 비슷한 정도다.

     

    이대로는 치유 전에 환자가 사망한다.

     

    “오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평생을 여신에게 믿음을 바쳤거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현실을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알베리치를 짓눌렀다.

     

     

    고뇌는 짧았다.

     

    그는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은 벌이 아닐까.

     

    여태 환자를 환자로 안 보고 내의원의 이해득실만 따져온 자신에 대한 벌.

     

    환자를 고쳐야 하는 이유는 그가 다쳤기 때문이다.

     

    내의원의 정치니, 치유사의 명예니 하는 다른 말은 모두 필요 없는 것이거늘.

     

    “그래서 아까 고트베르크는 그리 화를 냈던 것인가.”

     

    알베리치의 생각이 마침내 그 남자에게 도달했다.

     

    왜 여태 그 젊은이를 당해낼 수 없는지 깨달았다.

     

    은퇴를 생각한 팔켄하인이 옳았다.

     

    초심을 잃고 사회라는 먹물에 물든 자신에게는 환자를 고칠 자격 따위 없어진 지 오래였다.

     

    방법이 뭐가 됐든 고칠 수 있는 환자가 늘어난다. 자신은 진작 고트베르크의 의학을, 변화의 흐름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후회만이 몰려올 뿐이었다.

     

    “고트베르크.”

     

    그라면, 어쩌면.

     

     

     

    쾅!

     

    순식간에 복도를 달린 알베리치가 월광궁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고트베르크, 고트베르크 선생은!”

     

    “알베리치 경? 선생님께서 중요한 수술을 하고 계십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휴고가 그를 쫓아내려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갔다.

     

    ‘수, 수술실! 저기인가!’

     

    알베리치는 휴고가 막을 틈도 주지 않고 수술실 명패 아래로 몸을 던졌다.

     

    “알베리치 경!!”

     

    휴고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조금 늦었다.

     

    쿵!

     

    알베리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수술실 내부가 보이는 준비실이다.

     

    그를 막으려 세 명의 치유사가 달려들어 바닥에 넘어트렸다.

     

    “으윽!”

     

    엎어진 채로 알베리치가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공주를 수술 중인 고트베르크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트베르크!! 부탁이오!!”

     

    알베리치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아내를, 아내를 살려주시오!!”

     

    라스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의 필사적인 외침이 무색하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라스는 집중력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 수술 중인 환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장 밖으로 나가라!”

     

    휴고가 알베리치의 몸을 붙들고 밖으로 질질 끌어낸다.

     

    “고트베르크 선생!!”

     

     

    수술실의 라스는 당연히도 알베리치의 긴박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손도 눈도 뗄 수 없는 상황이다.

     

    그의 앞에는 아직 봉합 중인 환자의 복부가 시뻘겋게 열려 있었다.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라스가 입을 뗐다.

     

    “클로에.”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