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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6

       40층의 시련 ‘천변(千變)의 방’은 마탑의 중층이 시작되는 입구에 해당한다.

        이곳을 통과하는 마법사는 신비를 재해석하고 자신만의 마력을 핏줄에 녹여내며 최소 4위계에 해당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한다.

        학파 내에서의 위상뿐 아니라 공략대에도 정식으로 합류할 자격이 주어지는 중요한 길목.

        무엇보다 40층을 통과한 마법사는 탑으로부터 ‘이명’을 부여받는다.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본질적인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인 만큼 탑에서 스스로를 마법사라 칭하려면 이명이 필수였다.

        중층 이상부터 거주하는 ‘층의 주인’, 혹은 ‘관리자’들은 이명이 없으면 대화할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프리나가 해주학파 출신으로 40층의 시련에 도전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한 가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본래 시련이란 통과하면 다음 층으로, 실패하면 한 층 아래로 돌아가는데 지금 나와 세라의 목적지는 39층이었다.

        프리나가 중층에 오른 후 내려왔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1층에서 만나도 되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력승강기가 ‘증명의 층’에 도착하자 세라는 내게 한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지금 프리나 선배는 저희 글레시아의 의료소에 계신데, 시련에 대한 건 묻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거에요.”

        “왜? 어디 다쳤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충격이 크신지 하루종일 병실에서 끙끙 앓고 계셔서요. 아무래도 천변의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결과는 보시다시피…….”

       

        대충 시련을 통과하는 데 실패한 듯하니 상처를 후비지 말고 위로나 해주라는 뜻이었다.

        해주학파의 미래를 견인하는 쌍두마차의 일원으로서 나 역시 참담한 심정이었다.

        위로하는 측면에서 하다못해 갤러리의 완장 자리 정도는 줘야겠지.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세라를 따라 병실에 들어갔다.

        6인실 안에서는 다섯 명의 남녀가 서로 대화 중이었다.

       

        “이야, 저는 이번이 세 번째 도전인데 떨어져서 아쉽네요.”

        “시련 내용이 제각각이어서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증명의 층에서 힌트 찾아서 세 번 만에 겨우 성공했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들 성신제 때는 뭐 하세요?”

        “저는 세라 님이랑 설화수 판매 부스 운영해요. 아, 마침 오셨네요? 세라 님!”

       

        다들 하나같이 부상을 달고 있었지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굴엔 화기애애한 미소를 띤 채였다.

        문하생 대표인 세라가 저들에게 불려가자 나는 구석에 놓인 커튼이 쳐져 있는 침대로 향했다.

        따사로운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새하얀 병실에서 이곳만이 유독 그늘에 가까웠다.

       

        차라락!

       

        커튼을 걷자 세라의 말처럼 쇠약해진 프리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질려 있고, 더운 날임에도 이불은 이마까지 올려붙였다.

        나는 머리맡에 놓인 위치노트를 조심스레 펼쳐 안을 확인했다.

        병실에서 떠들지 말라느니, 식사권유 하지 말라느니 하는 분노를 꾹꾹 눌러담은 메모가 잔뜩 적혀 있었다.

       

        “크, 클락……?”

        “선배!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나, 난 이제 틀렸어. 여긴 명계나 다름없는 곳이야. 내가 죽게 되면 이 노트만이라도 부탁해. 최소한 다른 녀석들이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가면을 쓰고 자신인 척 글을 올려달라는 건가.

        과연 마지막 순간까지 갤러리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녀였다.

        이렇게까지 갤질에 진심을 드러내 버리면 묘비에 회색 딱지를 달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앙상해진 프리나의 마지막 유지를 이어받으려던 순간, 소중한 선배를 이렇게 만든 사악한 원흉들의 목소리가 커튼을 뚫고 들려왔다.

       

        “어? 프리나 님도 일어나셨네요?”

        “으, 응?”

        “어제 늦게 주무셨나봐요? 열은 좀 내려가셨어요?”

        “바, 밤까지 시끄러워서 그냥…….”

        “저희 전야제 때 난파선에서 같이 춤 추기로 했는데 프리나 님도 오실래요?”

        “아, 아니 난 됐…….”

        “꺅! 피부 좋으신 거 봐, 진짜 실례지만 어떤 화장품 쓰시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 그만……!”

       

        인싸들이 쏟아내는 퇴마 수준의 질문 세례에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만 프리나.

        영문을 모르는 세라는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퇴원을 못 하는 중이라며 그녀를 걱정했다.

        하루 종일 저러고 있으니 컨디션이 나아질 리가 없지.

        이곳에서는 그녀의 병세가 호전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나는 곧장 퇴원을 요구했다.

       

        “내가 데려갈게.”

        “네? 아직 아파 보이시는데요?”

        “여기서 벗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절차는 나중에 밟아도 좋으니까 우선 나가야겠어.”

        “잠시만요, 그러면 가서 사람을 불러 올게요.”

       

        세라가 데려온 사제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몇 가지 동의서에 서명한 나는 프리나와 함께 의료소를 나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그녀는 마력 승강기에 몸을 실은 순간부터 몸상태가 나아지기 시작하더니, 2층에 마련된 해주학파의 숨겨진 창구로 향하는 동안 점차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프리나에게 대학원생들에게 조공받은 칙칙한 로브를 둘러 빛을 차단해 주었다.

        그렇게 그녀와 처음 만났던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날 때쯤에는 제법 안정된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식은땀을 닦은 프리나는 처음으로 얼굴을 내보이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드, 드디어 살았네. 인싸 놈들이랑 한 방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물맛도 최악이고…… 설화수는 대체 뭐야? 맛도 더럽고 울렁거리기만 하네.”

        “왜 저한테 연락 안 했어요? 진작 데리러 갔을 텐데.”

        “위치노트만 펴면 걔들이 뭐 하냐고 말 걸잖아! 게다가 갤러리에 검색해보니 너 수배 중이었다며? 해주학파 라운지도 날아가고 갈 곳도 없는데 괜히 눈에 띄일 바엔 거기 얌전히 있는 게 낫잖아.”

        “아…….”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누명 사건을 말하는 거로군.

        이제는 내가 무고했다는 게 증명된 사건이기에 떳떳하다고는 하나, 그 때문에 프리나 역시 위험해질 뻔했던 건 사실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잠자코 걷던 도중 옆구리를 쿡 하고 찔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또 살살이 녀석인가 싶어 대충 치우려 하던 나였지만 범인은 다름 아닌 옆에서 걷고 있는 프리나였다.

       

        “야, 너 뭐해?”

        “네?”

        “두, 둘이 좁은 길을 걸을 때는 손 잡아야 하잖아.”

        “……왜요?”

       

        뜬금없는 소리에 이유를 물었는데 저쪽은 오히려 더 의아해 하는 반응이었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도 아니고 대체 왜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거지?

        마법제 때야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지만 지금은 딱히 전투 중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내가 저주명을 정했던 방의 입구에 도착할 터.

        그러나 프리나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그게 학파 규칙이니까지!”

        “에이, 세상에 그런 이상한 규칙이 어딨어요 선배?”

        “너, 갑자기 왜…… 아! 내가 준 인형! 그거 어쨌어!!”

        “인형이요?”

       

        마법제가 끝나고 받았던 인형을 말하는 건가?

        안 그래도 그간 가방 안에 넣고 다니다 보니 이곳저곳이 망가져 수선을 해야하던 참이었다.

        목과 손 부근이 뜯긴 인형을 보여주자 프리나의 안색이 심각하게 나빠졌다.

       

        “이렇게 빨리 망가질 리가 없는데!?”

        “제가 그동안 너무 막 다뤘나 봐요. 나름 조심은 했는데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어, 어떻게 되먹은 정신력이야…… 안 돼, 최소한 임시방편이라도…….”

       

        그녀는 빛과 같은 속도로 인형을 낚아채더니, 품속에서 주섬주섬 붉은 실타래를 꺼내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그것을 자신의 손에 휘감은 채 끝을 이빨로 잘라냈다.

       

        “자, 이거 손가락에 묶어.”

        “제가요?”

        “너, 너 말고 누가 있어! 움직이는데 제약은 없을 거야. 내가 인형 고칠 동안만이니까 빨리!”

        “으음…….”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얽힌 실의 끝부분은 조금 전 프리나의 입술에 닿아 젖어 있었다.

        그것을 약지에 감아 한 바퀴 돌리자 우리를 엮은 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평소와 똑같은 기분이지만 어딘가 묘하게 진정이 안 되는 기분.

        안도의 한숨을 내쉰 프리나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자, 이거 잡아.”

        “네.”

        “다음에도 인형 망가지면 미리 말해야 돼.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는 거야, 알지?”

        “그야 당연하죠.”

       

        오두막에 도착한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프리나를 무릎 위에 앉혔다.

        왜 잊고 있었을까.

        ‘선배가퇴원하면여심신의안정을위해최소삼일간은신체의어느한부위를맨살에닿게할것’은 해주학파의 기본적인 상식이었을 텐데.

        이렇게 되면 성신제 기간을 프리나와 함께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러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프리나가 파딱이 된 순간 주딱과 파딱이 딱 붙어서 친목질을 하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완장들과의 교류를 최대한 지양해왔다.

        지난 5년간 기존 파딱들과 만나지 않았던 이유도 보이는 부분이 전부라는 나름의 공정함을 유지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나와는 관련이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한때 학회에서 주목을 받았던 커뮤니티가 일시에 망해버린 이유도 지휘부의 무능, 혹은 과도한 친목에서 불거진 불만이 터졌기 때문일 것이다.

       

        “뭐, 뭐해 더 세게 안 끌어안고. 나 흘러내리잖아.”

        “아, 죄송해요.”

        “저, 저번에도 말했지만 실수로라도 위나 아래에 손 닿으면 알지? 그, 그땐 너랑 나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죽는 거야.”

        “…….”

       

        그렇기에 프리나를 파딱으로 임명한다면 이렇게 짙은 스킨십은 위험했다.

        땀이 말라 달콤한 냄새가 나는 목덜미에 코를 파묻거나, 저번에 인장을 찾으려다 실패했던 복부를 꾹 누르다 보면 언제 정분이 나 버릴지 모르니까.

       

        고민하던 나는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학파 규칙은 어디까지나 ‘심신의 안정을 위해 붙어있는 것’이었다.

        즉, 프리나의 상태만 호전된다면 굳이 삼 일간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뜻.

        몸은 괜찮아졌으니 이제 그녀를 힘들게 하는 문제는 정신뿐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마음껏 갤질을 하려다 관리자에게 차단된 계정이라는 메시지를 보고 패닉에 빠진 프리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

        “으, 응……?”

        “시련은 왜 실패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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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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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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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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