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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6

        

         “머저리들아! 빛!! 후레쉬라도 제발 키고….”

         “컥?!”

         

         고함, 욕설, 선혈, 납탄.

         이것만 해도 충분히 난무하는 게 많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인원들의 시각과 청각을 교란하고 괴롭히는 건 역시 제로 그 자체였다.

         

         빠각!

         경쾌한 파열음, 공기를 찢어발기며 휘둘러진 기계 팔이 남자의 어깨뼈를 부순다.

         

         까드득!

         오싹한 금속성, 붙잡힌 총열이 찰흙 마냥 찌그러져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적들의 진형은 이미 무너졌다.

         

         그래봐야 빙 둘러서 이쪽 문가를 향해 각자의 총기 끄트머리만 내밀고 난사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유일한 진입로를 틀어막는다는 점에서는 분명 탁월했거늘.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가진 상대의 침입을 허용한 시점부터는 오히려 각개 격파를 장려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염병…! 팔다리 뽑아 놓으면 철근이나 똑같은 새끼가!!”

         

         – ?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

         

         타당!! 하고, 귀청 떨어지는 발사음과 함께 총구가 불을 뿜는다.

         날뛰는 제로가 남기는 빛줄기와 잔상을 제외하면, 어둠을 밝혀주는 유일한 광원이 바로 저 총구 섬광(Muzzle Flash)뿐인데.

         

         과연 그 간헐적인 조명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냐 하면… 우습게도 전혀 아니었다.

         

         내던져진 약탈물에 발이 걸려 더듬더듬 네 발로 기어다니는 것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치 사진 찍히듯, 섬광이 터질 때마다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과 튄 피로 인해 얼룩진 드로이드 장갑이 언뜻언뜻 보이는 게 숫제 화질 나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들었으니까.

         

         “…저게 맞아?”

         

         ……솔직히, 나라도 아무런 대처 수단 없이 어두운 방 안에 광분한 전투 로봇과 갇힌다면 당황하고 허둥지둥할 것이다. 물론 그 짧은 공황 상태가 풀리면 그나마 정신머리 있는 다른 갱단원처럼 광원을 찾거나 반격 수단을 고려하겠지.

         

         또 한편으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저항하고 싶은 마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빛이 일어난 곳에 마구잡이로 방아쇠를 당기는 건 어떨까 싶었다. 애당초 거기에 총질을 하면 맞는 건 제로가 아니라….

         

         “아으악?! 씨발! 놈도 총을 쏜다!”

         “그륵… 쿨럭…! 아무나 지혈제 좀…!”

         

         “…아주 지랄들을 하세요. 지랄을.”

         

         탕!!

         

         자신들의 독한 성정에 그대로 노출된 멍청이들 보고 혀를 찼다. …혀를 찬김에 방향을 헷갈렸는지 내가 버티고 있는 쪽으로 기어서 도망치려 한 비겁자도 죽였고.

         

         나라고 어둠을 꿰뚫어볼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 장담할 순 없었지만, 못해도 제로가 죽이거나 무력화한 놈들보다 자기들끼리 총질해서 쓰러지고 저세상으로 먼저 떠난 놈들이 훨씬 더 많아 보였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서, 아예 총소리가 난 곳에다가 칼을 붕붕 휘두르며 접근하는 불안 장애 환자까지.

         

         그야말로 부의 연쇄나 다름없는 현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새끼들은 오인 사격이 무섭지도 않나? 어쩜 이렇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인지 모르겠네.

         

         이쯤 됐으면 그냥 팔짱 끼고 구경해도 알아서 자멸해주는 건 아닐까… 하는 자그마한 희망 사항은.

         총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은 불빛이 암흑을 몰아냄과 동시에 사라졌다.

         

         팡! 치지지직…….

         

         “이건… 신호탄(Flare)? 이런 게 있었구나.”

         

         한복판에 내던져진 불그스름한 광원이 드디어 화물칸을 밝히자, 잠깐 눈 좀 가려졌다고 벌어진 대참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여기저기 난잡하게 쓰러진 떨거지들, 번들거리는 피 웅덩이, 엉망진창 손상된 상자더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쪽 벽면에 똘똘 뭉친 생존자들.

         

         “이 빡대가리 새끼들이… 대체 무슨 개삽질을…!”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어중간하게 꽂힌 날붙이나 바람 구멍 난 허벅지 등 어디로 봐도 드로이드가 손을 댔다기엔 애매한 부상자들의 상태를 본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와… 설마, 그런 와중에도 한 따까리 하는 놈들은 그새 다른 애들을 던져주고 슬쩍 몸을 뺐어? 진짜 자기 보신 하나만은 기가 막힌 십새끼들이시다.

         

         덩치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전장을 훑는다.

         남은 병력과 멀쩡한 제로의 상태를 보고 승산을 점쳐보려는 듯, 신중하게 굴러가는 사고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어이, 기관사 아가씨! 우리도 그 앞까지는 넘볼 생각 따위 없으니까. 적당히 하고 물러나는 게 피차….”

         

         “…무슨 시체가 말을 다 하네?”

         

         장황한 헛소리의 도입부를 가차없이 끊어버린다.

         제로를 코앞에 두고 먼저 모습을 보였던 나를 기억해낸 점은 꽤 침착했지만, 놈이 씨부리거나 말거나 곧바로 권총을 들어 덩치의 머리통을 가늠자 중간에 놓고 격발한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간단한 소감을 말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나나 제로 중 누구도 얌전히 기다려 준다고 말하거나, 어디 한 번 지껄여보라고 허락도 안 했거늘 갑자기 왜 똥폼을 잡으시는 걸까?

         

         더군다나 주력 병력은 뒷칸에 있다고 알아서 실토까지 했으니 굳이 어울려줄 이유조차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잔챙이들에게 투자되는 시간이 아까울 지경.

         

         “!!”

         “으어?”

         

         놈이 반응한다.

         체공하는 총알을 본 건 아니고. 아무런 망설임없이 내가 자신을 겨누는 걸 보자마자 바로 옆에 있던 다른 갱단원의 목덜미를 붙잡고 자기 앞으로 끌어들였다.

         

         고기 방패가 된 남자의 목이 순간적으로 뒤로 꺾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이내 숨이 끊어진 몸뚱어리가 힘없이 허물어진다.

         

         “오…? 나름 개조 좀 했나 봐?!”

         

         “이… 이 씨발년이이잇…!!”

         

         빈정거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이 순수한 부러움에서 우러나온 말인데, 혼자서 격분한 덩치가 달려든다.

         

         – 상당히 버르장머리가 없으시군요! –

         

         그렇게 자연스럽게 중간에서 적들의 시야각을 차단하던 제로가 멧돼지를 가로막았고.

         

         쾅—!!

         

         자로 잰 듯한 격돌. 마치 원시적인 힘 대결이라도 하는 것처럼 양측의 손가락이 맞물리듯 깍지 껴진다.

         충격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함인지, 제로의 다리가 바닥에 사정없이 긁힌 자국을 내며 뒤로 밀려난다. 출력에서 살짝 밀리나 싶었지만, 덩치가 가속도를 잃자 서로의 완력은 백중지세.

         

         하지만 손도 완전히 막히고, 다리 또한 밀어붙여오는 상대방으로부터 대항하기 위해 고정되어 있으니. 동료를 태연하게 희생양으로 삼은 것에 당황했던 잔당들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총부리를 겨눴다.

         

         “…….”

         

         가슴이 두근거린다.

         장갑 틈새에 설치된 보관함에 있는 손도끼를 꺼낼 여유도 아슬아슬한 저 대치는, 어찌 보면 자신의 외부 장갑과 성능을 과신해서 연출된 위기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왜 ‘연출된’ 상황이냐고?

         그야 쟤는 더 이상 장갑만 두른 거북이가 아니었으니까.

         

         최초 커스터마이징 시, 저금을 몽땅 털어서 제로의 복합 장갑을 맞춰줄 때 나는 저 바보를 방패나 전열로 쓸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무슨 기계생을 살아갈지는 몰라도 쉽게 부서지지 말라는 의미에서 가능한 방어력이나 챙겨준 거지.

         허나… 파이브 아이즈와의 술래잡기 같은 전투 양상을 직관하고 마음을 바꿨다.

         

         공격을 통해서 몸을 지킬 뿐만 아니라, 적을 배제함으로서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도 하나의 수단. 그리고… 단순히 함부로 적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내 의중 때문에 일방적으로 얻어맞게 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

         

         애꿎은 로봇한테 총질, 칼질했으면 지도 반격당할 각오 정도는 해야지.

         

         그런고로 마침내 무장을 설치한 후 첫 실전 투입이다.

         

         불행하게도 제대로 된 등급의 임플란트 하나 못 박는 처지의 나에겐 불가능하지만, 메모리가 전투 원리(Combat Mechanism)로 가득 찬 제로라면 진가를 보여주리라 믿는다.

         

         …아, 이건 미리 고백해 두겠다. 저 녀석은 딱히 무기군에 관한 선호도가 없길래, 그… 내 취향 부품을 좀 가미했다.

         

         기이잉!

         

         “?!”

         

         알아보기 쉬운 준비동작이 있던 나와는 달리, 어떤 예고도 없이 맞닿은 드로이드의 손이 360도 회전한다. 대항하는 힘은 유지하되, 당연히 덩치의 손가락은 사이사이에 낀 채 그대로.

         

         와드득. 순식간에 손목 관절과 뼈가 으스러진 덩치의 입이 쩍 벌어진다.

         사람 같은 휴머노이드라고 끝까지 맞춰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얘는 자기가 유리한 건 마음껏 활용하는 기린아니까.

         

         – 근력은 그럭저럭입니다만, 유연성이 한참 부족하시군요. –

         

         주춤주춤 물러나는 덩치의 몸 안쪽으로 제로가 파고든다.

         사격 각이 가로막혀 남은 무법자들이 멈칫한 틈을 타,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젖으로 주먹이 뻗어진다.

         

         고작 자유 회전형 관절이 무장이냐고? 그럴 리가 있나, 저건 해당 무기 사용을 위한 기초 설비에 불과할지니!

         

         챙—!

         

         제로의 손등 쪽으로부터 칼날이 전개된다. 재질 자체는 용병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컴뱃 나이프와 똑같았다.

         허나 특필해야 할 점은 그 크기. 예전 군대에서도 은근히 크고 무겁다고 구시렁거리던 대검을 세 자루는 합쳐 놓은 검신이 덩치의 경추를 관통했다.

         

         해당 파츠의 공식 납품 명칭은 ‘완전 수납형 전술 절단검’.

         로망을 아는 디자이너들이 세상 어딘가엔 남아있는 것 같으니 당당하게 말하겠다. 손등에서 튀어나오는 히든 블레이드를 남자가 어떻게 참아…!

         

         – 그러게, 처음부터 순순히 총에 맞아 죽으셨으면 아샤님이 무안해하시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요. –

         

         “야! 다 들리거든!?”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창 끄덕이는 와중에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기는.

         

         영악한 제로는 이미 덩치의 사체를 이동형 엄폐물로 삼아 놈들의 코앞에 도달했다.

         구심점을 잃어버린 모지리들이 새빨개진 히든 블레이드와 피칠갑을 한 드로이드를 보고 뒤늦게 방아쇠를 당기는 것까지 본 나는 혹시라도 튕긴 탄에 맞지 않도록 아예 몸을 벽 뒤에 감췄다.

         

         한참전에 죽어 나간 애들에 비하면 남은 놈들이 분명 상황 판단도 더 빠르고, 동작도 절도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강함이 수치로 환산했을 때 1인지, 1.1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백 점짜리 로봇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숫자라는 건 변함없었으니까.

         

         “개, 씨발…!”

         “눈!! 렌즈를 깨뜨리면 이길 수 있….”

         

         또 한차례, 격한 비명과 총성이 오가고.

         휘둘러진 검이 공기 가르는 소리와 끈적한 액체가 튀는 소음의 연주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고개를 내밀자 꺼져가는 신호탄의 어스무레한 빛과 뿌연 연기에 휩싸인 채 위풍당당하게 선 제로.

         그리고 저 멀리, 멀쩡한 조명이 남아있던 일반 칸에서 그 모습을 보고 미친듯이 도망치는 갱단원들이 보였다.

         

         “…망할.”

         

         급한대로 쏴 본 권총의 어림도 없는 탄착점을 보고 원거리 견제는 포기했다.

         이제 와서 도망칠 거라면 호버크래프트는 꼭 두고 가라고 하고 싶은데 들어줄 리가 없겠지.

         

         어쩔 수 없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겠지만 갈 때는 통행세를 지불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수밖에.

         

         “…일반 승객한테는 그거 절대 휘두르면 안 된다?”

         

         – 물론입니다. 수색 섬멸(Search-and-Destroy) 모드로 이행하겠습니다. –

         

       

       

         그게 대체 그냥 섬멸 모드와는 다를 게 뭔지, 나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론의 저금, 간지폭풍으로 대체되었다. 감사하십시오 휴먼.

    히든 블레이드 가격 <<<<< 독립형 손목 관절 가격이라는 자질구레한 비하인드 설정이 있습니다.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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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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